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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수빈 Jun 06. 2024

Not a flying toy

날 수 있는 장난감이 아닙니다.

  영화 <토이 스토리>의 주인공들 중 하나인 ‘버즈 라이트이어’는 자신이 ‘우주 특공대원’이라고 믿으며 다른 장난감들과 자신을 분명히 구분 짓는다. 주인 ‘앤디’의 관심과 사랑을 빼앗아 간 버즈가 미워 죽겠는 ‘우디’가 ‘너 또한 우리와 같은 장난감일 뿐’이라고 소리쳐 보지만 버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려 장난감을 괴롭히는 악동 ‘시드’의 집에 갇혀버린 버즈는 그곳에서 탈출하던 중 우연히 TV에서 흘러나오는 광고를 보게 되고,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다. 자신의 존재가 우주 특공대가 아닌, 그저 어린이들의 유희를 위해 만들어진 플라스틱 장난감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던 버즈는 열린 창문 밖으로 활공하는 새처럼 하늘을 날아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려 한다. ‘Not a flying toy(날 수 있는 장난감이 아닙니다).’ 장난감 광고 하단에 조그맣게 적혀 있던 문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장엄한 시도. 플라스틱 날개를 양옆으로 뻗은 버즈가 힘차게 도약해 보지만, 아주 잠시 공중을 유영하던 그의 몸체는 이내 초라하게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다. 


  유년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내가 이 영화를 그토록 오랜 시간 애틋하게 사랑해 온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장난감이 살아 움직인다’는 반짝이는 아이디어, 지금 기준으로 봐도 썩 훌륭한 기술적 완성도, 감동적인 스토리텔링, 개별 캐릭터들의 개성 등 이 영화의 장점이야 일일이 나열하기도 번거로울 정도지만, 무엇보다 버즈라는 캐릭터가 가진 고유의 특성이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무언가와 깊게 공명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우주 특공대원이다. 나는 저 장난감들과는 다른 존재다.’ 진실을 깨닫기 전에 버즈의 마음 한편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을 그 자의식 말이다.


  언젠가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보게 된 힙합 프로그램 속 출연자들을 통해 나는 자연스레 ‘자의식 과잉’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스스로가 한국 힙합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꿔 버릴 천재라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듯한 얼굴로 인터뷰 하는 이들을 보며 괜스레 민망해지다가도, 문득 뜨끔한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내 삶의 역사를 돌아보면, 나 역시 자의식 과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소비하는 장르의 음악이나 영화가 보다 우월하다고 믿었고, 젊은 치기에 마음만 먹으면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여겼고, 내 눈에 평범해 보이는 것들을 내 멋대로 비웃고 깔보았던 시기. 특히 영화과 신입생 시절에 그 자의식은 감히 끝을 모르고 치솟았는데, 학과 동기 혹은 선배들이 만든 작품을 내 잣대로 평가하며 알량한 우월감의 먹이로 삼았던 부끄러운 기억이 잔인하리만치 생생하다. 

  그러나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그 사이 나와 비슷하거나 적은 나이에 훨씬 대단한 성과를 내는 사람들이 각계각층에서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지켜봐 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내 위치나 가진 재능의 크기를 어느 정도 객관화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동안 믿어 왔던 것처럼, 혹은 그렇게 바라 왔던 것처럼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버즈는 결국 자신이 장난감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우주 특공대원이 아닌, 단지 조금 더 ‘쿨’ 한 장난감일 뿐인 자신을 사랑해 주는 앤디와 친구들이 있으니까. 시드의 집을 탈출해 앤디와 친구들을 향해 날아가던 버즈와 우디는 등 뒤에 묶인 로켓형 폭죽에 의해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공포에 질려 안절부절못하는 우디와 달리, 버즈는 웬일인지 어떤 확신을 가진 얼굴이다. 그리고 비로소, 다시 한 번 그의 플라스틱 날개를 펼쳐 푸른 하늘을 활공한다.


  “우린 나는 게 아니야. 그냥 폼 나게 떨어지는 거지.”


  이 영화를 족히 수백 번 돌려 본 내게 이런 의문이 남는다. 버즈는 그 순간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자신할 수 있었을까? 한계를 인정하고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숨겨져 있던 내 안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인 걸까?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을 알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왠지 왈칵 울고 싶어진다.


  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뜻밖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 모두가 우주의 관점에서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물리학적 진실. 온 마음으로 동경하고, 때로는 질투해 마지않는 그 어떤 대단한 예술가와 그의 작품도 결국 무심한 시간의 흐름 속에 바스러질 부질없는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나의 애매한 재능을 위로하는, 혹은 격려하는 어떤 문장보다도 더 큰 의지를 안겨준다.


  조금은 ‘정신 승리’에 가까운 체념으로 생각을 정리했지만, 나 또한 언젠가 내게 달린 플라스틱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예를 들면 몇 년 후 내가 연출한 장편영화로 선댄스 영화제에 초청되는 영광을 누린다던지. 자의식을 내려놓고, 그저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날 수 있음을 확신했던 버즈처럼 나 역시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의연하게 미소 짓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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