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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Jun 23. 2021

나한테 왜 그랬어!! 왜!!

역사가 버린 2인자: 세야누스

티베리우스 이야기 계속합니다. 이번에는 티베리우스 치세기의 권신 세야누스의 시점으로 씁니다.


우리 사랑하는 사이에요. 왜 이러세요!!

엄마! 이러지 마. 제발!!


가계도 수정본. 1편과 2편에서 죽은 인물은 X 표 처리했습니다(출처: 내 손)


세야누스의 등장

세야누스는 소(小) 드루수스의 죽음 전부터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쌓고 있었습니다. 서기 14년, 티베리우스가 제위에 오를 때 근위 대장이 되었죠.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진압하면서 공을 쌓고, 22년 극장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불을 끄려고 노력하면서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얻었죠. 그래서 서기 26년,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으로 은거할 때, 세야누스에게 로마를 맡깁니다. 그렇긴 해도 행정적인 일은 티베리우스가 다 처리했다고 해요. 워낙 로마의 교통이 좋아서 티베리우스가 보고서를 보내면 최소 20일 안에는 지방 행정관들에게 도착했다고 하더라고요.



세야누스의 얼굴을 새긴 동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소(小) 드루수스 독살의 전말

잠시 시간을 서기 19년, 게르마니쿠스가 죽은 뒤로 돌려보겠습니다. 소(小)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는 친형제 이상으로 우애가 두터웠습니다. 사촌 형 게르마니쿠스가 죽었을 때 직접 추모 연설을 낭독할 정도였죠. 게르마니쿠스를 지지하던 민중들은 이제 소(小) 드루수스를 지지하기 시작합니다. 소(小)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후견인이 되었죠. 그리고 집정관을 거쳐 서기 22년, 원로원과 티베리우스의 지지를 받아 황태자로 임명됩니다. 하지만 세야누스와 소(小)드루수스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서기 20년, 세야누스가 자신의 딸을 클라우디우스의 아들(이름은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에요. 또 이름 돌려 막기 합니다)을 결혼시키려 했으나 클라우디우스의 아들이 갑자기 죽으면서 결혼 얘기는 없던 얘기가 돼버립니다. 이때부터 소(小) 드루수스가 세야누스를 경계하기 시작한 거죠. 후계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세야누스는 소(小) 드루수스를 암살할 계획을 꾸밉니다. 세야누스는 드루수스의 아내(이면서 동시에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 리빌라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합니다. 리빌라는 세야누스에게 반하고 두 사람은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리빌라는 세야누스의 말대로 남편 소(小) 드루수스에게 독을 서서히 먹이기 시작합니다. 결국 서기 23년, 소(小) 드루수스가 사망하고 병사로 위장되었죠.



사냥의 시작

티베리우스는 아끼던 조카와 아들의 죽음으로 상심에 빠집니다.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마음을 파고들며 신임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서기 25년,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리빌라와의 혼인을 주청하며 야심을 드러내죠.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아무리 슬퍼도 사리분별은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야누스의 주청을 거부했죠. 분했던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 외의 남성 황족들을 모두 죽인 뒤 자신이 후계자가 될 계획을 세웁니다. 소(小) 드루수스가 죽은 뒤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인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유력한 후계자로 떠오른 때였습니다. 이때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를 낙반 사고에서 구해내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는 서기 26년 카프리 섬에서 은거하기 시작하죠.



사냥에 성공하다

세야누스가 제일 먼저 노린 상대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대(大) 아그리피나였습니다. 이때 형 네로 카이사르와 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세야누스는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부추겨 세 모자를 이간질합니다. 먼저 세야누스는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파벌을 만듭니다. 다음, 대(大) 아그리피나가 반역을 일으키고 있다고 티베리우스에게 거짓 보고를 합니다.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가 보낸 날조된 편지를 믿습니다. 세야누스는 네로 카이사르가 반역의 공범이라고 고발하죠. 원로원은 티베리우스가 온전히 결정할 때까지 모자의 처벌을 보류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대(大)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가 유죄라고 판단합니다. 결국 대(大) 아그리피나 일족은 숙청당하고 네로 카이사르는 폰티아 섬으로 유배당합니다. 그리고 31년, 풀려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네로 카이사르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의 계략을 알고서도 동조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대(大) 아그리피나는 여전히 티베리우스가 남편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했다고 믿고 있었기에 티베리우스를 매우 증오했습니다. 대놓고 티베리우스가 아들 네로 카이사르에게 황제 직위를 물려주지 않을 거라고 떠벌렸고요. 소(小) 드루수스가 정신이 나갔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죠. 이런 상황이니 인내심 강한 티베리우스도 대(大) 아그리피나를 봐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네로 카이사르의 경우는 좀 의외이긴 합니다. 티베리우스가 혼인까지 주선할 정도로 후계자로 밀어줬는데 말이죠. 저는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두 번째 사냥이 시작되다

세야누스는 이제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몰아낼 계략을 세웁니다. 소(小) 드루수스를 암살할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요. 세야누스는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를 유혹합니다. 레피다는 남편을 배신하고 세야누스의 편에 붙었죠. 세야누스는 수사관 세베루스를 포섭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반역죄를 고발하게 합니다. 결국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유죄 처분을 받고 서기 30년, 황궁 지하실에 유폐당하죠.



