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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May 06. 2021

용이 되려 했으나 용을 넘지 못하고

역사가 버린 2인자: 제갈각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정확한 말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한자사전에 따르면 이 세상에 나보다 존귀한 사람은 없다는 말 또는, 자기만 잘 났다고 자부하는 독선적인 태도를 비유할 때 쓰입니다. 한마디로 별 것도 아니면서 잘난 척하는 사람을 비꼴 때 쓰이죠. 하지만 실제로는 석가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외친 말이라고 하죠. 오직 유(唯), 나 아(我), 홀로 독(獨), 높은 존(尊)이니, '나만 존귀하다'라고 해석되는데요. 그런데 '유아독존'의 '나'는 석가 개인이 아니라 '천상천하', 즉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가리킵니다. 즉, 모든 생명이 존귀하니 이들을 구원하는 게 내가 할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 잘난척하려고 쓴 말이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요즘에는 의미가 변질되어 다른 뜻으로 쓰입니다. 왜 변질되었을까요? 삼국지 2세대 인물의 대표 주자, 제갈각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제갈자유에 지려를 붙이다

제갈각은 203년 제갈근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남전생옥이라는 사자성어를 탄생시킨 장본인이죠. 중국 섬서 남전현은 질 좋은 옥을 생산하기로 유명한데, 남전에서 옥을 산출하듯 훌륭한 아비 밑에서 훌륭한 자식이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사자성어가 나왔을까요? 오나라 황제 손권은 얼굴이 긴 제갈근을 놀리려고 신하들 앞에서 당나귀를 끌고 와 '제갈자유(諸葛子瑜-제갈근의 자)'라고 쓰게 하였습니다. 그때 어린 각은 손권의 허락을 받고 '지려(之驢)'를 더 써서 '제갈자유지려(諸葛子瑜之驢)', 즉 '제갈근의 당나귀'로 고쳤죠. 손권은 각의 기지를 보고 감명받아 각에게 당나귀를 하사하며 "남전에서 옥이 난다고 하더니, 정말 헛된 말이 아니구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남전생옥'이라는 사자성어가 탄생하죠. 또한 손권은 각에게 네 아비와 숙부 중에서 누가 더 현명한지 물은 적이 있습니다. 각은 부친이 섬길 곳을 알기 때문에 더 현명하다고 답합니다. 손권 앞이니 당연히 손권을 섬기는 제갈근이라고 답해야 했는데, 각은 임금 앞에서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죠. 이처럼 제갈각은 뛰어난 기지와 식견을 갖춘 신동으로 유명했습니다.


제갈자유지려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출처: 바이두)


성년이 된 제갈각

제갈각은 성년이 된 후 기도위가 됩니다. 기도위는 광록훈에 속하는 직책이었는데, 쉽게 말하면 황제를 호위하는 기병이죠. 손권은 제갈각에게 자신의 신변을 맡긴 것입니다. 그만큼 손권의 신임이 두터웠던 거죠. 태자 손등하고도 친했는데, 오서 <손등전>에 따르면 한 침구에서 잘 정도였습니다. 능력도 좋고 황실의 총애도 받으니 제갈각은 점점 오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갈각은 원래 절도(節度)라는 직책에 있었어요. 군대의 식량을 관리하는 자리였고 전장에서 식량 공급은 필수였으니 꽤 중요한 직책이었죠. 그러나 제갈각은 이 직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하루 종일 문서만 보니 따분하고 지루했죠. 전장에서 직접 군사를 지휘하고 싶어 했어요. 그래야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잖아요.



