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코라 교회의 모자이크,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좌)가 그리스도(우)에게 자신의 교회를 바치는 장면(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2021년 10월 28일부터 2022년 2월 1일까지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의 일대기를 연재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황제의 충신이었으나 마지못해 황제가 된 뒤 몰락하는 제국을 일으키려고 고군분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에 좌절하고 수도사의 길을 택했죠. 이처럼 교회의 권력이 막강했던 중세 시대에 사람들은 종교에 깊게 의지했습니다.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의 사람들은 수도사의 삶을 인생의 마지막 순간, 최후의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정치판에서 실각하거나 현실에 회의감을 느낄 때 수도사가 되었죠. 특히 흑사병, 지진, 기아, 이슬람의 침공, 황권의 추락 등으로 제국이 몰락하던 시기, 종교에 뜻을 두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칸타쿠지노스처럼 황제의 충신이자 제국의 2인자로 군림하다가 수도사가 된 또 다른 인물을 소개합니다.
부활한 제국, 분열의 조짐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는 127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납니다.그의 아버지는 게오르기오스 메토키테스로, 미하일 8세의 부주교였죠. 당시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뒤, 교회 통합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1204년 4차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뒤, 동로마 황족들은 니케아에 망명 제국을 세웠죠. 60여 년 뒤 니케아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가 라틴 제국을 무너뜨리고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부활했습니다. 서유럽의 교황과 군주(특히 시칠리아, 쫓겨난 라틴 제국의 군주)들은 미하일 8세의 동로마 제국을 반기지 않았고 급기야 십자군을 모집했습니다. 미하일은 서둘러 교황청과 화해할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리고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를 열어서 교회 통합을 선포했죠.
다사다난한 어린 시절
게오르기오스 메토키테스는 리옹 공의회에 참석한 사람으로, 교회 통합을 열렬히 지지했습니다.그래서 테오도로스의 집안은 황제의 보호 아래 유복하게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1282년 미하일 8세가 죽자 반란이 일어납니다.미하일 8세의 교회 통합 정책에 반대하는 백성들이 많은 탓이었죠. 미하일의 뒤를 이은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가 아버지의 시체를 가매장해야 할 정도였죠. 안드로니코스 2세의 명령을 받은 게오르기오스는 가족들을 데리고 소아시아로 망명 갑니다. 그래서 테오도로스는 소아시아에 있는 옛 망명 제국의 수도 니케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거기서 중세 시대 학문의 필수 과정인 삼학(trivium, 문법&논리학&수사학으로 구성됨, 사과의 기초)과 사과(quadrivium, 산술학&기하학&물리학&천문학으로 구성됨, 삼학의 심화 과정)을 배우죠. 이렇게 그는 학문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초상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황제의 총애를 받은 젊은 인재
1290년, 안드로니코스 2세가 니케아를 순방합니다.테오도로스는 뛰어난 웅변 실력으로 황제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테오도로스는 황궁에 입성해 안드로니코스 2세의 신실한 협력자가 됩니다.황제의 총애를 받은 그는 외교 업무도 수행합니다. 1295년 아르메니아와 키프로스로 가서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이자 공동황제 미하일 9세의 신붓감을 찾기도 했죠. 1296년 1월 미하일은 아르메니아의 리타와 결혼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성과를 인정받아 20대에 로고테테스(λογοθέτης, 동로마 제국의 고위 행정직)가 되었습니다. 1년 후 원로원 의원도 되었죠.
세르비아와의 결혼 협상
1299년, 테오도로스는 세르비아에서도 성공을 거둡니다.그는 세르비아의 왕 밀류틴과 혼인 동맹을 추진합니다.그 결과 밀류틴과 안드로니코스 2세의 딸 시모니스가 결혼했죠(참고로 밀류틴은 40살이고 시모니스는 5살입니다. 원래 결혼 상대는 안드로니코스의 누이였으나, 그녀가 결혼을 안 한다고 하는 바람에 안드로니코스의 딸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협상의 대가로 동로마는 세르비아가 차지한 마케도니아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세르비아는 부활한 동로마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1303년과 1305년 사이, 총리가 된 테오도로스는 세르비아로 가서 황후 이레네를 보필합니다.
권력의 정점에 오르다
부와 권력을 얻으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자신의 딸과 황제의 조카를 결혼시키면서, 황제의 인척이 됩니다.결혼 후, 황제의 조카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는 카이사르(καῖσαρ, 황위 계승권자나 고위 관료에게 주어지는 직책, 부제를 의미한다)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맥을 토대로 황실 가족들의 평론이나 묘비명을 씁니다. 1313년에는 미하일 브리엔니오스 밑에서 천문학을 공부하고 3년 후에 논문의 서론을 썼고요.1316년에는 코라 수도원의 복구를 지원하면서 신앙심을 표출했습니다. 1321년에는 메가스 로고테테스(μέγας λογοθέτης, 로코테테스들의 수장)가 되어 제국의 2인자로 거듭납니다.권력의 정점에 올랐죠.
