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때 이 영화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비 내리는 밤의 어느 대저택, 3층에서부터 수직으로 내려온 카메라가 거실을 지나 창밖을 주시한다. 의문의 검은 남자들이 창밖에서 기웃거리더니 문을 열려는데, 카메라는 이를 따라 순식간에 열쇠구멍 안으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온다. 다른 입구를 찾으려는 듯 자리를 뜨는 남자들. 카메라는 커피포트 손잡이 사이를 유령처럼 통과하며 거실을 가로지르고, 입구를 찾아 분주히 움직이는 한 남자를 따라 저택의 꼭대기를 향해 상승한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 <패닉 룸>의 초반부 롱 테이크 장면이다. 저택에 숨겨진 거액의 채권을 훔치기 위해 찾아온 도둑들이 집 내부로 잠입하는 과정을 그린 이 장면은 마치 기체와 같은 유려한 카메라 워크로 탄성을 자아낸다. 지금이야 교묘한 편집 기술로 여러 쇼트를 이어 붙여 하나의 롱 테이크 쇼트로 만드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지만, 당시 비디오 테이프로 영화를 감상하는 어린이였던 내게 이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와, 이런 장면은 도대체 어떻게 찍은 거지?’ 영화를 보며 느낀 감상이 고작 ‘재밌다’, ‘재미없다’ 정도로 나뉘었던 내게 최초의 의문이자 다른 차원이 의미가 생성된 것이다.
<패닉 룸>을 본 이후로 나는 카메라 뒤에서 자신의 ‘의도’를 가지고 현장을 지휘했을 ‘감독’의 존재를 처음 인식하게 되었다. ‘나도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게 그즈음부터였다. 그 뒤로 온갖 영화 잡지와 관련 서적을 섭렵하고, 작법서를 독파하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 친구 한 명을 꼬드겨 캠코더를 번갈아 들어 가며 우리 두 사람이 주연인 단편영화를 찍었다. 제목은 <근접조우>로, 우연히 외계인이 남긴 문양을 발견한 두 친구가 그 흔적을 쫓아 외계인을 찾아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영화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허접한 영상물이었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 각종 공모전에 출품하곤 했다.
영화에 뜻을 품게 되자 고민이 뒤따랐다. 소심하고 내향적인 내가 영화감독이 될 수 있을까? 첫 영화야 친구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만들어 냈지만, 이후 수십 명의 스태프가 나를 주시하는 현장에 놓인다면 그땐 어떡하지. 그렇게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그동안 영화만큼 나를 가슴 뛰게 만드는 게 또 없었으니, 일단은 영화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일에는 딱히 흥미도, 재주도 없었으므로 별 수 없었다.
류승완, 폴 토마스 앤더슨 등 숱한 유명 영화감독들이 영화과를 나오지 않았거나 정식으로 영화를 배워 본 적도 없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처럼 유능한 감독들의 존재가 때로 대학 영화과의 존재 가치에 의문을 품게 만들기도 하지만, 나는 영화과를 다닐 수 있었던 게 굉장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계에 발 들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게 무작정 상업영화 현장을 찾아가 막내 스태프부터 점차 그 지위를 높여 가는 전통적 도제 방식이 전부였다면, 나는 일찌감치 겁을 먹고 영화를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학교라는 시스템 안에서 비슷한 꿈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 제멋대로 영화를 만들고, 보기 좋게 실패해 보는 경험을 반복했던 것이 내게는 ‘영화감독 되기’의 두려움을 조금씩 깨부수는 훈련이 되었다.
친구들과 영화를 만드는 경험은 굉장히 유쾌했다. 주연 배우들 역시 영화과 동기이자 친한 친구들로 캐스팅 했다. 지금과 달리 정말 아무것도 모를 때였기에, 즉흥적이고 실험적인 아이디어를 과감히 시도할 수 있었고, 그게 꽤 볼만한 결과물로 나왔을 때의 성취감이 대단했다.