단양에서 능력을 뽐내다

234년 8월, 32살 때 제갈각은 단양 평정을 주장합니다. 3년만 주면 4만 명의 병사를 모으겠다고 하면서요. 단양은 지형도 험하고 산월족들의 저항이 심한 곳이라 조정 대신들은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 제갈근도요. 제갈근은 제갈각이 우리 집안을 망치겠다고 예언했는데... 제갈각의 결말을 생각하면 이 예언은 적중했죠. 그러나 제갈각은 끝까지 이길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손권은 제갈각을 무월장군, 단양태수로 삼아서 제갈각이 원하는 대로 해주죠. 결말부터 말하면, 성공이었습니다. 제갈각은 산월족의 항복을 유도하려고 수비에 집중하면서 산월족이 귀순하면 모두 받아들이라고 교지를 내립니다. 대신, 수확할 시기가 되면 곡식을 모두 털어가니 산월족은 굶주리기 시작했죠. 제갈각에게 항복할지 말지 망설이던 때 산월족 우두머리 중 하나가 관리에게 투항합니다. 관리는 그 자가 반란을 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결박하고 관부에 이송했습니다. 하지만 제갈각은 관리의 목을 벱니다. 교지를 어겼다는 이유로요. 제갈각의 대처를 보자 산월족은 제갈각에게 투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제갈각을 위무장군에 임명하고 도향후에 책봉했습니다. 이때부터 제갈각은 여강에 주둔하며 전장에서 지휘하는 몸이 됩니다.


청나라 시대에 제갈각을 묘사한 삽화(출처: 나무위키)


이궁의 변에서도 살아남게 한 처세술

여강에 주둔한 제갈각은 위나라에 지속적으로 도발하면서 깔작댑니다. 화가 난 사마의가 직접 출정하고자 했으나 손권은 대규모 교전을 피하고자 제갈각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버리죠. 이렇게 잠시 위기를 모면하는 듯했으나, 태자 손등이 죽으면서 오나라는 혼란에 빠집니다. 삼남 손화를 태자로 임명했으나 손권이 사남 손패(차남은 예전에 죽었어요)도 같은 궁에 살게 하면서 똑같이 대우하죠. 같은 형제끼리 같이 사는 게 뭐가 문제냐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들이 태자와 군왕이라는 거죠. 군신관계인데, 이들이 똑같은 대우를 받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태자가 두 명이 되는 겁니다. 오나라 조정은 갈팡질팡하다가 손화파와 손패파로 나뉘어 싸우게 됩니다. 제갈각은 손화의 외삼촌이니 손화파가 되지만, 아들은 손패파에 가담합니다. 손권은 아들을 잘 교육시키라고 귀띔하죠. 그러자 제갈각은 아들을 독살해서 위기를 넘깁니다. 그리고 육손의 뒤를 이어 대장군, 형주자사에 봉해지죠. 그나저나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손화, 손패 둘 다 패배합니다. 손화는 유배당하고 손패는 주살당하거든요. 손권도 죽자 막내아들 손량이 황제가 되고 제갈각은 태부에 임명됩니다. 손화파, 손패파 대신들이 모두 죽은 상황이라 제갈각은 홀로 승승가도를 달립니다.



동흥에서 맛본 쾌감

252년, 손량은 9살 황제로 즉위 제갈각 섭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는 관리와 백성의 감시를 풀어주고 부세를 줄여주고 관세를 없애는 등 선정을 펼쳐 백성들의 지지를 받습니다. 민심도 얻었겠다, 대장군이 된 제갈각은 다시 위나라에게 도발합니다. 동흥에 큰 제방을 만들고 주위에 성을 쌓죠. 물을 범람시켜 수군의 활동 범위를 넓히려는 계책이었죠. 그다음 성에 1천 명의 병력을 남기고 위나라를 침공합니다. 마침 위나라에서는 사마의가 죽고 사마사가 대권을 물려받았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터라 입지가 불았던 사마사는 전공을 과시하기 위해 252년 11월, 왕창, 관구검, 호준, 제갈탄에게 세 길로 나누어 동흥을 공격하도록 명합니다. 제갈각은 유찬, 정봉, 여거, 당자더러 공격하게 합니다. 이때 정봉이라는 장군이 어마무시한 활약을 하는데요. 정봉은 추운 겨울에도 옷을 벗고 위나라 군영으로 쳐들어 갑니다. 위군은 오군이 소수라는 이유로 방심한 채 술을 먹고 놀고 있었죠. 정봉의 습격에 우왕좌왕할 무렵, 제갈각이 제방을 터뜨려 위나라 진영을 물바다로 만듭니다. 수만 명의 위군이 죽고 오군은 수많은 전리품, 물자, 병기를 노획합니다. 손량은 제갈각의 공적을 인정해 그를 양도후에 임명하고 형주·양주목에 봉합니다. 제갈각의 콧대는 하늘을 찔렀죠.


