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임용 교직원 소개
나의 차례가 되었다. 넓은 강당의 하단 층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부총장의 사회 아래 자신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는 시간이 이었다. 모두 이번 가을부터 시작하는 새 학년에 새로 임용된 교수진과 교직원들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중이었다.
내 차례가 오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소개하는 것을 보며, 한 가지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자신의 소개 뒤에 꼭 현 거주지역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것이었다. 왜 굳이 자신의 현 거주지역 얘기하나. 마치 우리나라로 치면, 자기소개 뒤에 나는 강남구 대치동에 살아요. 나는 현재 영등포구 신림동에 살아요 등등. 사실 서울이라면 엄청나게 큰 도시라 이런 것이 이상하지 않을 수 있으나, 이곳 학교가 위치한 인구 십오만의 한국으로 치면 시골 중소 도시에서 구체적 지명을 얘기한다는 것은, 서울로 치면 나는 무슨 구 무슨 동 무슨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적나라하게 얘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이렇게 자기소개 끝에 꼭 자신의 현재 사는 곳을 굳이 얘기하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내 차례가 바로 오기 전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자기 현재 살고 있는 곳을 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곳 현지에서 채용된 사람들이란 것을. 타 주에서 온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기가 현재 어디에 살고 있는지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강당 위 층에 제가 머무는 사물실이 있습니다. 많이 놀러 와 주세요". 나는 나의 현 거주지 대신에 나의 교수연구실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몇몇 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왜 이곳 현지 사람들이 자신의 사는 곳을 강조하는지 알게 되었다.
다른 일화지만, 몇 학기를 끝낸 후 학교 근처로 숙소를 옮기며 자취를 하게 되었다. 캠퍼스에서 불과 자동차로 5분 거리에 떨어진 주택가의 콘도를 빌려 젊은 룸메이트 커플과 살게 되었다.
어느 2월 초에 강한 겨울 눈폭풍이 미국 동남부를 강타하여, 온 지역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였다. 관공서와 회사 모두 하루 또는 이틀씩 문을 닫았으며, 특히 학교들은 며칠간 휴교하며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었다. 남부라 항상 찌는듯한 더위만 있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봄과 가을이 있고 살를 에는듯한 추위는 없지만 쌀쌀한 기온의 겨울도 몇 달간 지속된다. 그러다가 일 년에 한 번 정도 11월에서 다음 해 2월 사이에 북미 위쪽에서부터 Winter Blizard라 불리는 겨울 폭풍이 미 전역을 북서쪽에서 남동쪽을 거쳐 지나간다. 심한 경우 폭설이 내리고 얼음 비가 내리며 차와 집들이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 덮이고 만다.
이때가 그런 때였다.
학교는 휴교했지만, 매일 가까운 탓에 조심스레 운전대를 몰려 사무실에 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도 학교 사무실로 출근을 하려는데, 오랜만에 옆집 아주머니가 밖에 나와 계셨다. 만나면 항상 친절하게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분이 손에 조그마한 깃발 하나를 들고 있다가 내 차 바로 조금 앞 쪽 눈이 덮인 잔디밭에 꽂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이것을 넘어와서는 안 돼요...".
미소를 띠며 친절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일전에 조금 앞쪽으로 차를 주차시켰던 것이 생각났다.
어느 날 같은 한인교회에 출석 중이었던 인턴과정을 밟고 있는 젊은 의사 지망생과 대화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다른 주에 있다가 이곳 의대에서 전문의 자격을 따기 위해 공부하러 온 이였다. 그는 성적도 우수하였고 성실했지만, 학교 생활에 어려움이 있음을 호소했다. 그의 얘기는 이곳 의대 교수진과 진료과장들이 모두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고, 그의 자녀들도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며 여기 의대에 자신들 밑에서 수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같은 의대생이지만 동료 의료인들이지만 그들 사이에 끼여 들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곳 학교에서 나는 나의 직분과 위치에 대해 차별을 받았다고 느끼지는 못 했다. 세상이라면 그럴 수 있겠으나, 기독교 학교인 탓에 특성상 평등과 친절함은 모두에게 배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위의 자기소개의 예처럼, 그리고 옆집 아주머니와 한인의사 지망생의 얘기처럼, 이곳에서는 "나의 영역", 소위 자신의 경계선 (Boundary)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너는 괜찮은 존재고 우리도 너에게 차별은 가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영역이 있으니 거기까지 들어 올려하지 마'.
그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그러한 그들의 의식에는 역사적, 지역적, 사회문화적 배경들이 터를 깔고 마침내 무의식 중에서 발현되고 있는 것뿐이라고.
그날 아침에도 향긋한 커피 향 속에 옆 집 아주머니 친절한 미소와 인사를 받으며 학교로 출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