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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룡 Jan 03. 2024

어느 곳에서나 살바도르!

살바도르 클럽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지침

개척자? 구원자!


    구원은 무엇일까? 상민이는 구원자보다는 개척자란 말이 입에 잘 붙는다고 했다. 그러나 구원자와 개척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개척과 구원의 차이부터 살펴보자. 개척은 이미 있는 좋은 땅을 발견해 내는 것이고 이는 미지의 영역에 살 만한 공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구원은 축복의 깃발을 꽂는 것과 같다. 원래 있던 땅을 상징 하나로 이전과 다른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개척과 구원은 그 결과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개척의 결과는 영토의 확장과 새로운 생산품-개척지의 특성에 따른- 같이 직접적인 이득으로 나타난다. 구원의 효과는 보다 마술적이다. 농작물이 눈에 띄게 잘 자라게 되거나, 이전에 없었던 자원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아침에 가볍게 일어나 진다든가, 술 없이도 밤에 잠들 수 있게 되는 정도의 이점이 있을 수 있으리라. 구원된 곳은 수치화되거나 계량할 수 없는 방식으로 더욱 살만한 공간이 된다. 개척은 양적으로, 구원은 질적으로 다른 세계를 연다. 구원은 그 특성상 은유적으로 이루어지고, 보다 깊은 부분에서 개인의 세계에 개입한다.(감자 한 개를 더 먹는 것과 아침을 기운차게 시작하는 것은 품고 있는 가능성의 크기가 다르다.)


    개척자와 구원자에도 차이가 있다. 개척은 하는 것이고 구원은 되는 것이다. 구원자는 구원자가 됨으로써 구원을 행한다. 장소나 시간을 건드리지 않고 긍정해 내는 것, 그것이 삶에 대한 충동이자 생명력이다. 또 단순히 생각해 봐도, 현대에 더 개척될 만한 곳은 드물다. 이미 살 만한 미지의 땅은 모두 발가벗겨졌고, 이제 탐험은 이전만큼의 효율이 나지 않는다. 항로에 몸을 싣고, 문물을 들여오는 것으로 변화하던 시대는 끝났다. 콜럼버스가 지나간 곳엔 꽃을 뿌리고 노래할 음유시인이 필요하다. 이미 밝혀진 땅들에 축복을 불어넣는 것이야말로 진정 손이 많이 가고 없어선 안 될 일이다.


    살바도르 클럽은 개개인이 어디에서나 구원자들의 모임을 쉽게 시작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구원의 시대는 개척의 시대처럼 주류가 있고, 누군가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시대가 아니다. 개개인으로부터 시작되고, 위아래 없이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움직임 이어야 한다. 1기의 운영 과정을 세세히 다룸으로써 후에 모임을 시작할 구원자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


살바도르 클럽에서 만난 상민을 따라간 겨울 서핑. 얼음장 같은 물살로 얼굴을 때리는 척박한 겨울바다가 조금 친숙해졌다. 


매일 아침 끝내주는 경험을 한다. 우리가 살바도르라는 것.


    살바도르 클럽의 목표는 하나, 아침에 기운차게 일어나는 것이다.

    "매일 아침 나는 최상의 경험을 한다. 바로 내가 살바도르 달리라는 것."

    _ 살바도르 달리


    모두가 달리처럼 침대를 나서는 나날을 꿈꾼다-조증처럼 낙관주의자로 살아야 한단 말은 아니다. 사람은 서사적 정체성을 지닌다. 자신이 말하는 하나의 이야기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아름다운(숙명적인, 필연적인, 숭고한, 신나는 등등) 이야기를 발견한 사람은 어떤 상황도 살아낼 수 있다. 이는 곧 구원이다. 외견상 바뀌는 것은 하나 없지만, 어제와는 전혀 다른 오늘이다. 삶에 의미가 있고 이유가 생긴다. 또한, 이들은 스스로 구원됨으로써 구원자가 된다.


    개인의 구원은 곧 세계의 구원이다. 이미 같은 상황에 처한, 혹은 후에 같은 상황에 처할 이들에게 구원자들의 삶은 하나의 섹시한 메타포가 되어 삶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지침이 된다. 그리고 각자가 서 있는 세계의 끝에 맞게 이야기를 구부려 도움 받은 자들은 또 다른 구원자가 된다.


