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약한 것‘과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약함’ 자체는 인간을 구성하는 일부이며, 보편적인 속성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굳이 영웅이나 성인이라는 범주를 만들어 낼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 인식과 용기의 문제로써 자신의 취약점과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한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거나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는 성장과 발전이라는 강해짐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나약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종교의 영토는 바로 저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가장자리에서부터 펼쳐지기 시작한다. 유약하고 유한한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너머에 자신보다 유능한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가정하거나 세우는 일. 이것이 바로 종교의 본질이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집의 무너진 담벼락으로부터 기인하는 두려움과 고통, 혼돈과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거나 제거하기 위한 보강 작업의 시작점이라고. 이미 무너진 담벼락을 다시 세우는 일이 곧 종교적 실천이다. 종교적 실천은 개인과 공동체에게 중요한 정서적, 심리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실천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 방식은 신 혹은 신의 대리인인 사제에게 모든 것을 위탁하는 수동적인 방식이다. 이는 신앙의 대상에 대한 순종과 믿음을 토대로 신이나 사제의 지도 하에 신자들이 그들의 삶을 인도받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때 종교적 교리와 의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두 번째 방식은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목표로 수행하는, 보다 능동적인 방식이다. 개인의 내적 여정과 자기 성찰을 중심으로 신적인 진리나 깨달음에 도달한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경험과 수행이 결정적이다.
어찌 보면 각기 다른 종교들을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은 신의 모습이 아니라 저 종교적 실천 방식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종교들 사이에 존재하는 신의 개념은 상당히 비슷한 특성(전지전능, 창조, 영원, 불가해성 등)을 공유하기 때문. 즉, 각각의 신은 ‘최대치의 고유명사’라는 점—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 무언가(누군가)를 신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을 전제로 했을 때 대체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반대로 각 종교의 실천 방식, 즉 어떻게 신앙을 삶 속에서 구현하고 표현하는가는 종교마다 크게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기도, 명상, 의식, 사회적 행위, 윤리적 규범 등은 각 종교마다 다른 형태와 중요도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종교의 신뿐만이 아니라 종교적 실천 방식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신자들과 신 혹은 신성한 것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 즉 그 종교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무교(종교를 가지지 않는 것)와 무신론(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는 단순히 종교나 신에 대한 유보적인 부정이 아니어야 한다. 또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유한하거나 유약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어야만 한다—만약 그렇다면, 그 자신이 종교이자 신이 되어야만 할 것이므로, 자신이 무교이자 무신론자라는 전제는 모순이 된다.
정리하자면 무교/무신론자들은 자신의 나약함(한계)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무너진 담벼락을 그대로 두는 대신 종교와 신이 아닌 다른 벽돌로 메워야만 한다.
이때, 구하기 쉬운 다른 벽돌은 인간의 자율성과 합리성과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의 과학이다. 과학은 ‘사실’을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로써 구축된다. 하지만 우리는 현대과학이 전제를 유념해야 한다. 즉, ‘영원한 진리는 없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과학이 언제라도 새로운 발견과 이해에 따라 기존의 진리가 뒤집힐 수 있다는 가정 위에 건설된 모래성이라는 ’사실‘이다.
니체는 ’무엇인가를-참으로-가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규정한다(『권력에의 의지』, §15). 이 규정이 참이라고 가정했을 때, 과학은 여전히 ‘믿음’에 기반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학은 개방적이고 변화하는 지식의 체계라는 자신의 이점을 바탕으로 기존의 오만한 종교가 만고불변하는 ‘확신’으로 차지했던 자리를 꿰찼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과학이 일으킨 쿠데타의 무기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오류‘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였다.
다시 말하지만, 종교의 본질은 유약하고 유한한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너머에 자신보다 유능한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가정하거나 세우는 일이다. 종교적 실천은 그 너머로 나아가려는 도구와 행위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과학이 인간의 취약성을 지식을 통해 보강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제공하는 데에 기여하고자 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종교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과학은 종교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저 대체할 뿐이다. 간판만 바꾼 같은 가게일 뿐이다.
결론이다. 종교는 유약한 인간과 함께 쌍둥이처럼 세상에 태어났다. 종교는 단순히 가지거나, 가지지 않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즉, “소유(Haben)란 없다. 다만 하나의 존재(Sein)가 있을 뿐”(프란츠 카프카)이다. 달리 말하자면, 종교는 그 자체로 실존적이다.
따라서 종교를 인간의 쌍둥이 형제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부인하느냐. 그것이 종교와 인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유일한 문제다.
추신. 철학자 헤겔이 종교를 절대정신에서 배제하지 않는 이유를 이러한 종교의 실존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孫潤祭, 2023. 1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