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물질과 붉은 장식, 샴페인

차가움은 위로를 주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저녁. 기차역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발은 젖고 무거워 검은 메르세데스 S450의 보닛 위에서 이내 사라지고 있었다. 조수석에 몸을 싣는 순간, 나는 어떤 냄새에 붙잡혔다. 새 차 냄새. 가죽과 합성 소재가 만들어내는 고급스럽고도 멸균적인 향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더럽혀지지 않은 세계, 언제든 더 새것으로 교체될 수 있을 것 같은 세계를 암시하는 냄새.


그것은 의외로 기분 좋은 것이었는데, 역의 축축한 냉기를 상대로 가죽과 공기를 통해 투여되는 일종의 화학적 마취 같았다.

차의 가죽 시트 냄새는 희미하게 나의 연한 베이지색 숄더백과 캐시미어 머플러에 맴돌고 있었다.

마취는 풀리지 않을 듯 나를 붙잡고 있었다.


머플러를 풀고, 감상적인 위로를 기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ㅡ 나는 서점에 들어갔다.


책장을 훑지 않았다. 원서 코너의 바닥에 곧장 주저앉았다.

콘크리트는 폭력적으로 차가웠고, 그 무심한 냉기가 무릎과 척추, 치아를 타고 위로 올라왔다. 앉는 순간, 사람들의 지나가는 발목과 닳은 신발 밑창, 먼지의 정전기만 남았다. 바닥은 나의 허락 없이 열을 빼앗아 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감각이 좁아졌다.

허벅지부터 저려 왔고, 허리 아래 피부의 감각이 무뎌졌다.

선반 맨 아래에 등을 기대고 스티븐 킹의 〈Grey Matter〉를 펼쳤다.


회백질 뇌에 대한 것인가, 회색의 공포가 문제라는 것인가? 과연 스티븐 킹답다.

각각의 문장은 절개되어 있었다. 각 문단은 노출 치료처럼 작동했고, 공포는 나의 체온으로 등록된다.


3페이지, 4페이지..

심박은 느려지고, 호흡은 얕아졌고, 체온은 빠져나갔다.

계산대에 가서 14,300원을 지불할 즈음, 피부는 말 그대로 "임상적으로" 차가워져 있었다.

원서 세일 기간이라 12,300원이 영수증에 찍혀 있다.


그 서점의 바닥은 내가 필요로 하던 일을 정확히 해냈다.

내 안의 열을 끌어내어 대신 붙잡아 두었다.

나는 안도감 없이, 그러나 분명히 가벼워진 육체를 이끌고 서점을 나섰다.


집에 돌아와 BBC 라디오 3을 틀었다. 스피커에서는 서울에 한 박자 뒤늦은 성탄예배가 바흐의 금관악기 선율을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색은 겨울 난방을 내내 틀지 않은 아파트의 공기에 곧 스며들었다.

이 날은 내가 꿈에서조차 그토록 갈망했던 한 "정상적인" 크리스마스 ㅡ 거의 100퍼센트ㅡ 라고 확신했다.

조용하고, 아무 일 없으며, 시니컬한 냉소적 유머가 공유되는 식사 자리. 그리고 떠남.




그런데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켰다. 가방 안에 있었어야 하는 올리브색 카드지갑이 사라졌다.

한 번도 지갑을 잃어버린 적 없는 나의 생애에 기록된 낯선 소실.

오늘, 나는 온종일 분실 신고와 재발급 절차를 밟으며 시간을 보냈다. 갱신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운전면허증은 다시 재발급 폴더로 들어갔고, 그 폴더는 월요일까지 열리지 않을 것이다.

나의 신원이 일시적으로 소멸되어 시스템 내부의 유령이 되었다. 낯설지 않았다.



오늘은 금주 20일 차이다. 소중한 친구에게 받은 모엣 샹동 샴페인을 직장 뒤 편의점에서 수령했다. 붉고 반짝이는 리본 장식, 병의 곡선을 타고 흐르는 금빛 거품의 환상. 그것은 지극히 장식적(Ornamental)인 아름다움이었으나, 동시에 내게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세계의 잔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거품을 잠시 상상했다.



30초 후, 나는 그 화려한 병을 들고 위층 성형외과로 향했다. 그곳의 원장님은 곧잘 내 얼굴을 해부학적 각도로 재며 "손볼 곳이 없다" 고 비평하는 분이다.


깊게 파인 안와, 뼈의 구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팽팽하게 당겨진 피부, 그리고 예민한 천재성을 암시하는 날카로운 턱선. 그 분의 시선은 오직 선(Line)과 각도로만 나를 읽어낸다.

나는 그 쉴레적인 얼굴을 마주하며 샴페인 상자를 건넸다. 붉은 리본의 과장된 화려함이 그의 무채색 가운과 서늘한 진료실 공기 사이에서 기묘한 이물감을 만들어냈다.


포장 상자를 건네며 무심히 말했다. "기념적인 날이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병을 건넸다. 공기는 차가웠다.

내 목소리는 무심했다. 샴페인 속의 탄산이 터지는 소리를 상상하는 대신, 나는 그가 나의 얼굴에서 찾아낸 '흠잡을 데 없는 각도'를 떠올렸다.


지갑은 사라졌고, 면허증은 재발급 대기 중이며, 샴페인은 타인의 손에 들려 있다.

모든 오래되고 과잉된 것들이 떨어져 나간 뒤의 홀가분함과 찜찜함.


Sober day 20.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 어떤 장식도 덧대지 않은 나 자신의 잿빛 물질(Grey Matter)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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