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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수빈 Mar 10. 2024

역시 난 틀리지 않았어

틀린 건 너희들이었지.

  나는 선천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논쟁하는 게 싫다. 때문에 웬만하면 논쟁할 일을 만들지 않는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논쟁을 ‘피한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회피형 인간인 나는 연애 문제에 있어서도 ‘결혼’이나 ‘동거’와 같이 논쟁의 소지가 있는 주제가 수면 위에 떠오를 때면 그 즉시 화들짝 물러나 진심을 어물쩍 가리려 하곤 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논쟁을 싫어한대도 남들이 논쟁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논쟁은 대게 아주 사소한 것에서 불붙기 시작한다. ‘사람이 저런 걸로도 싸울 수가 있나?’ 하고 어리둥절해하는 나 따위는 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서로가 옳고 그름을 따져 묻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굉장한 피로를 수반한다. 그냥 한마디 져 주면 그만인데, 그게 뭐 그리 어렵다고 저렇게들 고통받는가.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실은 상당한 고집쟁이라서, 내가 옳다는 걸 확인했을 때 ‘거 봐, 내가 맞잖아!’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가 어렵다.


  어느 단편영화를 준비하던 때였다. 메인 스태프들의 제작 회의가 있던 날, 나는 촬영을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두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운용하고 싶다는 의견을 밝혔다. 한정된 시간에 반해 많은 분량을 찍어야 하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최선의 대안이었다. 하지만 PD의 생각은 달랐다. 두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쓴다고 해도 카메라의 위치, 그로 인해 발생하는 조명의 제약 등 문제로 결국 내가 원하는 효과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었다. ‘정말 그런가? 아닌데... 내 말대로 하면 문제없을 거 같은데...’

  물론 PD의 생각도 일리가 있었다. 카메라를 한 대만 사용하기로 했을 때, 여유 비용으로 보다 좋은 기종의 카메라를 대여할 수 있는 등 분명한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나는 두 대의 카메라를 쓰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게 당시의 내게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B캠 촬영감독까지 추가로 섭외해 촬영은 진행되었고, 결국 예정했던 시간을 꽉꽉 채우고도 조금 넘겨서야 모든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카메라 한 대로 찍었더라면 결코 소화할 수 없는 스케줄이었던 것이다. 결국 내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한 거나 마찬가지였고, 나는 그 이후 PD를 찾아가 “그때 내 말이 맞았지?”라고 거들먹거리고 싶은 걸 참느라 입이 근질거렸다.


  영어회화 학원을 다닐 때의 에피소드 하나. 수업이 한창 진행되던 때, 문득 선생님이 ‘정신과 의사’를 지칭하는 영단어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대여섯 명쯤 되는 학생들이 모두 답을 몰라 입을 꾹 닫고 있던 중에, 내 머릿속을 번뜩 스쳐가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아, 이거 영화나 미드 좀 본 사람이면 꼭 한 번은 들어 봤을 단어인데...’ 그렇게 우쭐한 마음으로 답을 내놓았다. “쉬링크(Shrink)”. 그러자 선생님과 학생들이 동시에 유쾌하게 웃어 대기 시작했고, 나는 그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왜? 쉬링크 맞는데...?’

  선생님이 유도했던 답은 ‘psychiatrist’였다. 창피함과 억울함이 쌍으로 밀려오던 중, 맞은편에 앉은 한 학생이 내게 알려주겠답시고 건넨 말이 나를 더 분통 터지게 만들었다. “쉬링크는 얼굴 리프팅 할 때 쓰는 걸 쉬링크라고 하는 거예요.”

  나만 빼고 한바탕 웃고 나서 언제 그랬냐는 듯 수업이 진행되었지만, 나는 좀처럼 배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걸 그냥 넘어가, 말아?’ 속 좁은 인간이 된다 해도 이 한 몸 억울함을 풀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쉬는 시간에 ‘shrink’를 검색해 선생님께 보여 드렸고, 그것이 정신과 의사를 지칭하는 속어임을 기어이 증명하고 말았다.

  “아, 그래서 아까 ‘쉬링크’라고 했구나.” 선생님의 반응은 거기서 끝이었다. 좀 전의 사태가 정정될 것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참으로 싱겁기 그지없는 반쪽짜리 승리일 뿐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나는 한동안 영화나 드라마에서 ‘쉬링크’라는 단어를 접할 때면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그때 그 영어학원 사람들에게 달려가 소리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이것 좀 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었어!”


  그러고 보니 논쟁하는 과정의 너절한 감정 소모를 싫어할 뿐, 지기 싫어한다는 점에서는 나 또한 다른 이들과 다를 게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직접 부딪히는 걸 꺼리지 않고, 나는 뇌 내 시뮬레이션 속 승리를 반복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일 뿐. 사실 이 구구절절한 글 역시 그때의 내가 옳았음을 재증명하고픈 옹졸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무릇 성숙한 인간이라면 잘못을 깨끗이 사과할 줄 알아야 하는 만큼, 틀린 걸 틀렸다고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틀렸음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순전히 자존심을 구기고 싶지 않아서, 혹은 끝까지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에.

  지금껏 내가 틀리지 않았노라고 확신했던 이야기들을 늘어놓았지만, 언젠가 사소한 실수를 하거나, 참담하게 실패한 뒤 내가 틀렸음을 인정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의 나는 부디 비겁함 없이 깨끗하게 인정할 줄 아는 인간이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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