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조혼(早婚)에 대하여

나의 비감상적인 어떤 방식

저는 선의를 쉽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특히 시스템의 이름을 가진 선의라면 더더욱.


하지만 최근 한 국제구호단체의 ‘조혼 예방 캠페인’을 통해 여섯 살 난 한 소녀를 후원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캠페인에 마음을 보낸 이유는 명확합니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설계된 삶, 자신의 자율성을 박탈당한 채 타인의 세계로 편입되어야 하는ㅡ 처음부터 채워질 수 없도록 짜여 있던 삶의 무게를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작은 후원이 시스템 속으로 증발하는 무력한 거래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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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바라는 것은 감상적인 위로나 막연한 선의가 아닙니다.

그저 이 아이가 학교라는 울타리에 안전하게 머무는 것, 자신의 의지에 반해 성인기로 내몰리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지나치게 독하게 만들지 않아도 되는 실질적인 결과입니다.


이것은 저만의 실용적이고, 비감상적이며, 결과에 집중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저는 도착한 그 아이의 사진에 짤막한 손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는 말 대신,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조혼이라는 무거운 단어 대신,

학교에서 배우고 자라는 시간들이 안전하기를,

천천히, 자기 속도로 커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안부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타인의 고통에 개입합니다.

때로는 정교한 언어로, 때로는 이런 구체적인 실천으로.

혹시 저와 같은 결의 실제적인 다정함을 고민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이 여정에 함께 해주셔도 좋겠습니다.


pexels-soumayan-biswas-2155059623-33526031.jpg 글자를 배우기 시작할 나이. 아이가 조혼이라는 제도 대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언어를 먼저 가졌으면. 내가 그랬듯, 언어는 때로 가장 지독한 articulation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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