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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수빈 May 30. 2024

반감은 나의 힘

삐딱한 마음에 대하여

  나는 원체 마음이 모난 사람이라서, 세상사 온갖 것들에 불만과 반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부모님, 학교, 군대, 유행, 관습, 시스템 등 부조리하거나 틀렸다고 생각한 것들, 또는 너무 뻔하고 유난스럽다고 느낀 것들을 차례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나의 이런 태도는 종종 그 대상과 충돌을 빚어 삶을 쓸데없이 피곤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때로는 불시에 영감을 선물해 주기도 하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도록 등을 밀어주는 힘이 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떠올렸던 쓸 만한 아이디어들 중 다수는 이러한 삐딱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선생들은 대체 왜 저럴까?’, ‘레트로의 유행은 언제쯤 끝나는 거지?’, ‘예술 한다는 인간들이 왜 고작 저따위로 굴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사랑에 목을 맬까?’

  누군가 내 생각을 읽었다면 참 ‘정 떨어진다’고도 느꼈을 법한 마음. 그런데 거기서 냉소적이지만 재밌는 대사가 나오기도, 시나리오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를 발견하기도, 나 스스로를 꾸짖는 뜻밖의 성찰을 만나기도 한다.


  때는 2018년, 당시는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으로 수많은 남성 예술가들의 성범죄 사실이 연이어 폭로되던 시기였다. 그즈음에는 ‘예술가의 인성과 그의 작품을 분리해서 평가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많은 논의가 오갔었는데, 나 또한 그가 만든 일부 작품을 꽤 인상 깊게 보았던 예술가가 추악한 성범죄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생각이 복잡해졌다.

  어느 날 지인과 수다를 떨던 중 케이시 애플렉 주연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화두로 떠올랐다. 영화를 먼저 본 그가 작품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지만, 작품 자체에 대한 세간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거 두 명의 여성 스태프를 성추행한 사실이 있는 배우가 주연했기에 영화를 보기가 꺼려진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에이, 그건 별개의 문제고!”

  정말 그럴까. 나는 딱히 그 순간 반박할 논리가 없어 “그런가...” 하고 말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것이 다소 안일하고 게으른 생각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감상했다. <유 캔 카운트 온 미>를 연출한 케네스 로너건의 작품인 만큼 그 만듦새는 썩 훌륭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케이시 애플렉의 성범죄 사실이 떠올라 도무지 캐릭터의 감정에 동화될 수가 없었다. 저 안쓰러운 캐릭터를 그럴 듯하게 연기하고 있는 배우가 스크린 뒤에서는 무슨 짓을 저질렀던가. ‘예술가의 인성과 그의 작품은 별개의 문제’라는 목소리가 참으로 무색해지는 경험이었다.


  일반적으로 독립영화가 ‘영화 만드는 사람들’을 그리는 태도에는 일견 낭만적인 데가 있다. 여러 모로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영화를 만들어 가는 영화인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 같은 것. 그런데 이마저도 삐딱하게 보이는 나로서는, 영화 제작 현장의 그림자는 무시한 채 ‘이토록 고생스럽지만 영화의 꿈은 놓지 않는 나’에 대한 연민에 빠져 스스로를 위로하는 데 그치는 일부 영화들이 일종의 자기기만으로 느껴졌다.

  나의 여덟 번째 연출작 <과정의 윤리>는 그러한 문제의식과 반감으로부터 출발한 이야기다. 단편영화 촬영을 앞두고 대본 리딩을 위해 한자리에 모여든 7명의 스태프와 배우들. 그 속에서 움튼 사소한 의문과 갈등으로 인해, 사람들은 점차 영화 제작 과정에 숨겨져 있던 불편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 ‘영화’라는 게 뭐 별건가? 아무리 위대한 거장이니, 영원히 남을 걸작이니 해도 결국 우주적인 관점에서는 한낱 미세먼지에 불과한 것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 신성화시켜온 것이 아닐까.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동료 스태프들이 불합리함을 감내하고, 마음에 생채기가 나도 좋을 만큼 영화가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대상일까.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밤샘 노동, 젠더 감수성 결여, 임금 차별, 위계, 폭언 등 영화 제작 현장에서 겪을 수 있는 갖가지 문제와 부조리를 종합적으로 꼬집으려 했다. 이제는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야 될 때라고 외치고 싶은 욕구, ‘영화’라는 것을 낭만적인 대상으로만 해석하는 시선에 대한 반감이 이번에도 창작의 불씨가 된 셈이다.


  언제부턴가 책을 읽을 때면 ‘인생에는 절대적인 의미도, 목표도 없다’는 통찰을 설파하는 문장을 종종 만나게 된다. 시적인 감흥을 안겨주는 영화도, 심지어 어느 과학 관련 유튜브 영상도 인생의 무상함과 ‘의미 없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이것이 오랜 시간 속에서 스스로 힘겹게 깨달은 해답이라고 믿어왔는데, 지금은 하도 이 같은 말이 보편타당한 진리처럼 공유되는 마당이라 괜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또한 ‘욜로’라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단어처럼 잠깐의 유행 현상 같은 태도일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하다하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도 반감을 느끼는 것이다.


  과거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종교, 사랑, 가족, 꿈, 행복 등으로 정의했고, 현대인은 삶에 그러한 절대적인 의미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지? 어디선가 물음표를 채울 어떤 물결이 저 멀리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닐까. 미래를 내다볼 순 없으니, 일단은 나 역시 무의미의 바다에서 힘을 아껴 둥둥 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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