    구원자는 한 명이 아니다. 이야기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청자와 화자 사이엔 보이지 않는 연결이 생기고 이 마술적 공간 내에서만 우리의 정체성은 찰나 동안 존재한다. 귀 기울여 듣고, 자신이 기대하는 미래를 선물하고, 마음껏 신날 수 있는 정체성의 집. 그곳이 바로 살바도르 클럽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수염은 물엿으로 굳힌 것이라 한다. 몰려드는 개미 때문에 꽤나 고생했다고.


침대에서 시작하는 혁명


    반역은 한 나라에서 다뤄지는 가장 큰 죄였다. 주어진 세계를 거부하고 개인의 세계관을 지닌다는 것은 사회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었기에. 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처벌도 없다. 오히려, 현대 사회는 개인이 새로운 세상을 공유해 주기를, 혼란스러운 현실을 살아갈 하나의 메타포를 제시해 주기를 바란다.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 자신의 역사를 가진다는 것은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겠다는 뜻이다. 우린 모두 자유롭게 기억할 권리와 힘을 지녔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줄에 묶인 코끼리처럼 타율적으로 남이 쥐여주는 이야기를 삶의 지침으로 삼는 이들이 많다. 이는 손쉬운 소통의 형식을 제공하는 플랫폼의 영향도 크다. 플랫폼은 개개인이 똑같은 규격에(한 컷의 직사각형 스토리, 게시물 등) 자신을 담게 해 세상을 평평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선택과 재조직의 과정에서 생명력을 지니고 무엇을 겪었는지 보다도 그것을 어떻게 편집했는지가 개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동시에 그의 미래에 대한 기획을 보여주게 된다.


    개인의 서사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이미 통용되는 서사를 선택하는 것은 무척이나 편리한 일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면 그것이 행복일 거라는 서사. 저축하고 아끼면 그 근검함이 행복한 일상을 지켜주리라는 서사. 돈을 쓴 만큼 행복함을 불러온다는 서사. 각 사회에는 통념처럼 받아들여지는 공통된 서사가 있고 이는 그 사회의 신화이다. 자신의 미래를, 현재를, 과거를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우린 이 신화의 언어를 빌린다. '나는 재수를 해서 의대에 갈 거야 - 그리고 신화에 따라 행복한 여생을 보내겠지', '5성급 호텔에서 오마카세를 즐기며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했어 - 내가 얼마를 하루에 쓰는지 알아? 이 정도 소비면 나는 행복할 수밖에 없겠지!' 이런 언어들은 쉽게 공감된다. 화자와 청자는 쉬이 서로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신화에 선택될 수 있는 사람들은 몇 없거니와 자신의 실상과 다르기에 어딘가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단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 사회에 통용되는 신화의 단어들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유로 - 우린 무엇을 해야겠단 끌림을 느낀다. 안정적인 직장보다 극단을 전전하는 배우가 되고 싶을 수 있고, 호텔에 가기보단 겨울 바다에서 서핑을 하고 싶을 수 있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러 LA에 가야만 할 것 같을 수 있다. 이런 충동들은 아름답고 삶의 활력을 줌에도 공유되기 쉽지 않다. 부모님 입장에선 얘가 공부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는 것으로 여겨지고, 주위 사람들에겐 극단적인 스릴광의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기 쉽다.


    그때 개인은 다른 비유와 언어가 필요하다. 사회에 통용되는 서사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려 하기에 기존의 단어들로는 역부족이다. 초기엔 모든 게 부자연스럽고 긁어 부스럼 같다. 자신도 써 본 적 없는 단어들로 설명하려 하니, 횡설수설하고 몇 마디 만에 앞에 앉은 사람의 관심이 식는 것이 느껴진다. 누구에게도 전달될 리 없는 신호를 되풀이해서 보내는 것 같다. 우주를 영원히 떠도는 보이저 호의 골든 레코드처럼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외계인과의 조우를 기다리는 듯한 외로움과 소외감. 우린 이런 비웃음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제 팔자 스스로 꼰다고 돈 못 버는 배우를 하겠다니 멍청하죠." 진정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도 자조적으로 자신의 삶을 희화화하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아마도, 여태 많은 곤란함과 마주했고 먼저 백기를 드는 것이 편하다는 결론 내린 것이리라.


