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이 머지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암흑기를 떠올려야 하니, 글이 쉽사리 쓰이지 않네요. 느리게, 천천히 쓰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꿋꿋이 가야 할 길을 걸었던 선조들을 떠올리면서요. 선조들은 백여 년 후에 후손들이 자신의 생애를 네모난 액자에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클릭 한 번으로 글자가 쓰이는 때가 올 것을 상상조차 못했겠지요. 우리가 발달된 문명을 누리는 것은 선조들이 나라를 목숨 걸고 지켰기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역사에서 잊힌 충신들을 발굴하던 중, 2018년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나오는 충신이 실존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이미 한 번 발굴했지만 드라마가 끝난 지 3년이 지났기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광복절도 기념할 겸, 대한제국의 몇 안 되는 충신 이용익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왕을 만난 보부상
이용익은 1854년 의금부 도사(종 5품) 이병효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양반이었지만, 중앙관료들과 연줄을 맺지 못해 집안이 가난했죠. 이용익은 보부상으로 활동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갑니다.하도 많이 걷다 보니 걷는 속도가 빨라졌죠.이 능력을 토대로 1882년 임오군란 때 피신한 명성황후와 고종 사이의 연락책으로 활동합니다. 명성황후의 친족 민영익은 그의 능력을 알고 그를 감역(종 9품)으로 천거했죠. 이후 명성황후와 고종의 신임을 얻고 단천부사로 특진합니다. 보부상으로 일하면서 지리를 익힌 그는 금광을 캐내 황실의 재정에 기여하면서 승승장구합니다.
탁지부 대신 시절 이용익(출처: 위키백과)
폐하, 어서 중립을 선포하소서
19세기 말, 독립협회가 한창 '이권 수호'를 외치며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런데 이용익은 독립협회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용익은 친러파였는데, 독립협회는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었거든요.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1898년 독립협회를 해산한 뒤, 1901년 이용익은 지계아문총재관을 거쳐 1902년 탁지부 대신으로 임명됩니다. 탁지부는 대한제국 황실의 재정을 관리하는 부서로 현재 기획재정부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는 화폐개혁을 단행했고, 인삼을 황실에서 전매하도록 해서 황실의 재정을 튼튼히 했습니다. 또한 외세의 이권 침탈을 막기 위해 외국인의 광산 채굴을 금지했죠. 하지만 그는 백성에게 좋은 평을 받지 못했습니다. 절도사 시절, 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화폐개혁 때 백동화를 대량으로 발주해 물가를 급격하게 상승시켜서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쳤기 때문입니다. 금괴 주조 사업을 단행하면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탓에 윤치호에게 쓴소리를 듣기도 했고요. 하지만, 일본의 야욕을 눈치챈 이용익은 민영환, 이준, 이상재와 함께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노력합니다. 러일전쟁이 터지자, 중립선언을 하도록 고종을 설득한 것이 그의 대표적인 업적이죠.또한 군비 증강을 주장해 일본의 침략에 대비했고요. 일본은 이용익을 '요주의 독립운동가' 리스트에 올립니다. 그리고 1904년 외무대신 이지용을 내세워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했죠. 이용익이 강하게 반대하자, 일본 정부는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합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고종황제 어진(출처: 위키백과)
500년 사직을 절대 왜놈에게 바치지 않으리
일본은 온갖 수단을 써서 이용익을 회유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용익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안도한 일본은 그를 귀국시켰죠. 이용익은 귀국 후 경북관찰사가 되었지만 친일파들의 견제를 받았습니다. 그는 정계에서 손을 떼고 교육 사업에 전념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에서 근대화된 문물을 접한 뒤 배워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이용익은 일본에서 구입한 서적 600권과 인쇄기를 토대로 인쇄소를 차리고, 보성전문학교와 보성중학교를 설립했습니다.(참고로, 보성전문학교는 해방 후에 고려대학교로 승격됩니다. 우리가 아는 고려대학교요). 이후 군부대신에 기용되어 정계에 다시 진입했는데,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됩니다. 그는 완강하게 반대했고, 일본 헌병대에 의해 투옥됐죠.석방 후 고종의 밀령을 받고 프랑스-러시아와 제휴를 꾀하려 했습니다.그러나 프랑스로 가던 중 일본 관헌에게 발각되었고 책임의 추궁을 피하고 싶은 고종은 이용익의 모든 권한을 박탈합니다. 이용익은 타지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다가,1907년 러시아에서 친일파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고 맙니다.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출처: 나무위키)
이용익의 부고 소식을 들은 대한제국은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1910년, 국권피탈 후 이용익 집안의 재산은 몰수당하고 직위는 박탈당했죠. 하지만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집안의 명맥을 잇다가,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게 건국훈장을 받습니다.
생전 이용익에 대한 평은 좋지 못했습니다. 내적으로는 황실의 국고를 채우는 데 큰 기여를 했지만 백성의 고혈을 짜내서 국고를 채웠고, 외적으로는 러시아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친일파들의 눈엣가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애국자로 찬양받았지만 광복 후, 군사정권의 반공주의 정책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1982년 mbc에서 드라마 <이용익>을 방영하면서 세간에 이용익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2002년 고려대학교 조익순 명예교수가 <고종황제의 충신 이용익의 재평가>를 출간하면서 우리나라 사학계에서 이용익을 주목하기 시작했고요. 소설 <객주>, 드라마 <찬란한 여명>, <제중원>, <미스터 선샤인> 등에서 이용익이 등장하면서, 대중들에게 '대한제국의 마지막 충신',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로 눈도장을 찍기도 했죠.외세의 휘둘리고 국력이 쇠하던 구한말 시절, 자신의 소신을 지키다가 쓸쓸히 죽은 이용익의 삶을 네모난 액자에 조용히 옮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