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라는 이름의 지혈대, 그리고 만 원어치의 꽃
금주 77일차. 168cm/43.4kg.
몸은 얇고 웅웅거리는 전선처럼 가늘어졌다. 예전의 달콤함은 모두 벗겨져 나갔다. 이제 신체는 목적지보다는 관성으로 움직인다. 이 꾸준함은 나를 위로하지도, 다음 한 시간 이후의 무엇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다만 불필요한 노이즈를 줄여줄 뿐이다. 수년간 과포화 상태로 살다 보니, 그 소음의 감소조차 입안에서 희미한 금속 맛이 난다.
압구정 아트하우스에서 영화 <죄인들(Sinners)>을 보았다. 영화는 나에게 스펙터클보다는 블루스의 정서에 기대도록 요구한다.
복수, 혈흔, 필연성, 비명. 익숙한 대본이다. 눈물을 강요하지도, 초월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폭력은 스크린 안에 머문다. 그것은 나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자극하지 않는다.
그러나 음악은 남는다.
블루스는 신화가 아닌 맥박으로 침투한다. 화면 속 육체들이 무엇을 탐닉하든 상관없이 지속되는 리듬.
내 발끝은 영화관 바닥을 가볍게 두드린다. 뱀파이어들이 집단적 온기를 찾아 몸부림치는 동안, 나는 자리에 앉아 이 박자에 고정된다. 블루스는 날것의 단조로 위장된, 박자 속으로 길들여진 슬픔이다. 감정이 넘쳐 흐르지 않도록 반복의 틀 안에 가두어 둔 고통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30j-MewhIhs
나는 주인공 새미(Sammy)를 보며 전설이 아닌 조명 아래의 육체를 떠올린다. 그는 자정에 교차로에서 악마를 만나 영혼을 팔고 기타 실력을 얻었다는 로버트 존슨의 그 오래된 신화와는 다르다.
깃을 따라 흐르는 땀. 지판의 쇠줄을 누르다 끝이 딱딱해지고 갈라진 손가락. 치솟기보다 목구멍에 모래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 그 계약은 영적인 거래보다는 현실적인 노동이다. 그저 계속 연주하는 것. 12마디의 형식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 나보다 오래된 무언가가 갈비뼈라는 감옥을 부수지 않고 가슴을 통과해 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 계약의 조건은 느릿한 템포이며, 그 보상은 영겁의 지속(continuation)이다.
손목 위의 펜더를 본다. 다시 5분이 늦다. 얼마 전 자성을 제거하고 조심히 다뤘음에도 여전히 어긋난다. 시계를 귀에 가까이 가져다 댄다. 초침 소리는 일정하지만 미세하게 틀어져 있다. 작은 기계 장치 안 어디에선가 서울의 습도가 내려앉은 것처럼. 정밀함이 정렬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잘 관리된 것들도 결국 방황한다. 시계는 맥박을 유지하지만 정확한 시간은 놓친다.
영화관을 나와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지하 터미널은 또 다른 종류의 압력실(pressed chamber)이다. 그 곳은 젖은 콘크리트 냄새와 군중의 거친 열기로 가득 차 있다.
노점에서 만 원어치, 두 가지 상태의 '지속(continuation)'을 샀다. 보라색 프리지아는 부서질 듯 날카롭다. 그 향기는 고주파의 음표처럼 느껴진다. 정체된 역사의 공기를 베어내는 예리한, 알칼리성으로 강하게 코끝을 찌르는 향. 꽃줄기의 희박한 두께가 손바닥에 닿는다. 차가운 초록색 유리 막대 같다. 그 곁의 노란 튤립은 전혀 다른 점성을 지녔다. 묵직하고 밀랍 같다. 꽃잎은 이미 바닥을 향해 처지기 시작했다. 종이 포장지를 끌어당기는 무게감에서 곧 닥쳐올 부패의 무게가 느껴진다. 나는 이 날카로움과 처짐의 균형을, 정밀하게 계산된 짐처럼 들고 걷는다.
다시 집. 집안 일은 아주 정밀하게 수행된다.
빨래를 삶는다. 방 안은 끓는 면직물 냄새와 세제의 날카로운 화학적 열기로 가득 찬다.
창문에 맺히는 증기를 본다. 서울의 마천루가 그리는 하늘의 윤곽선을 지워버리는 하얗고 완충되지 않은 안개. 화분에 물을 준다. 메마른 흙의 틈새가 어두워지며, 물이 만든 무거운 찌꺼기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본다. 흙과 물이 만나는 낮은 치익 소리 외엔 아무런 소음도 없다.
꽃들을 같은 화병에 꽂는다. 반대되는 것들의 정렬. 지속되는 향기에 마침내 굴복하는 무게.
달걀을 삶는다. 칼슘이 금속 냄비에 부딪히는 무디고 규칙적인 달그락거림. 창문을 연다.
서울의 바람에는 신화가 없다. 오직 차도 위로 흐르는 교통량과 차가운 콘크리트 냄새뿐이다.
바람은 허락 없이 방으로 들어와 증기를 식힌다.
물이 차 올랐다 가라앉는다.
집이 숨을 들이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