    그러나, 내밀한 충동을 따라가는 것은 기죽을 일이 아니다. 굳은 심지로 사회의 신화와 개인의 서사가 충돌하는 지점을 돌파하지 않으면 동료도, 가족도, 사회적 시선도 설득해내지 못한다. 타협의 여지없는 단절은 그대로 죽음을 의미한다. 그들도 실은 멋진 서사로 기존의 신화를 부숴주는 개인을 기대하고 있다. 새로운 이야기에 공감하고 지지하며 자신도 자신다워지고 싶어 한다. 늘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기 위해 적합한 단어들을 찾으며 세계의 끝을 항해해야 한다. 언젠가의 다다름을 기대하며.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정신적인 개척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떤 단어들은 개인적 상징에 머물고, 이런 단어들은 공감되고 울림을 전할 수 있구나 깨달아가며 서사의 방향타를 잡아야 한다. 소통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할 때 우리의 세계는 현실로 넘어오고, 확장되며, 유지된다.


    기억과 메타포를 씨실과 날실로 삼아 자신의 서사를 직조해가야 한다. 이 과정으로 우리의 충동은 이해 가능하고 소통할 수 있는 비전으로 탈바꿈한다. 자기 서사로의 여정은 홀로 완수할 수 있는 모험이 아니다. 이야기에서 화자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청자다. 화자는 청자와 환경이 기대하는 만큼만 말할 수 있다. 관용적인 태도로 삶에 대한 에너지를 주고받는 공동체에서, 각자가 그리는 미래는 구술로 가까워진다.


    살바도르 클럽은 어디에서나 시작할 수 있다. Don’t look back in anger의 가사처럼 침대에서부터 시작하는 혁명이다. 혁명은 선언문을 작성할 때, 집회를 열 때, 전복의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상황을 기술하는 순간 혁명은 시작된다. 이후에 해야 할 것은 불이 꺼지지 않게 신선한 단어와 은유를 부어주는 것이다. 아마 처음 만든 이야기는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인고의 노력을 통해 벼려진 이야기가 청중과 공명을 일으킬 때 혁명은 멋지게 성공하리라. 


    마셜 맥루한의 말처럼 미디어는 메시지다.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나눌지가 우리가 나누는 서사를, 그리고 곧 우리를 결정한다. 좋은 매체들을 버리고 무에서 시작하라는 것이 아니다. SNS를 활용하든, 오프라인 소식통을 쓰든 어떤 식이든 좋다. 스스로가 세상의 구원자란 마음가짐으로 모여서 하는 소통은 전과 다를 것이다. 늘 차용하는 진부한 자기소개는 버려라. 늘어놓는 스펙들과 해석 없는 날 것의 회고에선 무엇도 전해지지 않는다.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라. 안 쓰던 소품을 사용하고, 시간 순서를 비틀어보기도 하고, 상상치 못했던 비유로 전하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분투할 때 세계는 부서지고 재탄생한다.


    여태 겪었던 실패의 순간이 떠오르는가. 공감되지 못한 채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멋쩍었던, 혹은 감정적으로 격해져, 답답한 마음에 그대로 뛰쳐나왔던 기억들. 그러나 오늘 어쩐지 기분이 좋고, 자신의 영글지 못한 단어들을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다시 한번 반역을 꿈꾸는 것은 어떨까. 반역의 대가는 우습다. 약간의 멋쩍음과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것의 상실. 어디선가, 당신의 서툰 표현 속에서 번뜩임을 느끼고 공명하는 공모자가 나타나리라. 그때를 위해 몇 번이라도 다시! Chiusa una porta si apre un portone. 하나의 문을 닫으면 새로운 문이 열린다는 이탈리아 속담이다. 편한 언어를 버리고 자신의 언어를 건네기 시작할 때, 익숙한 공간은 무엇이든 잉태할 수 있는 미지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환영한다.

    끝없이 구술하고, 부서지고, 다시 태어나는 세상에.

    어느 곳에서나, 살바도르!


오아시스의 노엘은 어린 시절 허구한 날 아버지께 맞았음에도 아침이 되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곡 Live Forever을 추천한다.
우린 에곤 실레의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을 애용한다. 모인 곳이 어디든 그 그림을 달면, 살바도르 클럽의 아지트가 된다.


- 이 구성대로 진행하면 얼추 반은 성공한 거다. 10분 스피치가 핵심이니 그 외는 입맛에 맞게 수정해도 좋다.

- 현실의 최전선에 발을 붙이고 있는 환상적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예술과 기술을 사랑하자.

- 멋진 그룹을 꾸리는 데에 성공했다면 한 번쯤 초대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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