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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그늬 Jun 29. 2021

<한 글 자 제 목> : 룻

도움받는 사람에 대한 올바른 태도


<한 글 자 제 목>은 각 에피소드가 한 음절의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 '눈', '총'처럼 한 글자 만으로도 통용되는 단어들보다는,

대부분 그 자체로는 많이 쓰이지 않는 글자들을 주로 골랐습니다.

각각의 글자들로부터 흘러나온 저자의 얕고 좁은 생각들을

독자들의 넓고 깊은 생각의 바다로 다시 흘려보낼까 합니다.


<한 글 자 제 목>의 컨셉에서 살짝 벗어났다고도 할 수 있는 글을 하나 써볼까 한다. 그 자체만으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 한 글자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 말이다. 다수의 독자들이 '룻이 뭔데?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뭐가 취지에서 벗어났다는 거야?'라고 생각할 거라 추측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의 가르침에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 봐라? 사람 이름을 대놓고 제목에 가져다 쓰네?'라고 반응할지도 모르겠다.


룻은 다름 아닌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름이다. 그녀의 삶의 이야기가 많은 분량에 걸쳐 서술되어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국 최전성기의 통치자인 다윗의 증조할머니이며, 따라서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다는 점에서 꽤나 비중 있는 인물이다. 성서의 66권 중 한 권(룻기)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녀의 적지 않은 상징성을 말해준다. 물론 이 글에서 룻이 등장하는 대목을 가지고 일방적인 설교 말씀을 전하려는 것은 아니니, '나는 예수쟁이가 싫어!'를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는 독자들이라도 해도 글을 차분히 끝까지 읽어주었으면 한다.



구약성서의 주무대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볼 때, 룻은 외국인 이주여성이다. 심지어 '본토' 사람들로부터 매우 천대받는 모압 지방 출신이다. 자신의 고향에서 같이 살던 남편이 죽은 뒤 그곳에 남아 본래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곁에서 돌보기로 결정하고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이라는 동네로 이주했다. 룻의 시아버지이자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도 이미 죽은 지 오래이고 다른 식구들도 없다. 2천 년보다 훨씬 전의 고대 사회에서, 남편을 잃은 두 명의 여성으로 이루어진 가정의 미래가 얼마나 불안하고 어두웠을지는 이루 말할 길이 없다.



그런데 다행히도 룻이 기댈 수 있는 복지 혜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수확 이후에 남은 보리 이삭을 주워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추수할 때는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고 밭 가장자리에 있는 곡물은 수확하지 말라는, 이집트를 탈출하고 현재 살고 있는 땅으로 되돌아오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신에게 받은 규율 때문이었다. 물론 추측컨대 그 규율을 잘 시행하는 농장주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농장주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 같다. 룻 이야기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의 에피소드가 "당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했다"는 서술로 마무리될 정도이니 말이다. 남은 보리 한 알까지 더 긁어모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이윤을 극대화하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풍토였지만, 다행히도 룻이 이삭을 줍던 밭의 주인인 보아스라는 남자는 굉장히 선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거짓말같은 전개를 거쳐 룻은 보아스와 재혼을 하게 되고, 둘은 행복하게 살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그냥 수확한 곡식을 도움을 요청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바로 주는 방식을 규율로 삼았어도 취지에 부합하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을 택했을 경우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도움을 주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고 감사의 표현을 전해야 하며,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덕담이나 조언 등을 들으며 장단을 맞춰줘야 할 수도 있다. 누구누구가 선행을 했는데 그 대상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이 여기저기 소문이 날 수도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편견과 혐오의 대상인 모압 사람이던 룻이 스스로를 남들에게 직접 드러내면서 구제를 요청하러 다니는 일이 그리 쉬웠을까? 부정적인 낙인이 찍혀 있는 사람은 정말로 어려운 형편이더라도 사회적으로 '도움을 받아도 되는 사람'으로 정의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의 위치에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된,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아침 조례가 끝나고, 담임 선생님은 근엄한 말투로 "야, 장효근, 1교시 끝나고 교무실로 따라와."라는 마무리 멘트를 남기고 교무실로 떠나셨다. 내 친구들은 저 녀석이 또 무슨 사고를 쳤을까, 저번에 야자(야간자율학습)시간을 빼먹고 농땡이를 피우던데 그게 걸린 것은 아닐까, 하고 뒷자리에서 키득키득거렸다.


1교시를 마치고 교무실로 향하는 길, 나의 마음은 불안해졌다. '뭐가 걸린 거지?' 딱히 나쁜짓을 많이 하고 다닌 것은 아니지만, 교무실에서 썩 좋게 봐 주지는 못할 이런저런 귀여운 장난들을 벌이고는 했었다. 컴퓨터실에서 친구들과 스타크래프트 하기, 복사전용 컴퓨터로 지뢰찾기 게임하기, 금요일 저녁에 문이 잠겨 있는 교실을 창문으로 넘어가 친구들과 밥버거 시켜먹기, 빈 교실에 몰래 들어가 연극 무대 준비하기 등등.



