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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Apr 15. 2021

킹메이커의 시초를 재조명하다

역사가 버린 2인자: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한때 킹메이커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2015년에 방영한 <랑야방>이 대표적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정도전>, <징비록> 등 왕을 보필한 2인자들을 메인으로 삼은 드라마가 방영되었죠. <삼국지>에서는 제갈량과 순욱, <초한지>는 소하와 장량이 책,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끊임없이 회자되는데요. 아마, 혈통이나 신분에 구애치 않고 뛰어난 지략과 탁월한 안목, 노련한 정치 능력으로 왕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킹메이커'는 정확히 무슨 뜻일까요? 위키백과에 따르면, '남을 왕위에 올릴 만큼 혁혁한 공을 세운 실력자'를 의미합니다. 우리말로 순화하면 '국왕 제조기'이고요(제조기라고 하니 왠지 기계 같네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남을 왕위에 올린 사람'을 가리킬 때 왜 '킹메이커'라는 영어를 쓰는 걸까요? 바로, 킹메이커의 시초가 영국인이기 때문이지요. '킹메이커'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사람은 장미전쟁 때 판도를 좌지우지한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입니다. 헨리 6세를 폐위하고 에드워드 4세를 왕위에 올린 인물이지요.




외국인이라서 그럴까요? 유명한 킹메이커하면 한 두 명 정도 말할 수 있는데, 정작 킹메이커의 시초는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그런데 정작 영국에서도 워릭 백작을 자세히 기술한 사료가 부족한 상황이에요. 워릭 백작(이하 워릭)의 행적을 조사할 때 리튼 경의 최후의 제후들,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같은 소설을 언급하는 상황이지요. 화가가 정식으로 그린 초상화도 없어요. 루스 롤에 나오는 삽화를 통해 큰 키와 넓적한 팔다리를 지닌 사람이라고 추측할 뿐이죠. 오늘날 대중매체에서도 그를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장미전쟁을 모티브로 삼은 <왕좌의 게임>, <화이트퀸> 등에서도 워릭은 조연일 뿐이지요. 다행히 2019년에 출간된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라는 책을 통해 워릭의 활약상을 자세히 알 수 있었어요(다만, 장미 전쟁을 비롯한 시대상을 파악하는 데는 다른 자료들도 참고했어요). 그럼 워릭이 어떤 시대 속에서 어떤 활약을 펼친 인물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루스 롤』에 그려진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삽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에드워드 3세의 죽음과 리처드 2세의 폐위가 불러온 왕위 쟁탈전

워릭이 활약했던 시기는 잉글랜드에서 랭커스터가와 요크가와 치고받고 싸웠던 시기, 즉 장미전쟁 때였죠. 두 가문이 왜 싸웠는지 알아보기 위해 에드워드 3세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백년전쟁을 일으킨 호전적인 인물이었어요. 그러나 말년에 정부에게 빠져 정사를 소홀히 했고,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정권을 맡겼지요. 그러나 전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흑태자는 쇠약해져서 이른 나이에 사망했고 에드워드 3세도 사망하면서, 10살짜리 손자가 리처드 2세로 즉위했어요. 워낙 어렸기 때문에 숙부 곤트의 존이 섭정하고 있었는데요. 당시 영국은 혼돈의 카오스였습니다. 흑사병이 휩쓸고 간 이후 사람들이 많이 죽어서 노동력이 부족해졌어요. 임금이 치솟았고 인권 의식이 향상되었죠. 그런데 과도한 인두세를 부과해서 먹고살기 힘든 백성들을 더 힘들게 했어요.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많이 발생했는데 리처드 2세는 폭압적으로 대처했지요.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어요. 더구나 성년이 된 후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니, 귀족들도 등을 돌렸죠. 결국 리처드 2세는 곤트의 존 아들 헨리 볼링브로크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사망합니다. 헨리 볼링브로크는 헨리 4세로 즉위했지요. 그런데 왕이 죽은 것도 아니고 멀쩡히 살아있는데 왕위를 빼앗는다? 한 번 이렇게 하면 누가 또 안 그럴까요? 혈통과 능력만 갖추면 왕위를 빼앗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죠. 더구나 귀족들 중 가장 세력이 큰 랭커스터가와 요크가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니 '나도 왕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지요. 리처드 2세의 폐위가 장미전쟁의 초석을 다진 셈입니다.