티베리우스의 석고상(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반격의 시작

세야누스의 권력은 하늘을 찌릅니다.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되어 정치에까지 개입했죠. 이제 세야누스는 원로원 내에 파벌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반대하는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하고 티베리우스를 제거할 음모까지 세웠죠. 티베리우스는 섬에서 은둔했지만 지방 행정관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로마의 정계를 꿰고 있었습니다. 세야누스의 야심을 눈치챈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대(大) 드루수스의 아내 소(小) 안토니아는 티베리우스에게 은밀하게 노예에게 편지를 전하게 합니다. 편지에 따르면, 소(小) 안토니아는 '세야누스는 위험한 인물이다, 남은 손자 가이우스만은 살려달라'라고 간청하고 있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동생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던 만큼, 동생의 아내 소(小) 안토니아의 말도 믿어주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가이우스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세야누스를 제거할 계책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티베리우스의 전략

서기 31년,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공동 집정관으로 임명합니다. 겉으로는 신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었습니다. 집정관이 되면 둘 중 하나는 로마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 있었기 때문에 세야누스가 로마에 있어야 했죠. 티베리우스가 은거할 동안,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전할 편지를 미리 보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편지는 티베리우스에게 전하지 못하게 했었습니다(면회도 미리 허락을 받도록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야누스가 로마에 발이 묶이면서 편지를 장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티베리우스에게 새로운 편지들이 전달되기 시작했죠. 게다가 세야누스 부하가 밀고하자,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가 반역을 저지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도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에게 호민관 직위를 제외한 모든 권한을 주어서 로마의 속주에 원하는 대로 명령할 수 있게 합니다. 왜 호민관 직위를 제외했냐면, 호민관에게는 신체 불가침 권리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호민관의 신체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죠. 그리되면, 세야누스를 제거하기 어려워지니 호민관 직위를 제외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리빌라와의 약혼을 허락해서 세야누스를 자만하게 만듭니다.



사냥이 끝나다

티베리우스는 집정관 직위를 갑자기 사임합니다. 한 사람이 집정관에서 내려오면 다른 사람도 같이 내려와야 했죠. 세야누스도 어쩔 수 없이 집정관 직위에 내려옵니다. 티베리우스는 마크로를 새로운 근위 대장으로 임명합니다. 마크로에게 "세야누스를 네 마음대로 다루어도 좋다"라고 은밀히 지시하면서요. 마크로는 티베리우스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마크로는 원로원에 세야누스가 근위 대장에서 사임되었고 대신 호민관 직책을 부여한다고 알립니다. 세야누스는 차기 황제가 될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새로운 집정관 레굴루스는 티베리우스의 편지를 읽으며 시간을 끌기 시작합니다. 이때 마크로는 티베리우스의 이름으로 거액의 하사금을 주며 근위대를 포섭합니다. 점점, 세야누스를 비난하는 분위기로 흘러가더니, 마지막으로 세야누스에게 반역죄를 선고하고 처형을 명령하며 편지의 끝을 맺습니다. 원로원은 편지의 낭독이 끝나자마자 바로 환호합니다. 세야누스는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인식하기도 전에 바로 구속됐죠. 그날 밤, 세야누스는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서기 31년 10월 18일이었습니다.



