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리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전시가 지난 3월 15일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의 로버트 리먼 컬렉션 중 총 81점을 선보이는 자리였으며 르누아르, 고흐, 고갱, 세잔 등 미술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화가들의 원작을 한데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자리였다.
‘리먼’이라는 이름은 어딘가 익숙하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의 바로 그 리먼 가문은 맞는데 로버트 리먼(1891–1969)은 그보다 이전 세대의 사람으로 미술 컬렉터로 더 유명하다고 한다. 그는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 18세기 프랑스 회화와 가구, 스페인과 네덜란드 작품 등의 수집에 집중했는데 유일하게 수집하지 못해 아쉬워한 화가가 네덜란드의 베르메르라고 한다. 이 전시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첫 작품이 바로 베르메르의 <레이스를 뜨는 여인>의 모사품인데 살바도르 달리에게 ‘간절히 원한다’는 표현까지 쓰며 개인적으로 편지를 써서 부탁했다고 한다. 이 일화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이 컬렉션을 구성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전시는 인체, 초상, 자연, 도시와 전원, 물결과 반영이라는 소주제로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에서 20세기 초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미술의 변화를 보여준다. 인상주의가 빛과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려 했다면, 그 이후의 화가들은 점차 대상의 형태와 구조, 그리고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며 새로운 회화적 형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전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진 시대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전시는 한 개인의 컬렉션으로 미술사조의 이러한 변화를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각 섹션에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들을 뽑아보았다.
1. 인간의 몸
누드화는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완벽하고 이상적인 인간의 몸을 구현하는데 치중했던 아카데미즘의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현실적인 인물들을 예술가의 개성과 현대적인 감각으로 묘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작은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데 이에 대해서는 글의 마지막에서 다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고갱의 〈목욕하는 타히티 여인들〉(1892)은 그가 타히티에 체류하던 초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고흐와의 결별로도 유명한 고갱은 인상주의가 자연에서 빛의 순간을 포착하는데만 골몰해 막상 그리려는 대상의 본질을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색과 선 자체의 고유성을 강조했던 그의 특징을 이 작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극적인 포즈를 취하는 기존의 누드화와는 달리 목욕하는 일상을 바라보는 담담한 시선 또한 모더니즘으로 향하는 변화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2. 초상
르누아르의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1892)은 한 점의 그림이 아니라 총 4점의 유화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미술부로부터 뤽상부르미술관에 걸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아 제작한 작품인데 이는 한때 비판의 중심이었던 인상주의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버전이지만 이번 전시에 나온 그림 또한 르누아르 특유의 부드러운 색채와 빛의 표현이 돋보인다. 피아노 앞에 앉은 두 소녀의 평온한 순간을 부드러운 색채와 빛으로 담아낸 이 작품은 르누아르가 인상주의 화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3. 자연
세 번째 섹션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작품은 폴 세잔의 <자 드 부팡 근처의 나무와 집들> (1885-1886년)이다. 자 드 부팡은 세잔이 젊은 시절 많은 시간을 보낸 엑상프로방스의 저택과 정원인데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나무들의 과감한 전면배치이다. 화면 앞을 가로지르는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격자 구성은 풍경을 하나의 구조적 형태로 느껴지게 만든다.
세잔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한때 활동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인상주의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그는 자연을 원통, 구, 원뿔 등 기본적인 형태의 조합으로 보아 구조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후대의 입체주의로 이어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건 세잔의 이 그림을 보자마자 한국의 인상주의 화가로 불리는 오지호의 ‘남향집’이 떠올랐다는 점이다. 다채로운 색으로 표현한 나무의 그림자도 인상적이지만 화면을 대담하게 가로지르는 나무의 배치가 돋보였던 만큼 세잔의 작품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4. 도시와 전원
신인상주의의 대표 기법인 점묘법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보통 조르주 쇠라만 떠올리지만 사실 폴 시냐크는 그를 한층 발전시킨 화가이다. 점묘법은 색을 섞지 않고 작은 점 형태로 화면에 찍어 놓은 뒤 관람자의 눈에서 색이 섞여 보이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인상주의가 빛의 인상을 빠르게 포착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신인상주의는 한 발짝 더 나아가 빛과 색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좀 더 구조적인 화면을 구현했다.
<클리시 광장> (1887)은 주로 파란색과 노란색, 빨간색과 초록색 등 서로 대조되는 색을 점묘법으로 조합해 이 장면을 연출했다. 체계화된 색의 구조뿐 아니라 마차의 일부가 화면 전면에 과감하게 배치된 스틸컷처럼 보이는 사진적 구도 또한 전통적인 회화 구성에서 벗어나려는 근대 회화의 변화를 보여준다.
5. 물결과 반영
전시의 마지막 섹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조르주 루오의 <신비로운 풍경>(1936)이다. 이 작품은 파리의 거리를 그린 것이라 하는데 마치 성화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두꺼운 윤곽선과 깊은 색채로 이루어진 화면은 인상주의의 밝은 풍경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만든다. 풍경의 묘사보다는 화면이 만들어내는 정서가 깊게 느껴지는 이 작품은 점차 인간의 내면을 향하게 되는 모더니즘의 흐름, 그중에서도 표현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전시 소주제 순서상 이렇게 되었지만 ‘인상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라는 전시 주제에 맞게 화가들을 배치해 본다면 르누아르→ 세잔→ 고갱→ 시냐크→ 루오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사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는 따로 있다. 막상 인상주의에 속한 적은 없으나 인상주의의 대부로 알려진 마네이다. 같은 연도인 1863년에 그려진 ‘풀밭 위에서의 점심’과 ‘올랭피아’는 처음에 공개됐을 당시 격분을 일으켰지만 이 그림이 내재하고 있는 현대성을 알아본 몇몇 화가들은 결국 미술사에서의 큰 변혁을 가져온다. 아마도 이러한 맥락을 의식한 듯 전시실 한 코너에는 마네에 대한 설명이 짧게 덧붙여져 있었다.
한 개인의 컬렉션으로 미술사의 흐름을 온전히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었겠지만, 이 전시는 인상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미술의 변화를 충분히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단순히 유명 화가의 작품을 모은 것이 아니라, 미술사의 흐름을 읽는 안목 속에서 컬렉션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는 ‘좋은 컬렉팅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자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