 


광기에 시달린 비운의 왕 헨리 6세

이렇게 잉글랜드 왕위는 랭커스터 가문에게 넘어갔어요. 그러나 헨리 4세는 평생 왕위 찬탈자라는 오명으로 살아야 했죠. 헨리 4세 사후 헨리 5세는 힘 있는 왕권을 자랑하면서 무너져가던 잉글랜드 왕실을 다시 살렸어요. 백년전쟁을 재개하고 프랑스 공주와 결혼하면서 프랑스 왕위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죠. 그러나 무리한 전투로 인해 3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맙니다. 아들 헨리 6세는 갓난아기였고,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오를레앙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샤를 7세가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헨리 6세는 프랑스 왕위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외조부 샤를 6세의 정신질환만 물려받았죠. 어리고 병약한 헨리 6세는 성년이 되어서도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 습관 때문에 자문관, 삼촌들, 왕비에게 휘둘리며 살았죠. 결국 잉글랜드는 파탄의 지경이 되어버립니다. 영주들은 프랑스 내에 있던 영지를 잃어버렸고,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주들의 수족이나 사병으로 전락했죠. 마침 흑사병이 휩쓸었을 때라 교회의 영적인 힘도 먹혀들지 않았어요. 결국 귀족들의 권한 강화되었고, 왕관은 혈통과 능력만 충족하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렸죠.


헨리 6세의 초상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황금 수저를 물고 자라난 리처드 네빌

이렇게 잉글랜드가 혼란스러웠던 1428년,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태어납니다. 워릭은 금 중의 금, 황금 수저를 물고 태어났죠. 할아버지 웨스트모어랜드의 랄프는 추밀원의 일원이자 남부에 70여 곳 이상의 영지를 소유한 대지주였고, 아버지 솔즈베리 명예 백작 리처드 네빌은 섭정위원회의 일원이자 스코틀랜드 국경 관리자이면서 북부의 땅까지 물려받은 사람이었죠. 워릭은 잉글랜드 전역 영지를 방문하면서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아버지가 섭정위원회의 일원이 되자 런던에서 아버지가 정치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죠. 앤 보샴프와의 결혼으로 보샴프 땅을 받고, 어린 리처드는 '워릭, 뉴버그, 오마를 백작, 잉글랜드 최고 백작, 엘름리와 헨슬레이프의 제후, 글러모건과 모건녹의 영주'가 되었죠(아버지보다 작위가 더 많아요)!



장미전쟁의 시작

워릭 백작이 아내에게서 유산을 물려받을 무렵,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6세의 치세를 위협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노르망디 요새를 상실한 후 대중의 분노가 터졌고, 국정의 수반이었던 몰레인스 주교, 서퍽이 살해당했죠. 이 사건에 힘입어 잭 케이드 반란 같이 잉글랜드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발생했어요. 1450년대, 요크의 리처드는 그의 친족인 네빌(워릭 백작 집안. 요크의 리처드는 솔즈베리의 동생이에요), 모브레이즈, 부르치아를 주축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왕실에 대항할 준비를 했죠. 혈통으로 봐도 헨리 6세보다 왕위 계승 서열에서 앞섰는데요(사실 헨리 6세는 왕위 찬탈자라고 조롱당하던 헨리 4세의 후손이었죠). 어머니 쪽으로는 에드워드 3세의 차남인 클래런스 공 라이어널의 후손이었으며, 그의 아버지인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는 에드워드의 4남인 요크 공 에드먼드 랭리의 아들이었고, 헨리 6세는 리처드 2세 숙부의 증손자였죠. 요크공도 이 사실을 알았는지 국왕 자문회의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가, 헨리 6세의 아들 에드워드가 태어나면서 잠시 물러납니다.



세력의 부침 속에서 명성을 쌓는 워릭 부자

이처럼 요크와 왕당파의 내분이 시작될 때, 워릭과 그의 아버지 솔즈베리는 대놓고 파벌에 끼지 않고 요크공에게 왕과 협상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1454년 1월 의회에서 요크파와 친분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리고 워릭은 추밀원 위원으로, 아버지는 대법관으로 임명되죠. 그들은 헨리의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인정했지만 왕당파는 그들을 배제하고 웨스트민스터에 모여서 무언가 이야기했고, 요크공과 워릭, 솔즈베리는 봉신들을 모아 세인트 올번스에서 내란을 일으킵니다. 요크군이 밀리던 중 워릭은 왕당파 군대(랭커스터군)가 바리케이드 방어에 집중하느라 남부에 집이 깔린 부분의 방어에 소홀한 것을 확인했죠. 퇴각한 군인들을 모아 집들 뒤의 정원을 침공한 뒤 중심부로 향했고, 랭커스터군은 요크군의 공격을 받고 무너집니다. 요크파는 핵심 요직을 차지하면서 기세 등등해지고, 워릭은 전쟁에 대한 공으로 칼레의 제독이 됩니다. 워릭은 황폐해진 칼레를 복구하고 에스파냐 함대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서 명성을 쌓았지만, 워릭과 솔즈베리, 요크공은 러드포트에서 참패하면서 망명하게 됩니다.



