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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윤제 Nov 13. 2023

《에움길》

개인적으로 ‘에움길’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굽은 길 또는 에워서 돌아가는 길’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숲길』에서 쓴다. 각각의 인간(사유가)에게는 “그때마다 오직 하나의 길만이 그 자신의 길로서 지정(할당)되어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길로 걸어가면서 그가 내디뎠던 발자취를 언제나 다시금 되돌아봐야 하고 그러면서도 앞으로 걸어가야 할 그 길을 향해 부단히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내 생각도 그와 비슷하다. 삶이란 어디로 향할지, 언제 도착할지도 모를 저 ‘에움길’을 오롯이 걸어가는 것 같으니.  


칸트가 말하길, 인간을 포함한 “이성적인 존재가 천성적으로 반드시 갖고 있다고 확실히 가정할 수 있는 한 가지 목적”은 바로 ‘행복’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무엇이 자신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줄지는 어떤 원칙으로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야 할 테니까(『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결국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경험(내용)’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독일어로 경험은 ‘Erfahrung’이다. 단어의 앞부분을 이루는 전철 ‘er-‘는 주로 ‘시작부터 완성까지’를 가리키고, ‘Fahrung’은 ‘(어디로) 가다’를 의미하는 동사 ‘fahren’의 명사형이다. 결국 “경험’이란 무언가를 통해(의해) 주체가 나아간 궤적 또는 행로와 같은 말인 셈이다. 그러므로 경험의 축적이 ‘에움길’의 형태를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경험’, 그러니까 에움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인간이 언제나 ‘행복’을 마주하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 그 반대인 경우가 태반이다. 에움길에는 언제나 고난과 슬픔, 회의와 좌절, 그리고 권태라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하물며 헤겔은 [인간 영혼이 진리를 파악한 정신으로 거듭나기 위해 부단히 나아가는] 저 길을 “회의의 길로, 더 정확히는 절망의 길”로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에움길의 끝에서 돌이켜보면 봤을 때, 궤적에 올라탄 시점의 느낌과 정반대 되는 결과를 도출할 때도 있다. 과오는 —물론 종종 트라우마가 되어 사람을 불구로 만드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대부분 추억으로 미화되기 마련이다. 결국 “지나간 시간이 문득 하나의 전체로 드러나고 눈부시도록 명확하게 완성된 형태를 이루는 것은 마지막 순간(사랑의 마지막, 인생의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다.”(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그래서 헤겔은 철학에 ‘자신의 시대를 사유로 포착할 것’을 과제로 부여하면서도 —  유명한 『법철학』 서문의 명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 녘이 지나면 날개를 편다”가 가리키듯— 철학이 그 과제를 시작하는 때는 한 시대의 ‘에움길’이 거의 완성되었을 무렵이다. 이 무렵에 다다른 철학자만이 사태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길을 향해 부단히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리라. 판단은 그 이후에 해도 전혀 늦지 않느니 ······.


따라서 경험을 축적해 가는 과정 중, 당시에는 과오처럼 느껴졌던 선택과 실수들을 종종 다시 돌이켜 봐야만 한다. 그리고 마치 틀린 길처럼, 그리고 빙 둘러가는 것처럼 느꼈던 길들이 사실은 옳은 길이 아니었는지를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 내가 지금 · 여기 있기 위해서는 그 지나간 순간들이 모두 다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는지를.


어쩌면, 구원은 신이 아니라 저 에움길을 돌이켜 보는 ‘시선’에서 오리라.


“지나간 과거를 구원하고, 모든 “그러했다.”를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바꾸는 것, 바로 이것을 나는 구원이라고 부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孫潤祭, 2023.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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