코에이 삼국지 12, 13에 나온 제갈각. 제갈각의 오만한 성품이 잘 드러난다(출처: 나무위키)


제갈량을 능가할 수 있었으나

동흥에서의 승리감에 취한 제갈각은 몇 달 후, 합비 공략을 추진합니다. 사마사에겐 기반이 부족하고 적의 힘도 약해졌으니 기회는 지금 뿐이라고 하면서요. 그런데 나이 먹기 전에 대업, 즉 천하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대목이 있는 걸 보면 스스로 과시하려는 의도가 큰 것 같아요. 그러나 잇단 전쟁에 피로해진 대신들은 제갈각의 주장에 반대합니다. 손량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콧대 높은 제갈각이 여기서 포기할 리가 있나요? 제갈각은 저들을 무시하고 촉나라 강유와 동맹을 맺은 뒤 20만 대군으로 위나라로 쳐들어갑니다. 오나라에서 20만 명이나 징발하느라 백성들의 원성을 삽니다. 민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죠. 위군은 합비신성의 수비에 주력해 오군이 스스로 지치게 만듭니다. 여름이 되면서, 상황은 위군의 작전대로 흘러갑니다. 오군은 전염병, 설사, 피부병 등으로 고통을 받았고, 장군들이 전략을 수정하라고 간언했으나 제갈각은 이들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꾸짖기만 했죠. 이 틈을 타 위나라의 지원병이 도착하고 오군은 대패합니다. 현장에는 시체가 즐비하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병에 시달렸죠.



용이 되지 못한 자의 최후

제갈각은 오나라로 돌아옵니다. 자기 잘못을 받아들였을까요? 그럴 리가요. 대신들 탓만 합니다. 후퇴조서가 늦게 도착해 후퇴가 늦어졌다는 이유로요(빨리 후퇴하라고 했어야지). 선조(오나라에서 관원을 선발하는 부서)에 죽치고 앉아 저들이 잘못한 게 있나 없나 매일 주시하면서, 관원들의 약점을 트집 잡고 꾸짖고 파면시키고 자기와 친한 자를 등용했죠. 대신들의 분노는 끓어오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제갈각은 옛날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다시 전쟁을 준비하려 했죠. 제갈각의 폭주를 보다 못한 손준과 등윤이 제갈각을 주살합니다. 여기서 『오서』 「제갈각전」(정사 삼국지)와 『오력』 의 내용이 다른데요. 「제갈각전」에서는 등윤이 손준의 계책을 모른 채, 제갈각을 연회 자리로 데려갔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오력』에 따르면, 등윤이 손준의 계책을 알려주면서 제갈각더러 돌아가자고 하니 제갈각이 "손준 같은 어린놈이 뭘 하겠냐"며 비웃고 연회 자리를 갔다고 합니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요? 후자가 진실이라면, 제갈각은 본인의 콧대 때문에 죽음의 길로 간 셈이죠. 아무튼 연회 자리로 간 제갈각은 술이 오를 무렵, 손준의 칼에 찔려 죽고 맙니다. 이후 제갈 씨 일족은 몰살당하고 촉나라에서 제갈량의 양자가 된 제갈교의 후손이 제갈 씨의 계통을 이어갑니다.


코에이 14의 제갈각. 50세에 군권을 잡았는데.. 꽤 젊게 나왔다(출처: 나무위키)



제갈각의 재능과 기질, 재간과 모략은 나라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만했지만 교만하고 인색하였다. 주공(周公)이었을지라도 이룬 것이 없었을 텐데 하물며 제갈각에 있어서랴? 제갈각은 자신을 과장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능멸했으니 실패가 없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가 육손이나 동생 제갈융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술한 것을 직접 실행했다면 회한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니, 어찌 더욱이 재앙이 있었겠는가?
-『오서』 「제갈각전」 말미에 기술된 진수의 평가