그렇게 워크숍 작품으로 만든 내 단편영화를 수업 시간에 틀었을 때, 함께 웃고, 놀라고, 박수치며 즐기는 동기들을 보며 온몸이 벼락을 맞은 듯 찌릿찌릿했다. 나는 살면서 그렇게 큰 전율과 희열을 느껴 본 적이 없었고, 이 경험은 내가 평생 영화를 만들고 싶은 이유로 남았다. 그날 이후 내가 만든 모든 영화는 그때의 기분을 다시 느껴 보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시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편한 친구들과 영화를 찍을 수만은 없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낯선 선후배들과 함께 작업할 기회가 생기고, 때로는 지인보다 모르는 얼굴이 더 많은 현장을 이끌어야 하는 부담을 안았다. 그러나 학교 작품을 하면서 나도 모르는 새에 경험이 쌓이고 담력이 길러진 덕분인지, 많은 사람들과 공동 작업을 하는 것이 어릴 적에 상상하던 것만큼이나 겁나고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졸업 후에도 계속 영화를 만들어 나갔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데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찍고 싶다’는 최우선 목표가 있지만, 그 아래엔 ‘유명한 영화제에 초청받고 싶다’, ‘많은 관객들에게 인정받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이 깔려 있다. 볼만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임을 확인받고 싶어서, 웃고 박수치는 관객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나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성취가 쌓여 갔지만, 영화를 함으로써 내가 얻은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단편영화는 영화 관련 기관이나 사업의 제작지원을 받지 않는 이상 대부분 연출자의 사비로 만들어지는데, 그 부담을 안고서 영화 제작에 뛰어드는 행위에는 어딘가 자학적인 데가 있다. 일반적으로 회사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그 책임을 맡은 이가 월급이나 성과급을 대가로 주어진 업무를 하는데 비해, 단편영화 감독은 스스로에게 프로젝트를 던져 주고, 이를 위해 자기 돈을 내다 버린다. 설령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마친다 해도 그 막대한 투자금이 돌아오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남는 거라곤 일부 영화제에 초청받는 찰나의 영광과, 필모그래피에 추가할 수 있는 글 한 줄뿐이다.
이것이 ‘상업영화 감독 데뷔’라는 코스로 나를 안내할 거라는 환상은 갖지 않는 게 좋다. ‘미쟝센 단편영화제’가 존재하던 시절에는 이곳에서 눈에 띄는 작품을 선보인 소수의 감독들이 상업영화 데뷔 제안을 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지만, 이 역시 먼 과거의 얘기다. 이처럼 단편영화 감독들은 지극히 상식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굳이 그렇게까지?’ 싶은 일을 위해 스스로를 고행에 빠뜨리는 존재다.
(최근작이 제작비 일부를 지원받은 것을 제외하면) 학교 졸업 후에 만든 영화들은 모두 내 사비로 제작되었다. 제작비로 큰돈을 덜컥 써버리는 행위는 그것이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만큼 겁나는 일이었지만, 때로 묘한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엽기적인 그녀>의 곽재용 감독은 무명 시절 자신의 영화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기 집 대문을 떼어다 철공소에 팔았다는데, 나도 모든 걸 털어서 영화를 만든 경험쯤은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에 스스로가 못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지독히 내향적인 성격 탓에 지인들과 교류가 별로 없고, 집밖에도 잘 안 나가고, 그러니 인생에 재미난 경험이랄 게 드문 내게, 영화를 만든다는 건 내 힘으로 겨우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특별한 모험이다. 모험의 여정 속에서 나는 기꺼이 사람들과 부대끼고, 선장으로서 키를 잡고 배를 몰아 보물섬을 찾아야 한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나는 최소한의 사회성을 갖추고 멀쩡한 척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역시 영화 하길 잘했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뒤통수를 구경할 때, ‘영화 재밌게 잘 봤습니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사람들을 만날 때, 스태프와 배우 등 영화로 맺은 인연을 다시 만나 웃는 얼굴로 지난 작업을 회상할 때가 그렇다. 이 모두가 영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얻을 수 없었던, 인생의 소중한 자산이다.
비록 내 20대를 바쳐 모은 월급과 퇴직금까지 대부분 제작비로 탕진해 버린 지금이지만, 그것이 조금도 후회로 남지 않는다. 글쎄, 언젠가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신세가 된다면 조금은 후회할지도? 다만 이렇게나마 내 신세를 긍정할 수 있을 때, 그 감흥을 기록해 두고 싶다. 영화를 통해 얻는 성취와 경험을 언제나 되새길 수 있도록. 그렇게 더 나은 영화감독이자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