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재’가 최근 큰 화두로 떠올랐다.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은, 또는 처벌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범죄자’에 대해 응징의 필요성을 느끼는 듯하다. 사실 사적 제재는 그렇게 거창한 일도 아니고, 최근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우스개로 많이 언급되는 ‘법보다 주먹이 먼저다.’라는 관용어구는 사적 제재의 유구한 역사를 보여준다.
내 가족에게 상처입힌 범죄자에게, 내 인생을 망가뜨린 범죄자에게 내가 느낀 고통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일. 단편적으로 생각했을 때 우리네 감정에도 부합하고, 범죄 예방과 범죄자 갱생에도 용이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사적 제재를 금지하고 있다. 피해자로서는 참으로 분통 터지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적 제재의 방점은 ‘사적’ 부분에 있다. 처벌의 주체를 국가로 한정하는 현대의 법과 달리 처벌의 주체가 ‘사인’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처벌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사인’의 범위를 먼저 정해야 할 텐데,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사적 제재의 상황을 보면 굳이 제한된 것 같지 않다. 지나가다 사연을 들은 이가 기분이 나쁘면 갑자기 처벌의 주체로 전환되는 구조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더 복잡한 문제를 일으킨다. 처벌이 집행되기 위해서는 ‘처벌이 이루어져야 할 일인지 여부, 처벌의 정도’ 등을 결정해야 한다. 각자가 각자의 판단으로 처벌 여부를 결정하고, 그 처벌 정도 또한 결정하여 각자의 취향대로 집행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사적 제재는 필연적으로 기준이 부재할 수밖에 없다. 처벌을 집행한 사인은 본인 감정에 꼭 맞는 적절한 집행을 했다며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집행을 당하는 상대방으로선 그러한 ‘각자 적당하다고 여긴 기준 없는 집행’을 집행자의 숫자대로 곱한 값의 처벌을 받고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을 것이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숫자로 생각해 보자. 타인에게 5만큼의 피해를 준 범죄자가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판단에서 2~7 사이의 처벌을 내렸고, 그 처벌자는 10명에 이른다. 그렇게 그 범죄자는 50의 피해를 처벌로 받게 된다. 이때 ‘타인에게 5만큼의 피해를 준 범죄자’와 ‘범죄자에게 50의 피해를 준 10명의 처벌자’ 중 누가 더 나쁜 사람일까? 과연 10명의 처벌자가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며 발 뻗고 잠들어도 되는 것일까?
물론 나도 멀쩡히 살아가는 중범죄자들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끓어오르는 분노로 한 사적 제재는 상술한 바와 같이 필연적으로 새로운 법익을 침해하고, 어느덧 나 또한 그 범죄자와 같은 사람이 되어 있다.
안타까운 범죄 피해를 발견하고, 충분치 못한 처벌에 부조리함을 느낀 우리가 할 일은 첫째로는 피해자 보호 및 복지이며, 둘째로는 국가에 대한 요구이다. 처벌 권한을 가진 자를 질책하고, 처벌 범위 결정을 업으로 하는 자들을 문책해야 한다.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다.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면 내 밑에서 일하는 실무자를 호되게 질책하고, 심한 경우 담당자를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