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박 11일 서호주 로드트립 기록
겨울여행지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역시 호주.
오페라하우스가 있는 시드니, 커피의 도시 멜버른, 호주의 수도 캔버라, 서퍼의 도시 골드코스트도 매력적이지만 야생 캥거루가 뛰어다니는 날것 그대로의 호주를 보고 싶다면 서호주 로드트립을 권한다. 아이들 동반 가족여행으로 쉽지만은 않았지만 대자연의 장엄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로드트립이었다.
이 글에서는 서호주의 must-see 스팟 4곳을 소개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호주 입국심사에서의 한약 반입 후기도 덧붙이고자 한다.
서호주는 한반도의 약 12배, 호주 전체 면적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한 주이다. 서호주 인구의 대부분이 몰려 있는 도시 퍼스를 벗어나면 끝도 없는 붉은 대지인 아웃백이 펼쳐진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경험해 본 아웃백은 광활하다는 표현을 넘어서 두렵기까지 했던 미지의 공간이었다. 뉴질랜드에서처럼 푸르른 초원에서 풀을 뜯는 양 떼를 볼 기대를 안고 출발했지만 양은커녕 생명체 하나 보이지 않는 사막 풍경만이 몇 시간 동안 끝도 없이 이어졌다. 붉은 흙과 낮게 깔린 관목, 하지만 하늘은 정말 푸르렀던 로드트립의 시작.
서호주 여행은 퍼스를 중심으로 남쪽 혹은 북쪽 루트를 선택하게 되는데 보통 한정된 일정 탓에 한쪽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10박 11일로 짧지도, 그렇다고 넉넉하지도 않은 일정이었지만 서호주는 다시 오긴 힘들 것 같아 남북을 모두 횡단하는 강행군을 선택했다. 간과했던 건 상상을 초월하는 아웃백의 광활함. 하루에 길에서 쏟는 시간이 평균 4-5시간 이상이 되면서 살짝 후회하기도 했으나 덕분에 아쉬움은 남지 않는다.
1. 쿼카의 유일한 서식지 로트네스트 아일랜드
서호주 여행자들이 반드시 들르는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는 아름다운 해변과 동식물로 이름난 곳이다. 특히 이 섬에서만 사는 유대류인 야생 쿼카를 만나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따로 관리되고 있진 않지만 식당에 앉아있으면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쿼카와 셀카 찍기는 필수. 자전거를 타고 섬을 일주할 수도 있고 힘들다면 순환버스를 타고 돌아보며 원하는 곳에서 타고 내리면 된다. 모든 스팟에서 다 내릴 필요는 없고 개인적으로는 리틀살몬베이, 살몬베이 정도에서만 내려서 해변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오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2. 남붕국립공원 피나클스 석양과 은하수
호주에서의 겨울은 남쪽이 기후가 더 좋은데 북쪽으로 여행하기를 선택하는 많은 이들은 이곳 피나클스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남붕국립공원 안에 있는 피너클스 Pinnacles 라 불리는 수많은 돌기둥들이 서있는 풍경은 마치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한두 군데 모여있는 게 아니라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이 돌기둥들을 모르고 본다면 고대 유적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The Pinnacles Desert는 원래 바다였던 지역에 쌓인 조개껍질과 해양 생물의 석회질 퇴적물이 기반이 되어 형성된 지형이다. 해수면이 낮아진 뒤 이 퇴적층은 해안 사구로 변했고, 빗물이 모래층으로 스며들면서 석회 성분을 녹였다가 굳어지면서 모래 속에 단단한 원통형 석회암 기둥이 형성되었다. 이후 오랜 시간 바람과 침식 작용으로 주변의 부드러운 모래가 제거되면서, 지하에 있던 단단한 석회암 기둥들이 지표 위로 드러나 현재의 뾰족한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피너클스는 사막에서 솟아난 돌기둥이 아니라, 바다가 남긴 흔적인 것이다.
일몰 시간에 맞춰 방문하면, 지는 해의 붉은 기운이 모래 위에 겹쳐 더욱 따뜻한 색감으로 물든다. 다만 해가 완전히 지고 별이 또렷하게 드러나기까지는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보는 건 요즘 쉽게 누리기 어려운 낭만이다. 하지만 기다림을 싫어하는 우리 막내에게는 쉽지 않은 과제였나 보다. 숙소에서도 잘 보일 거라는 아이의 투정을 흘려듣고 끝까지 버텨 보고 왔지만, 돌아와 보니 아이 말대로 별은 숙소에서도 잘 보였다. 머쓱함과 맞바꾼 낭만, 그러나 사진은 건졌다.
3. 호주 아웃백의 심장, 칼바리 국립공원
칼바리 국립공원은 서호주 북쪽 루트에서는 필수코스이지만 무척 덥고 습한 기후여서 아이들과 트레킹이 쉽지 않을 것 같아 고민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서호주에 다시 와보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에 결국은 무리해서 1박 일정으로 가게 되었다.
