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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해내고 있다는 착각

노력도 가끔은 배신한다

by 글자산



10년 전,

대기업 인사팀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시절이었다.

그나마 자신 있던 건 건강한 체력과 유연한 사고방식뿐이었다.


당시 꿈은 '대기업 사장'이 되는 것이었고,

그래서 입사 초반엔 정말 미친 듯이 일을 했다.


평일엔 늘 야근, 주말도 사무실에 나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3년 차,

남들보다 조금 이르게 대리로 조기진급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금씩 마음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어깨 힘이 들어갔던 걸까,

어느 순간부터는 일에 깊은 고민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전 자료를 그대로 붙여 넣기도 하고,

형식만 갖춘 해 대충 넘어가기도 했다.


요령을 부린다는 표현이 딱 맞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사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보통의 일하는 방식은 사수가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려주면

실무자로서 디테일을 보완하거나 외부 의견을

정리해서 전체적인 보고서의 완성도를 높이는 식이었다.


그리곤 반드시 담당자의 의견과

이 보고서를 관통하는 메시지로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몇 번의 피드백을 거쳐서

임원에게 보고가 되는 방식이다.


사람이 게을러지거나 마음이 다른 곳으로 향하면 그 흔적을 남기는 걸까,


똑똑한 사수는

내가 깊은 고민을 하지 않고 보고서에 들어가야 할

기본적인 내용조차 빼먹은 것을 눈치챘다.


평소 같으면 불러서 피드백을 줘야 할 상황인데

이상하게 아무런 얘기가 없다.


확실히 뭔가 달랐다.

사수는 별다른 피드백을 주지 않았고,

내가 낸 자료는 별말 없이 그냥 넘어갔다.


보고 당일,

사장 앞에 높인 보고서는 내가 만든 자료와는 전혀 달랐다.


내가 준비한 내용은 전부 빠져있었고,

구성도 내용도 완전히 새로운 보고서였다.


보고 후에도 사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 피드백이 없었지만,

그건 무관심이 아니라 실망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후로 몇 년간은 다시 진지하게,

초심으로 돌아가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가끔은, 정말 가끔은 노력도 배신한다.


그럴 땐,

"조금 더 잘할걸..."하고 후회하기보단,

"그래, 노력도 가끔은 배신하는구나"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건,

'게으름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게을러져 있던 그 시기,

어김없이 문제는 찾아왔고 그 대가는 분명하게 돌아왔다.


평범한 노력은 사실 노력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오늘도 평범하지 않은 노력을 스스로에게 건네보길 바란다.


그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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