킹메이커가 되어야 했던 워릭

우여곡절 끝에 칼레로 돌아간 워릭은 재기를 꾀합니다. 샌드위치에서 침략군들을 포획한 것을 계기로 요크공, 솔즈베리 등과 함께 런던을 점령했고 노스햄튼으로 진군해 승리를 거두었지요. 헨리 왕을 살려두는 대신, 요크파는 다시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워릭은 칼레의 제독이 됩니다. 이들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요크공이 왕실 저택을 점거하면서 내가 왕이라고 대놓고 선보일 정도였어요. 워릭은 당연히 앞장서서 말리죠. 요크파는 왕당파와 협상을 주도해 헨리가 평생 왕이어야 하고 요크는 보호자로서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합의를 봅니다. 그러나 합의 밑에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어요. 헨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병을 앓았으니, 조만간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 합법적으로 요크공이 왕위를 이어받도록 하겠다.라는 식이었죠. 그러나 중북부에 있던 마거릿 왕비가 아들의 왕위 계승을 위해 귀족들을 규합해서 런던으로 진군했고, 두 가문은 다시 웨이크필드에서 전쟁을 치릅니다. 워릭의 전략이 먹히지 않았던 걸까요? 요크군이 대패하고 요크공과 솔즈베리가 전사합니다. 이제 워릭이 요크파와 왕실의 안정을 책임져야 했죠. 아버지와 삼촌의 죽음을 보고도 울 수 없었어요. 워릭은 세인트 올번스에서 전투를 재개하지만 패배하고 퇴각합니다.  


헨리 6세의 왕비 앙주의 마거릿(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에드워드 4세의 승리

워릭은 치팅 노튼에서 요크공의 아들 마치 백작을 만나 랭커스터군을 물리치며 런던으로 진격했습니다. 런던 사람들을 포섭한 후 에드워드는 자신이 왕이라고 선언하고 대관식을 치르는데... 너무 급하게 치르느라 네빌 집안과 노퍽 집안 정도만 대관식에 참석했죠. 그마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북쪽으로 행군했고요. 하지만 대관식을 계기로 승리의 여신은 요크파의 손을 들어줍니다. 요크파는 페리브릿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랭커스터파와 타우튼 언덕에서 격돌합니다. 워릭은 전략을 세웁니다. 먼저 3부대로 나누어 중앙에서 측면 공격을 유도하고, 강풍, 폭설 때문에 서로가 보이지 않는 상황을 이용해 먼저 화살로 적군을 괴롭힙니다. 화살을 맞은 랭커스터파가 화살을 계속 쏟아붓자, 요크파는 적을 중앙으로 유도하고 치명적인 사격을 가합니다. 이때 측면 공격도 이루어지죠. 요크파는 대승을 거둡니다. 전장은 랭커스터 병사들의 시체로 가득했지요. 헨리 6세는 포로로 잡히고 마거릿과 랭커스터파 귀족들은 스코틀랜드 국경 근처로 도피합니다. 마치 백작은 마침내 에드워드 4세로 즉위합니다. 워릭은 스코틀랜드와 협상 진행을 진행해서 스코틀랜드가 랭커스터파를 지원하지 못하게 하려 했죠. 마거릿의 항전이 계속되자 워릭은 스코틀랜드로 진군해 랭커스터파 잔당을 소탕했고 스코틀랜드와 평화 협정을 맺습니다. 그리고 마거릿 왕비 일당을 스코틀랜드에서 내보내고 헨리는 런던탑에 투옥되죠.


훗날 에드워드 4세가 되는 마치 백작(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에드워드와 워릭의 대립

오랜 전쟁을 끝내고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워릭은 에드워드 4세에게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처제와 혼인을 권합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이미 랭커스터파였던 리버스 경의 딸 엘리자베스와 몰래 혼인한 상태였어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에드워드에게 화가 났지만, 일단은 축하해주는 워릭. 에드워드는 워릭의 심경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에드워드의 주도로 리버스가 일원들의 혼인이 줄줄이 이어지죠. 아마, 외척의 힘을 이용해 네빌 가문을 견제하려는 의도였을 것 같아요. 마침, 워릭이 에드워드의 동생 클라렌스와 가까이 지내자, 에드워드는 이 모습을 불편해하거든요. 에드워드 입장에서 클라렌스는 자신의 후계자이고 워릭은 왕 다음으로 강한 권신이었을 테니까요. 에드워드는 워릭이 보고 싶지 않았는지 워릭을 프랑스로 보내버립니다. 동맹 조약을 구실로요. 워릭은 프랑스에 가서 동맹 조약을 맺고 돌아왔는데 그 사이에 에드워드가 몰래 부르고뉴와 동맹을 맺어버렸어요. 프랑스와 부르고뉴는 앙숙 관계였는데 말이죠. 여기까지는 버틸만했는데 에드워드가 프랑스 대사들에게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나팔이나 주머니 같은 것만 보내주니 워릭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납니다. 결국 워릭은 에드워드를 배반하게 됩니다.



