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한의사의 시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때 소년은 활을 집어 들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거대한 호랑이를 노려본다. 아마도 수양대군의 모습이 겹쳐 보였으리라. 부들부들 떨며 화살을 겨눈다. 숨을 조여 오는 두려움에 나약한 자신을 향한 분노를 얹어 화살을 날린다. 화살은 호랑이를 향해 날아가 명중했고 소년은 기절했다. 깨어났을 때 그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한 장면이다. 단종이 청령포에서 보내는 마지막 나날들을 상상력을 더해 그려낸 이 작품은 현재 1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외로웠던 비운의 왕 단종 곁을 끝까지 지킨 엄흥도는 실존 인물로, 아무도 거두지 않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냈다고 전해진다. 500년 만에 전 국민이 단종의 장례를 치른 것 같다는 한 관람객의 평처럼 “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다.”는 그의 말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영화 중반, 엄흥도는 악몽과 불면에 시달리는 단종을 위해 ‘천마’를 캐러 간다. 한의사라면 자연스레 시선이 머무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이 천마는 어떤 약일까.
천마는 난초과 식물인 Gastrodia elata의 뿌리줄기로 [동의보감]에 “主諸風濕痺 四肢拘攣 小兒風驚癎 治眩暈風久癎服氣”라 기록되어 “온갖 풍습비, 사지에 경련이 이는 것과 소아의 풍간과 경기에 주로 쓴다”라고 되어 있다. 많이 놀라거나 마음을 가라앉혀야 할 때 복용하는 대표적인 약 우황청심원에도 들어있으며 평생 어지럼증에 시달렸던 영조는 자음건비탕이라는 처방에 천마를 첨가하여 자주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정말 천마 하나로 단종의 불면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한의학에서는 불면을 단일한 병으로 보기보다 다양한 병리 상태에서 나타나는 결과적 증상으로 인식한다. [동의보감]에서도 불면은 하나의 질환으로 분리되어 다뤄지기보다 심, 신, 몽, 잡병 편 등 다양한 조문 속에서 등장하며 원인에 따라 심비양허, 심담허겁, 간기울결, 음허화왕, 담열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따라서 특정 약재 하나로 해결하기보다 체질과 병인을 함께 살피는 맞춤 처방이 중요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들이 수면장애에 시달렸던 기록들이 남아있다. [왕의 한의학]의 저자 이상곤 한의사에 따르면 승정원일기에만 침수(寢睡)라는 단어가 2만 7210회 나올 정도라 한다. 이는 임금의 수면 상태가 단순한 개인의 건강 문제를 넘어 국정 전반과 직결된 사안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0대 후반 수준에 머문다. 끊임없는 정무와 권력 다툼 속에서 쌓인 극심한 스트레스는 수면을 방해하고 전반적인 건강을 해쳤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들이 이른바 울화병에 해당하는 신체적 증세를 보인 사례가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선조는 “내 병이 다시 도져 고질이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심화가 가장 치성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한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상태를 직접 언급한다. 서자 출신이라는 콤플렉스와 사림과의 갈등, 임진왜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소화불량과 이명, 편두통 등에 반복적으로 시달렸으며 그 원인이 스트레스에 있음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단종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자신을 지켜주던 이들을 모두 잃고, 믿었던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유배까지 온 열일곱의 소년. 단종이 겪었을 심리적 충격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단종의 경우 조선왕조실록에는 특정 질병에 대한 상세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영화에서도 묘사되었듯이 수척해진 모습과 기력 저하, 깊은 불안과 슬픔에 잠긴 상태였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단종이 영월군 객사인 동헌에서 머물 때 지었다는 아래 시는 그가 견뎌야 했던 길고 고통스러운 밤, 곧 불면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一自寃禽出帝宮 원통한 새 한 마리 궁궐에서 나온 뒤로
孤身隻影碧山中 외로운 몸 외딴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
假眠夜夜眠無假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들 길 없고
窮恨年年恨不窮 해마다 한을 끝내려 하나 끝없는 한이네
聲斷曉岑殘月白 산봉우리에 울음소리 끊어지니 새벽달이 비추고
血流春谷落花紅 봄 골짜기에 피 흐르니 붉은 꽃이 떨어진다
天聾尙未聞哀訴 하늘은 귀먹어서 하소연 못 듣는데
何奈愁人耳獨聰 서러운 몸 어쩌다 귀만 홀로 밝은가
한의학적으로 본다면 그의 상태는 심한 스트레스와 억울한 마음으로 인한 간기울결, 두려움과 공포로 인한 심담허겁, 여기에 식사 부진으로 인한 비허까지 겸한 복합적인 양상에 가까웠을 것이다. 불면뿐 아니라 심계, 정충, 두통, 흉민 (가슴 답답함) 등 다양한 증세를 겸했을 가능성도 크다. 이러한 상태는 단순히 한 가지 약재로 다스리기보다는, 기울을 풀고(疏肝解鬱) 심신을 안정시키며(安神) 기혈을 보하는 방향의 복합적인 접근이 필요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시호, 향부자와 같은 이기약에 더해, 복신, 원지처럼 심신을 안정시키는 약재, 그리고 용안육, 당귀, 백작약 등 보혈약을 함께 배합하는 방식이다.
물론 엄흥도도 천마 하나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의사의 눈으로 보면 엄흥도가 천마를 캐러 나섰다는 설정은 단순한 약재 채취를 넘어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천마는 위에 언급했다시피 간풍을 식히고 놀람과 경기를 가라앉히는 효능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에 놓인 어린 왕의 심신을 조금이나마 안정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투영된 선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많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자기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 그 누구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어린 소년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준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때문일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한의학은 겉으로 나타나는 증상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인생을 본다. 엄흥도가 캐러 간 천마에 단종을 향한 마음이 담겨 있었듯 내가 내리는 처방이 그의 마음에 온기를 더했기를 진심으로 바랐을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먼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을 지켜주는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