칼바리로 향하는 길은 그 어떤 루트보다도 지루하고 멀다. 양옆으로는 황량한 아웃백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통신도 끊기는 데다가 달리는 차도 거의 없이 적막해서 무섭기까지 하다. 설상가상으로 간신히 도착한 에어비앤비 주인은 연락이 안 되어 30분 이상 밖에서 기다리고 비까지 내려 아무래도 잘못 왔나 싶었다. 하지만 그 비 덕분에 다음날 기온이 눈에 띄게 낮아진 게 행운이었다. 칼바리 국립공원에서는 한여름에 실제로 기온이 40도 이상까지 올라가 사람이 죽은 적도 있다고 한다. 날이 흐려서 뷰가 살짝 아쉽기도 했지만 항상 모든 조건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칼바리 국립공원 스카이워크 (Kalbarri National Park Skywalk)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머치슨 강(Murchison Gorge)의 드라마틱한 대협곡을 높은 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인 스카이워크. 협곡 가장자리에서 약 100m 높이에 설치된 구조물로, 두 개의 주요 플랫폼이 절벽 바깥쪽으로 각각 약 25m, 17m 확장되어 있어 거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경관을 제공한다.
Nature’s Window (네이쳐스 윈도우)
붉은 사암 바위에 둥글게 뚫린 아치 구조로 마치 창문 프레임을 통해 보는 듯한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약 4억 년 이상 된 사암층이 바람·물에 침식되어 형성되었다고 하며 짧은 트레킹으로 볼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인 스팟.
Z-Bend
머치슨 강이 ‘Z’ 모양으로 굽이치는 지점을 내려다볼 수는 전망대로 깊게 파인 협곡과 붉은 사암 절벽,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의 곡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수억 년에 걸친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협곡 지형을 바라보고 있으니 겸허해지는 마음. 인간이 이루어낸 문명은 경이롭지만 우리의 상상조차 닿지 않는 시간을
품은 자연 앞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세 곳은 칼바리 국립공원 안에서 차를 타고 다니면서 비교적 짧은 거리로 다녀올 수 있는 곳들이다. 이 외에도 협곡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여러 트레킹 코스가 있으나 시간관계상, 그리고 아이들 동반 여행이기에 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덥고 습한 기후, 그리고 사정없이 달려드는 파리떼 때문에 쉽지 않았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머쉬룸락 Mushroom rock에서 우연히 만난 야생 캥거루에 의해 잊혀졌다.
4. 비현실적인 물빛, 에스페런스 럭키베이
퍼스에서 편도 8시간 걸리는 서호주 남쪽에 위치한 에스페런스. 게다가 우리는 북쪽으로 갔다가 내려가는 코스였으니 에스페런스를 위해 길 위에서 투자한 시간이 상당했다. 중간에 주리언베이, 버셀톤제티, 마가렛리버, 알바니 등의 도시에서 하루씩 묵었고 이동 시간은 휴식할 틈도 거의 없이 3-4시간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국립공원을 들어가며 터쿠아즈 물빛을 마주하는 순간 모든 가족이 탄성을 지르며 그간의 피곤함을 다 날려버릴 수 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유리빛의 바다와 새하얗고 고운 모래. 엄청난 바람과 감기기운 때문에 온전히 즐기지 못한 게 아쉽지만 눈에 담고 온 천상의 풍경은 그래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호주에 한약 반입은 가능할까
글을 마무리하며 호주의 입국 검역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보려 한다.
호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식품 반입 규정이 매우 엄격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육류나 곡류가 포함된 가공식품 역시 성분에 따라 반입이 제한되며, 볶음고추장이나 라면처럼 고기 성분이 들어간 제품은 반드시 신고 대상이다. 대부분의 식품은 ‘금지’라기보다 ‘신고 후 검사’가 원칙이며,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높은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호주 입국심사가 이렇게 까다로운 이유는 대륙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외래종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수천만 년 동안 다른 대륙과 분리되어 있었기에 고유 생태계가 매우 독특하고, 외부 병해충에 대한 면역이 약해서 한 번 외래종이 들어오면 통제가 어려워 유독 엄격한 편이다.
약물은 3개월 미만의 기간이라면 따로 신고할 필요가 없으나 우리의 우려는 한약이었다. 탕제가 아닌 연조엑스제로 준비했지만 성분명이 포장에는 쓰여있지 않아 통과가 될지 우려가 되었으나, 지난 여행에서 양약으로 해결되지 않는 감기에 힘들었던 기억에 이번에는 꼭 한약을 준비해 가야겠다 싶었다. 처방명과 성분명을 모두 영어로 표기하고 for personal use only라는 문구를 덧붙였다.
입국심사 시 세관신고서 작성란에 traditional medicine이라는 항목에 표시를 했고 우리가 가져온 리스트를 보여주고 생약 형태가 아닌 가공된 형태의 시럽이다라고 설명을 했더니 캐리어를 열어보지 않고 무사히 통과되었다. 여행 초반에 걸려버린 감기를 다스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한약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약보다 음식에 대해 더 꼼꼼히 확인하는 분위기였다. 웬만한 건 한인마트에서도 다 구입 가능하고 여행에서는 좀 덜 먹는다는 생각으로 그냥 캔김치와 김만 잔뜩 가져갔는데 올바른 판단이었던 것 같다.
만만치 않지만 매력이 가득한 서호주
앞서 소개한 must-see 스팟 외에도 로드트립 도중 만난 야생 캥거루 떼, 하멜린비치의 야생 가오리, 바다와 강이 만나는 무어리버, 톤디럽 국립공원의 더갭과 내추럴브리지 등등 잊을 수 없는 풍경들이 지금도 떠오른다. 여행을 통해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에 더 겸허해지긴 한다. 그래서 오늘도, 또 다른 길 위를 상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