주군을 버린 킹메이커

각지의 반란을 조장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클라렌스와 자신의 딸 이사벨과 결혼시켰어요. 클라렌스에게는 에드워드가 권한 여인이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이 결혼식은 왕에 대한 반역을 뜻했지요. 결국 에지코트에서 반역을 일으킨 워릭과 클라렌스. 에드워드 4세는 패배하고 포로가 됩니다. 워릭은 에드워드를 석방했으나 로버트 웰스 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에드워드는 워릭과 클라렌스가 반란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했어요. 두 사람은 헨리 6세를 왕으로 옹립하였어요. 마거릿과는 어쩔 수 없이 화해하고요. 에드워드는 다시 도주하고, 헨리 6세는 이미 쇠할 만큼 쇠한 상태라 사실상 워릭이 정국을 좌지우지했어요. 자신이 왕위를 잇지 못해 불만이 생긴 클라렌스를 인식하지 못한 채로요. 워릭의 집권기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에드워드가 세력을 회복해 남하하는데, 귀족들은 헨리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드워드를 제대로 제압하지 않았어요. 설상가상으로 클라렌스가 워릭을 배신하고 에드워드가 런던을 점령하자, 워릭은 바넷에서 맞닥뜨린 에드워드와 최후의 전투를 치릅니다. 안갯속에서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 같은 편끼리 공격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결국 랭커스터파 내에서 내분이 생깁니다. 랭커스터파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워릭은 4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사실 워릭이 바넷에서 죽은 건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잘된 일일 수도 있어요. 안 그러면 전쟁을 계속 질질 끌었거나, 랭커스터파와 워릭의 대립이 다시 이어졌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간 워릭이 안타까워요. 워릭이 에드워드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헨리 6세는 이미 오랜 실정으로 평판이 좋지 못했고, 귀족들도 헨리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진 않았을 텐데요. 워릭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 같아요.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차라리 한번 재기한 뒤에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면 에드워드는 왜 워릭을 견제했을까요? 워릭과 에드워드는 사촌이지만 13살 차이로, 워릭은 요크공이 죽은 뒤 실의에 빠진 에드워드의 교육과 무예 연마를 도맡았죠. 전략을 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기도 했고요. 워릭 입장에서는 에드워드가 13살 많은 사촌 형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기를 바랐겠지만, 이들은 사촌이기 전에 주군과 가신 관계였죠. 에드워드 입장에서는 왕권을 공고히 하려면 자신이 이끄는 세력을 형성해야 했고, 이를 위해 워릭을 견제하고 우드빌 집안을 키워주고 부르고뉴와 협상했던 게 아닐까요? 워릭은 이런 행동에 서운함과 분노를 느꼈을 테고... 열세 살 어린 사촌을 왕으로 만든 킹메이커가 그 왕에게서 견제받는 것을 견딜 수 있을지... 서로가 명분이 있으니 누가 선이고 악이다 구분하기 힘들어요. 그런데 두 사람의 행보가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나요? '장미 전쟁'이라는 말에서 눈치채신 분들도 계실 텐데요. 장미전쟁은 2019년에 종영한 유명 미드 <왕좌의 게임>의 모티브가 되었지요.


왕좌의 게임 롭 스타크의 모티브는 에드워드 4세인데, 워릭의 강직한 성품도 조금 가져온 듯... 롭의 결말을 생각하면 작가가 에드워드를 싫어했던 것 같다(출처: 나무위키)


드라마상에서 롭 스타크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지요. 그러면 롭 스타크의 모티브였던 에드워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장미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앤 네빌' 편에서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및 자료>

찰스 오만,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필요한책, 2018.

위키백과-킹메이커

https://ko.m.wikipedia.org/wiki/%ED%82%B9%EB%A9%94%EC%9D%B4%EC%BB%A4

위키백과-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16%EB%8C%80_%EC%9B%8C%EB%A6%AD_%EB%B0%B1%EC%9E%91_%EB%A6%AC%EC%B2%98%EB%93%9C_%EB%84%A4%EB%B9%8C

영국 왕가-헨리 6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26609&cid=56790&categoryId=58124#TABLE_OF_CONTENT3

영국 왕가-리처드 2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26605&cid=56790&categoryId=58124

Britannica-Wars of the Roses

https://www.britannica.com/event/Wars-of-the-Roses

영국사-장미 전쟁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03719&cid=62113&categoryId=62113

런던 이야기 30편: 앙숙집안 사이의 장미전쟁 (War of the Roses) I

https://m.blog.naver.com/michellelive/70177904953



<역사가 버린 2인자>의 첫번째 글입니다. 앞으로 수요일 저녁-목요일 아침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이버 블로그에도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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