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을 배워서 어디에 쓰지?
수와 수학은 다르다
고대 중국에서 수학 공부를 하려면 왕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왕의 허락없이 수학을 공부하면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시민들이 ‘수’ 자체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시민들은 자신의 땅이 몇 평인지, 해마다 왕에게 바쳐야 할 세금이 얼마인지 명확한 수치로 알았다. 이집트의 나일강은 해마다 범람하여 농지의 경계를 지워버리는데, 농부들은 관리들이 다시 구획한 농지가 범람 이전의 농지보다 작은지 큰지 정도는 비교할 수 있었다.
이른바 국가가 만들어진 이후에 시민들은 아마도 글을 몰라도, 더 나아가 말까지 몰라도 살 수 있었겠지만, 수를 모르면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도 산업화되지 않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문맹률은 상당히 높지만, 문맹 시민 대부분이 생존과 생활에 필요한 ‘수’만은 명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여기서 수는 숫자가 아니라 많고 적음을 따지는 수 개념이다.) 국가는 필연적으로 화폐를 만들어서 경제를 통제하는데 화폐 자체가 ‘수’를 상징하는 금속이나 종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화폐에 사용되는 ‘수’를 모르고 사회생활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수학을 가르치면서 학생에게나 심지어 학부모에게서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수학을 배워서 무엇에 쓰냐는 것이다. 그리스 문명의 대수학자인 유클리드가 수학의 쓸모를 묻는 제자에게 동전을 던져주며 내쫓았다는 일화가 전해오지만, 현대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면서 쓸모를 찾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학의 쓸모를 묻는 사람들조차 ‘수’ 자체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단지 미적분학이나 통계학을 일반 시민이 왜 배워야만 하는지 알지 못할 뿐이다.
맞는 말이다. 사실 시민에게 필요한 것은 ‘수’이지 ‘수학’이 아니다. 그리고 생존과 생활에 필요한 정도의 ‘수’ 지식은 부모에게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이 제도권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수준은 아니다. 백번 양보해서 세상이 많이 복잡해져서 알아야 할 ‘수’ 개념이 많아졌다고 해도 초등교육 6년이면 차고 넘친다.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에 따르면 수학적 능력은 운동 능력만큼이 타고나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고난도 수학 문제를 모두가 동등한 조건으로 풀어야 하는 것은 공평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중학교 수학 교육에서는 수의 기원과 그 역사적 배경을 가르치는 정도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고등학교 교육에서는 학생이 전공하고 싶은 분야에 필요한 수학적 지식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면 된다. 물리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미적분이라는 도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미적분을 몰라도 물리학을 공부할 수 있지만, 공식을 외우는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도 수학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을 나중에 후회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사회학을 전공하려는 학생은 반드시 통계학을 깊이 있게 배워야 한다. 통계학을 배우지 않아도 사회학을 공부할 수 있지만, 통계학을 알지 못하면 강력한 설득 논리와 통찰은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경제학을 깊이 들어가면 미적분, 행렬, 벡터 등을 언어로 사용한다. 공대 친구가 내가 듣던 계량경제학을 청강하러 왔다가 수학 시간이냐고 물었을 정도다.
수학의 쓸모가 아니라 수학 자체에 매력을 느낀다면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면 된다. 수학자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누구도 발을 디딘 적 없는 지적 영토에 씨를 뿌리고 그 씨앗이 어엿한 나무로 성장하도록 거름을 주고 벌레를 잡으며 보살핀다. 하지만 그 열매는 대부분 당대가 아니라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후에 열린다. 역설적으로 당장의 쓸모를 생각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 덕분에 인류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수학은 분명 쓸모있는 학문이지만, 현 시점에서 미래의 내가 수학을 도구로 사용하는 삶을 살지 그렇지 않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지금 수학을 공부하라면 지나친 요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