늙은 황제의 복수, 피로 얼룩진 로마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 때문에 자신의 친족들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자각합니다. 원로원과 군중들의 멸시 때문에 한이 쌓였던 판이었죠. 이젠 참을 수 없게 된 티베리우스는 잔인한 복수를 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세야누스의 시체를 티베르 강에 버립니다. 기록 말살형에 처하고 세야누스의 동상, 동전 등은 모두 파기했죠. 세야누스의 남자 일족과 세야누스의 음모에 가담했던 측근들은 바로 처형당합니다. 여자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 과정이 매우 잔인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연좌제로 묶어 세야누스의 장녀를 처형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처녀를 교수형에 처할 수 없었죠. 그래서 망나니들더러 세야누스 장녀를 강간하라고 시킨 뒤 교수형에 처하게 합니다. 그 외에 세야누스 측근들의 어머니, 누이도 '죄인이 죽었는데 운다'라며 처형당했습니다. 로마에서는 남성들에게만 '반역죄'를 선고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여자 일족들은 눈물을 흘린다는 이유로 죽인 것이죠. 하도 숙청이 반복되다 보니 억울하게 얽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세야누스의 아버지와 친했다거나, 나중에 손절했는데 옛날에 세야누스와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말이죠. 이때 며느리 리빌라가 소(小) 드루수스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소식이 전달됩니다. 세야누스의 아내가 죽으면서 편지로 전한 거죠. 아끼던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된 티베리우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는 리빌라를 직접 죽이지 않고 제수씨 소(小) 안토니아에게 보냅니다. 소(小) 안토니아는 리빌라를 가두고 굶겨 죽였죠. 이 무렵, 방치된 대(大) 아그리피나도 굶어 죽습니다. 서기 33년이었죠. 같은 해에 드루수스 카이사르도 황궁 지하실에서 아사했습니다. 워낙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황족에게 음식을 제대로 주지 못할 정도였던 것이죠. 조카 손자가 굶어 죽은 것을 알게 된 티베리우스는 슬퍼합니다. 그리고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죄를 고했던 원로원 의원들을 숙청합니다. 도망간 인사들은 끝까지 추적해 잡아냈고요. 또한 남은 조카 손자 가이우스를 조금이라도 헐뜯는 사람이 있으면 끔살시켰죠.


장 폴 로렌이 그린 티베리우스가 죽는 장면(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최후의 승자는 누구인가

티베리우스에게 남은 후계자는 조카 손자 가이우스(칼리굴라), 소(小) 드루수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게르마니쿠스의 동생 클라우디우스였습니다. 그중 티베리우스는 친손자 게멜루스를 가장 아꼈습니다. 인자하고 박학다식한 클라우디우스도 좋게 보았으나, 클라우디우스는 신체적 장애가 있었고 게멜루스는 황제가 되기에 너무 어렸습니다. 반면 가이우스(칼리굴라)는 혈기왕성한 20대 청년으로 대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죠. 결국 티베리우스는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가이우스를 게멜루스의 후견인으로 정한 뒤 게멜루스를 가이우스의 공동 황제로 지명합니다. 그리고 서기 37년 3월 16일, 79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민중들은 티베리우스가 죽었을 때 환호했다고 해요. "티베리우스를 티베리스 강으로 던져버리자!"라고 외치면서요(실행은 안 됩니다). 원로원에서는 티베리우스의 유언을 무시하고 가이우스만 단독 황제로 인정했고요. 티베리우스가 죽은 지 이틀 뒤, 가이우스(칼리굴라)는 로마 3대 황제로 즉위합니다.


티베리우스의 조카 손자 가이우스(칼리굴라), 훗날 로마 3대 황제(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당대 역사가들에 의해 폭군, 잔인한 황제로 기록 남았던 티베리우스. 후대에서는 사치와 향락을 멀리하고 로마의 기틀을 잡은 유능한 황제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야누스 같은 황제였죠.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평이 갈리고요. 어떻게 평가할지 독자분들께 맡긴 뒤, 티베리우스 황제의 일대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3편에 걸쳐 열심히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 주에는 <왕을 지킨 여자들>을 다시 연재할 예정입니다. 다시 중국으로 향할 건데요. 독고황후와 마황후 중 누구로 할까 고민 중입니다. 황제를 착실히 보필하면서 정치적으로도 유능한 왕비를 발굴하고 싶거든요. 좋은 의견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참고 자료>

나무위키, 티베리우스, https://namu.wiki/w/%ED%8B%B0%EB%B2%A0%EB%A6%AC%EC%9A%B0%EC%8A%A4#rfn-139

나무위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https://namu.wiki/w/%EB%93%9C%EB%A3%A8%EC%88%98%EC%8A%A4%20%EC%9C%A8%EB%A6%AC%EC%9A%B0%EC%8A%A4%20%EC%B9%B4%EC%9D%B4%EC%82%AC%EB%A5%B4#s-2.6

나무위키, 세야누스, https://namu.wiki/w/%EC%84%B8%EC%95%BC%EB%88%84%EC%8A%A4

나무위키, 칼리굴라, https://namu.wiki/w/%EC%B9%BC%EB%A6%AC%EA%B5%B4%EB%9D%BC

Wikipedia, Tiberius, https://en.wikipedia.org/wiki/Tiberius#Tiberius_in_Capri

Wikipedia, Sejanus, https://en.wikipedia.org/wiki/Seja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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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그에도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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