코라 교회의 모자이크,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좌)가 그리스도(우)에게 자신의 교회를 바치는 장면(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해가 뜨면 지는 법
테오도로스의 운명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합니다.1321년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가 방탕하게 살다가 실수로 동생을 살해해서 할아버지의 눈밖에 났습니다. 그는 몰래 감옥을 탈출해 내전을 일으켰죠. 내전 도중 테오도로스의 사위가 죽습니다. 테오도로스의 아들들은 안드로니코스 3세의 편을 들었죠.테오도로스는 끝까지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내전이 끝나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퇴위하고 수도원으로 물러났고, 테오도로스는 재산을 빼앗기고 디디모티호로 유배를 갑니다. 집도 몽땅 불에 탔죠. 1330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테오도로스는 자신이 사비를 들여 복원했던 코라 수도원으로 물러납니다. 주군과 똑같은 길을 걸었죠. 그는 테오렙토스로 개명한 뒤 수도원에서 시를 쓰고 학문을 갈고닦으며 여생을 보냅니다. 그리고 1332년 3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세밀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는 외교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신학부터 천문학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죠. 20편의 6보격 시, 18편의 연설사로 지성과 학식을 한껏 뽐냈을 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서에 주석을 남기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연구의 서론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플라톤의 대화에 대한 그의 논평은 15세기 르네상스의 신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Miscellanea philosophica et historica>로 120개의 소론이 실려있습니다.또한 언어학에도 관심이 많아 라틴어에 노출되어 퇴색된 그리스어의 순수성을 되살리려고 했습니다.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는 제국의 2인자이자 당대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경외했죠. 그는 중세 유럽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포티오스와 미하일 프셀로스에 버금가는 학자로 평가받았습니다. 테오도로스의 제자이자 역사가 니키포로스 그리고라스는 연대기를 집필하며 스승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을 지녔을 뿐 아니라 모든 의문에 답할 수 있는 살아있는 지식의 보고'라고 찬양했죠(칸타쿠지노스 편에 나오는 그 그리고라스 맞습니다. 참고로 그리고라스도 스승처럼 안드로니코스 2세의 편을 들었기에 안드로니코스 3세를 좋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잘나가는 정치인에서 말년에 수도사가 되었고 후대에 학자로 이름을 날렸다는 점은 칸타쿠지노스와 비슷합니다. 차이점은 진영입니다. 내전이 터지자 두 사람은 반대편에 섰죠.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손자의 편을,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는 할아버지의 편을 들었습니다. 승자는 전자였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집안이 몰락하고 재산이 몰수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칸타쿠지노스는 군사령관이 되어 제국의 2인자로 거듭납니다(어쩌면 칸타쿠지노스는 몇십 년 후, 자신의 적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을 예상했을 수 있습니다). 누구의 길이 옳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모시는 주군이 달랐고, 두 사람 모두 주군에게 충심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극과 극이었습니다.정치판에서 중요한 것은 충심과 신념보다 정세를 보는 안목인 것 같아 씁쓸해집니다.
<참고 자료>
-참고 도서및 학술지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바다출판사, 2016.
Marina Bazzani, 「THEODORE METOCHITES, A BYZANTINE HUMANIST」, 『Byzantion』, Vol. 76 (2006), pp. 32-52 (21 pages), Peeters Publishers.
저는 2021년 2월 8일, 브런치에 입성했습니다. 심사에서 통과했을 때의 설렘과 뿌듯함이 기억납니다. 날고 기는 작가들이 한데 모인 곳에서 잘 해낼 수 있을까 노심초사했던 적도 있고, 알림이 언제 울리는지 가슴 졸인 적도 있었습니다. 구독자 한 명 한 명 늘어날 때마다 기뻐하기도 했죠.
브런치 1주년, 처음의 설렘과 뿌듯함은 무뎌지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알아서 브런치를 키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1년 전과 비교하면 크게 달라진 점은 없습니다. 아직도 철없는 번역가 지망생입니다. 굳이 말하면, 처음으로 장편물 번역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겠죠.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구독자이죠. 가족과 지인 몇 명으로 브런치를 시작했습니다. 몇백, 몇천 명의 구독자를 거느린 작가님들이 제 계정에 찾아올 때 초라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꾸준히 글을 쓰고 작가님들과 교류하다보니 어느덧 676명의 구독자가 생겼습니다.
1년 동안 89개의 글을 썼습니다. 브런치를 처음 시작할 때만해도 1년이나 브런치 활동을 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브런치북을 만들 생각도, 긴 시리즈물을 연재할 생각도 못했고요. 작가님들의 라이킷을 받고 댓글을 읽으면서 용기를 얻었기에 이만큼 활동한 것 같습니다.
1년 간 제 글을 사랑해주신 작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휴식기를 가지면서 브런치북을 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빠르면 3월 중순, 늦으면 4월달에 새로운 인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번에도 동로마(비잔티움)의 인물을 연재하되, 조금 이른 시대를 다룰 예정입니다. 2022년, 모두 건필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