제갈각이라는 이름에서 눈치채신 분들이 계실 텐데요. 제갈각은 유비의 킹메이커로 유명한 제갈량의 조카입니다. 왜 제갈량이 아니라 제갈각을 다루었냐면, 매거진의 제목이 <역사가 버린 2인자>잖아요. 위에서 2세대 인물의 대표 주자라고 적어 놨지만, 사실 제갈각의 인지도는 어정쩡해요(의도치 않게 독자분들을 속였..). 제갈량이나 주유, 육손 같은 뛰어난 정치가도 아니고 손준이나 손침 같은 간신배도 아니고, 육항 같은 마지막 충신도 아니거든요. 게다가 제갈가문하면, 대부분 제갈량을 떠올리니 상대적으로 제갈각의 업적이 가려진 게 아닐까 생각해요. 막판 실책이 너무 큰 탓에 "안하무인한 찌질이"로 인식되기도 하고요.


이제 첫 문단의 질문에 답해볼게요.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왜 변질되었을까요? 첫 문단에 따르면, 석가는 '모든 생명이 존귀하다'면서 '이들을 구원하는 게 내가 할 일'이라고 했었죠. 어쩌면 제갈각은 자신을 '오나라를 구원할 자'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당시 이궁의 변 때문에 인재란 인재는 모두 죽어버렸죠. 이릉대전에서 오나라를 구했던 육손도 대신들이 억울하게 죽는 모습을 보고 화병 나서 병사했고요. 손량이 보위에 오르자 손준이 제갈각을 밀어주었던 이유도 오나라에 남아 있던 대신 중 제갈각이 제일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말까지 있죠. 전쟁에 집착한 이유도 이궁의 변으로 분단된 조정을 한 곳으로 모으려 했던 것 같기도 해요. 오나라는 토착 호족 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위나 촉보다 황권이 약하기도 했고요. 숙부 제갈량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었던 같고요. 「제갈각전」에 '숙부가 천하를 다투는 계책에 관해 진술하는 걸 보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합비 공략을 추진할 때 나온 말이거든요. '천하를 다투는 계책'은 후출사표, 제갈량이 위나라를 토벌할 때 황제에게 올린 글인데 이걸 보고 제갈각이 천하통일을 주장한 게 아닐까 '합리적 의심'이 듭니다. 간단히 말하면, 제갈각은 오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너무 자기를 믿은 나머지 오나라 군사들을 전멸시켰고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다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죠. 숙부 제갈량의 벽을 넘을 수 있었으나 오만한 성품으로 평생 세운 업적을 말아먹었어요. 제갈각이야 말로 '유아독존'의 본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례로 볼 수 있겠네요. 석가의 '유아독존' 자세는 모든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세이지만, '유아독존'이 '자아도취'로 빠지지 않게 경계해야 합니다.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는 제갈각이 야가미 라이토로 패러디되었다(출처: 나무위키)



<참고 자료>

네이버 한자사전, "天上天下唯我獨尊", https://hanja.dict.naver.com/word?q=%E5%A4%A9%E4%B8%8A%E5%A4%A9%E4%B8%8B%E5%94%AF%E6%88%91%E7%8D%A8%E5%B0%8A

네이버 두산백과, 천상천하유아독존,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6194&cid=40942&categoryId=31543

네이버 두산백과, 남전생옥,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68320&cid=40942&categoryId=32972

삼국지 백과사전, 기도위(騎都尉), http://www.subkorea.com/xe/61837

위키백과, 이궁의 변,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6%81%EC%9D%98_%EB%B3%80

나무위키, 제갈각, https://namu.wiki/w/%EC%A0%9C%EA%B0%88%EA%B0%81

위키백과, 제갈각,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EA%B0%88%EA%B0%81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삼국시대 오나라의 교만한 천재 제갈각…오만한 천재를 이기는 것은 ‘인덕(人德)의 둔재’이다, 매일경제,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6/04/256412/(2016.04.12)

김원중(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한국경제,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2499971(2011.07.09)


<역사가 버린 2인자>의 두번째 글입니다. 매주 수요일 저녁-목요일 아침에 연재할 예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이버 블로그에도 게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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