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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은 Aug 30. 2022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다

오은영의 '화해'를 읽고,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를 갖다.


공개적으로 이 글을 적을까 말까 몇 번을 망설였다. 쉽게 시작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도 부모에게 받았던 상처를 드러내는데 마음의 무거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고, 나의 삶의 이유인 사람들이지만, 그 안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두었더니 그것들이 곯아서 깊은 상처가 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아마도 오은영 박사님의 금쪽 상담소를 보면서 매번 눈물이 났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글을 적으며 나의 상처를 직접적으로 마주하고, 정말로 치유하고 싶었던 이유가 컸던 것 같다. 




잘 사는 젊은 부자인 연예인들을 부러워했었다. 저 젊은 나이에 저렇게 많은 부와 명예를 가지면 남부러울 게 없겠지? 행복하겠지?라는 생각을 잠깐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람마다 항상 사연은 있었다.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들이 금쪽 상담소에 나와 본인의 진짜 고민을 털어놓으며 치유받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었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연예인들도, 악플에 시달리며, 더 높은 목표를 향해,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에 사로잡혀 힘든 청춘을 보내고 있었다. 저렇게 얼굴이 노출된 연예인들도, 본인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박사님의 조언을 듣고 한 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데, 나도 내 상처를 직접 들여다보고 치유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오은영의 화해를 접하게 되었다. 나름 책 읽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는 데 정말 많은 시간이 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속 깊이 새기고 싶었고, 보면서 내 이야기 같아서 와닿아서 슬프기도 했고, 대신 위로를 받기도 했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가, 깊이 공감하기도 했다가, 나중에 나는 내 아이에게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기도 했다.




우리 아빠는 IMF를 겪으면서 잘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셨다. 그 사실은 훗날 스무 살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겨우 일곱 살이던 나는, 아빠가 왜 항상 다니던 회사에 나가지 않고, 낮에도 집에서 잠을 주무시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부모님의 싸움이 잦아졌던 것은. 철이 없던 어린 시절이라서 나는 그 당시 부모님이 왜 자주 싸우시는지, 우리가 왜 이사를 다녔는지, 아빠가 왜 낮에도 집에 계셨는지,, 그때는 잘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었다. 아마도 명절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그때를 기억에도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한동안 내 머릿속에서 잊혔던 기억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친할아버지 댁에만 가면 항상 술이 잔뜩 취하셨었다. 그날도 그랬다. 술이 잔뜩 취해서 엄마를 부르셨다. 엄마는 못 들은 채 하셨다. 그러자 이번엔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셨다. 옆에서 친척들과 엄마가 말씀하셨다.


'아빠 술이 잔뜩 취하셨다. 너도 자는 척해라. 못들 은척 해.'


아빠는 열 번도 넘게 내 이름을 계속 부르셨다. 그런데도 내가 못들 은척 하자 아빠가 본인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화가 잔뜩 나셔서 나에게 달려오시며 내 등을 발로 밟으셨다. 너무 놀라고 아팠다. 초등학생 때였는데, 몇 살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고, 계절도 기억나지 않지만 너무 당황했고, 많이 아팠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그 일은 우리 가족에게도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동생과 나와 엄마는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아빠가 나를 부르셨다. 나는 또 혼이 날까 봐 너무 무서웠지만 아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더 혼이 날 것 같아서 무서워서 아빠에게 가야만 했다. 그런데 아빠는 정말 예상 밖의 이야기를 하셨다.

'어제 아빠가 때린 데 많이 아팠지.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아직도 이 장면은 눈에 생생하다. 그때 내가 느꼈던 당혹감과 아빠에 대한 두려움. 그 당시 나에게 아빠는 두려운 존재였던 것 같다. 날이 밝은 대로 엄마는 곧장 집으로 내려가야겠다며 서둘러 챙겨서 우리를 데리고 나오셨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일 이후로 우리는 한 2년 간 친할아버지 댁을 방문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일이 있고 난 후였던 것 같다. 그 이후로도 아빠에 대한 두려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아빠가 무서웠다. 퇴근하시고 돌아오셔서 공부를 하고 있지 않으면 이유 없이 머리를 맞았다. 어느 날은 방이 너무 어질러져있다고 혼이 났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오시면 자는 척 연기를 했다. 깨어있으면 또 한 마디라도 들으면서 혼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때의 날들은, 우리들을 위해 열심히 사회생활하시면서 정말 힘들었던 날들 중에 하루였을 거라는 걸.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아빠에게 체벌을 받았다. 주말에도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면서 아침 7시까지 일어나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 했다. 하루는 울면서 아빠에게 하소연을 했다. '내 친구 부모님들 중에는 아직도 맞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고등학생인데, 아직까지 매를 맞는다는 게 말이 돼?' 다들 그렇게 크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너네 아빠는 정말 많이 엄하시구나. 아직도 매를 맞아? 하는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아빠를 처음으로 이해해보게 된 것은 스무 살이 되고 나서였다. 아빠가 처음으로 술을 한 잔 하자며 나에게 술을 알려주신다고 했다. 내 기억에 그때 아빠는 눈물을 보이셨던 것 같다. 아빠가 배웠던, 아빠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훈육을 하다 보니, 본인의 선택이 옳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고.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셨다. 스무 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빠가 나를 싫어하는 줄만 알았다. 매일 훈육으로 나를 키우셨고, 내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먼저 알려주셨다.

나중에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알게 된 사실인데, 친할아버지는 11살 즈음 아버지를 여의고 군인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너무 엄격한 할아버지 밑에서 크면서 아빠의 사랑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하고 자라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아빠라는 사람을 이해해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아이가 성장하는 데 있어서 아빠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경제적인 어려움이 한 가정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건지 경험하게 되었다.




자식은 부모에게 무엇을 잘해야만 인정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말을 안 들어도 공부를 못해도 부모는 자식을 인정해 주고 사랑해 주어야 하는 겁니다. 

99page 중에서


부모는 훈육의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는 그저 너무너무 무서워서 벌벌 떠는 공 포이 시간일 수 있어요. 저는 아이의 잘못을 때리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은 교육적 의미가 없다고 봐요. 때리는 것은 상처만 줄 뿐이에요.

130page 중에서


사실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진정 화해해야 하는 대상은 어머니가 아니에요. 아버지가 아니에요. 나 자신입니다. 미워할 수 없는 대상을 미워해서 받는 고통, 나의 내면의 고통, '어떻게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 그랬을까?' 하는 나의 처절함, 자신의 현재 마음 상태와 화해해야 하는 겁니다.

175page 중에서




사실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니도 내 아이에게 똑같은 부모가 될까 봐, 같은 상처를 주게 될까 봐, 이런 상처를 가지고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부모를 이해해볼 수 있었고, 부모에게 제대로 받지 못했던 사과를 책을 통해서 작가님께 위로받았고, 나의 마음과 화해하는 치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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