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버스에서 만난 어르신

어느 외래 진료 날

by 로은


벌써 작년이 된, 가을의 어느 외래 진료 날이다.


신약 주사를 맞기 위해 외래 주사실에서 대기하던 중 집에 내려가는 버스를 예매하려고 앱을 켰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금요일이라는 걸 미처 잊고 있었다.



좌석은 겨우 두 자리가 남아있었다.



간을 볼 겨를이 없다. 이마저도 금세 매진이 될까 싶어서 급하게 좌석을 예매했다.



사람이 많이 붐비고 차가 막히는 금요일은 가급적 피해서 진료 예약을 잡으려고 하지만 부득이하게 이번 달은 금요일로 예약을 잡게 되었다.


안 그래도 비까지 내리는 데다 빼곡하게 들어선 사람들 틈을 지나쳐 무거운 마음을 가득 안고 고속버스 맨 뒷자리에 탑승했다.



내 왼 편엔 할머니 한 분이, 오른편엔 할아버님 한 분이 탑승하셨다.


막 자리를 잡고 짐가방을 바닥에 내려둘 때 즈음 왼 편에 앉아계시던 할머님께서 내게 말을 건네셨다.



"아가씨도 차표 구하기 힘들었지. 좌석이 없었나 봐."



나는 당황했지만 얼굴을 마주 보고 대답을 했다.


"네. 저도 급하게 예약하느라 자리가 여기밖에 없었어요."



"나는 맨 뒤에는 생전 처음 앉아봐. 항상 앞에만 앉아봤지. 자리가 없어서 맨 뒷자리를 다 앉아보네"



외래진료를 다녀오면서, 혹은 요 근래에 내가 이렇게 처음 보는 타인과 스몰토크를 해본 게 언제던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극 내향형인 나에게는 처음 보는 타인과 웬만하면 말을 섞는 일이 잘 없다.



더군다나 항상 1인석만 앉았기에 나도 맨 뒷자리는 정말 오랜만이긴 했다.




나는 '내려가는 내내 내게 말을 거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그리고 조심히 주섬주섬 에어팟을 꺼내 귀에 꼽았다.


그렇게 유튜브를 보다 잠깐 잠이 들었고 차가 정차한 느낌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중간 휴게소에 도착해 있었다. 왼 편에 앉으셨던 할머니께서 내리려고 하셔서 비켜드렸다.



할머님께서는 와플을 하나 사들고 오셨다. 그런데 내게 와플 반쪽을 먹으라고 건네주시는 게 아닌가.


이걸 받아도 될까. 잠깐 고민하다가 내게 먼저 건네주신 성의와 장시간 이동으로 배가 고프기도 해서 덥석 와플 반쪽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받아든 와플을 한입 베어먹었다.


배가 고팠던 탓인지 와플이 너무 맛있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이렇게나 간사하다.



그 와플 반쪽에, 따뜻하고 정 많은 어르신이 되었다.



와플을 다 먹고 할머님께 한 번 더 인사를 드렸다.


"와플이 맛있어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님께서 기쁨의 화답을 하셨다.



"맛있지. 나는 여기 휴게소에 들르면 꼭 이 와플을 사 먹어. 이게 젤 맛있어."


그 대답에 나는 묘한 동질감과 함께 문득 우리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명절에나 한 번 겨우 찾아뵈었던 우리 외할머니의 식성을 나는 전혀 몰랐었다.


밥을 가장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던 우리 할머니가 실은 병원밥은 먹기 싫어하고 빵을 제일 좋아한다는걸.


전에 한 번 외할머니 보호 자격으로 옆에서 입원실을 지켰을 때 그때 처음 알았다.


시간이 조금 흘러 밖은 점점 어두워졌다. 할머님께서 언제쯤 도착하는지, 얼마큼 왔는지 내게 물으셨고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다 내게 어디 사는지를 물으셨다.


"무슨 동에 살아요?"


이런 걸 내게 왜 물으실까. 혹시 나보고 데려다 달라고 하시는 건 아닐까 하고 순간 고민했다.



"나랑 같은 동네사네~ ㅎㅎ"



속으로 아차 싶었던 순간, 할머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셨다.


"내가 차를 가져왔는데 비도 오는데 내가 데려다줄까? 집에 어떻게 가요?"


사람들을 경계하고 마음의 벽을 높게 치고 있던 내가 부끄러워졌던 순간이다.



​생각해 보면, 같은 방향이면 내가 집까지 바래다 드릴 수도 있는 일인데,, 그 와중에 혹시 나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시는 걸까 봐 내심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순간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차에 내려 할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주차해 놓은 자차가 있는 곳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할머님은 내가 가는 길을 계속 바라보고 가셨다.



내가 우리 외할머니가 떠올랐던 것처럼 할머님도 손녀 혹은 딸이 떠오르신 걸까.


가끔 이렇게 마음 따뜻한 이웃분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을 꽁꽁 숨기고 사는 내가 종종 부끄러워진다.



젊은 나도 한 번씩 외래진료 다녀오는 게 힘들고 버거운데 혼자서 힘들게 장거리를 이동하고 직접 운전까지 해서 집에 돌아가시는 어르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던 밤이다.



오랜 시간 타지 생활을 했던 경험도 있어 거의 십 년 넘게 고속버스를 타곤 했지만 이렇게 마음 따뜻한 옆자리 승객을 만난 건 처음이라 인상 깊었다.




새해에 어울리는 글은 아니지만

올해는 좀 더 열심히 브런치에 글을 올려보고자

업로드 해 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