그런데 무슨 이유로 꾸중을 들을까 긴장하며 침을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넘기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다름 아닌 모 대기업의 장학금에 대한 설명이었다. "네, 장학금이요?" 나의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업을 성실히 수행하는 학생들에게 주는 거라고 했다. 그것도 무려 백만원이나. 각 반의 담임교사들 중 자신에게 추천 권한이 먼저 왔기에 나를 추천했다는 말을 무표정으로 내뱉으셨다.


그 당시의 나는 정말 순수했는지, "근데 저보다 어려운 애들도 많은데요."라는 대답을 해버렸다. 대놓고 티는 내지 않지만, 정원의 20% 정도를 차지하는 '사배자(사회적 배려 대상자)전형'애들끼리는 미묘한 연대감이 있었다. 살짝살짝 힌트들을 던지거나 자연스럽게 '사배자'로 뽑혔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 리스트에서 유독 마음이 쓰이는 두 세명이 있었기에 그런 대답을 한 것 같다. 하지만 끝내 내 뜻은 관철되지 않았고 100만원은 나의 몫이 되었다.


이야기가 딱 여기서 마무리되면 훈훈하고 좋겠지만, 가장 중요한 장학금 수여식이 남았다. 수여식에 참가하지 않으면 장학금 수령이 어려울 거라고 했다. 하필 한참 예민한 기말고사 기간이랑 완전히 겹쳐 좀 아쉬웠지만, 그래도 100만원이 걸린 일이니.... 장학금을 주는 대기업이 소유한 건물의 거대한 홀에서 행사는 열렸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몇 개의 동그란 테이블에는 학교와 이름이 적힌 팻말이 배치되어 있고, 그럴싸한 간식들이 놓여있었다. 물론 테이블에 앉은 고등학생들 중 나 포함 어느 누구도 단 한 입도 먹지 않았다. 그 견딜 수 없는 어색함이란....



마이크를 잡은 건 행사를 주최한 꽤나 이름있는 복지재단의 '높은 분'과 해당 대기업의 '높은 분'이었다. 대기업 '높은 분'은 크게 별말씀 안 하시고 짧고 담백하게 잘 끝내셔서 괜찮았는데, 문제는 복지재단 '높은 분'의 훈화 말씀이었다. 자기가 재단을 통해 도움을 줬던 어려운 학생이 나중에 어느 학교에 들어가고 어디에 취업해서 어쩌구~ 나중에 그 학생이 성공해서 자기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했는데 자기가 나 말고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거라 저쩌구~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아니 돈 받게 해 줘서 진짜로 고맙기는 한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그 100만원이 자기 돈주머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가뜩이나 어색한 각 테이블의 분위기에는 먹구름이 끼었다. 현수막 아래에서 밝게 웃으며 단체사진을 찍는 것으로 일단 행사는 무사히 마무리.



"효근아, 그 아줌마는 왜 그렇게 주접을 떤대니?" "맞아, 엄마. 교훈과 감동을 꽉꽉 쥐어짜내는 느낌이었어."이라고 툴툴거리며 그 건물에 딸려있는 쌤소나이트 매장에 갔다. 평소 어깨가 좋지 않아 괜찮은 책가방을 사기 위해서였다. 나름 고가의 책가방을 사고 룰루랄라 매장에서 나오는데, 대기업 '높은 분' 그리고 동행하는 부하 직원들과 마주쳤다. 일종의 '시찰'을 나온 것 같았다. 그 '높은 분'과 눈이 마주쳤을 때, 순간, 뭔가 잘못을 저지른 느낌이 들었다. 혹시라도 '저소득층 학생이 왜 저런 사치를 부리는 거지?'라고 생각하는거 아닐까? 엄마도 집에 가는 길에 웃으시면서 "그런데 그 아저씨 우리 보고 '아니 저런 걸 산다고?'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크크."라고 말씀하셨다. 태어나서 직접 가격표를 본 것 중 가장 비싼 가방을 아들이랑 같이 고른 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나 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 정도 위치의 재력가라면 샘소나이트 책가방 하나 가지고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필자는 현재 '내돈내산'으로 가죽 재질의 쌤소나이트 가방을 매고 다닌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운 좋게도 2학년 때와 같은 분이 나의 담임 선생님이 되셨다. 스스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장학금 사건 이후의 1년 반 남짓한 시간에는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나를 믿어주고 위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랄까. 모의고사 성적은 고공행진을 했고, 정시 가, 나, 다 군의 총 세 가지의 지원 기회를 굳이 다 사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수능시험을 무사히 잘 치렀다. 정시 가군에서 많은 고민을 하던 끝에 지금 다니고 있는 서울대학교 사회교육과를 선택한 것, 정시 나군에서 붙은 Y대학 경제학과를 포기한 것도 그 선생님의 영향이 꽤나 컸다. "그냥 너 원서 쓰고 싶은데 쓰고 가고 싶은 데 가라."라고 쿨하게 말씀하셨기는 했지만, 기성세대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참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최종적인 결정에 영향을 끼쳤지 싶다.



지금의 나는 나름 '잘 컸다'. 철 지난 자기계발서에나 나올 법한 오글거리는 질문인 "현재의 자리까지 오게 만든, 지금도 나를 움직이고 있는 요인은 무엇인가?"에 굳이 답을 내야 한다면, 100만원 그 자체 또는 100만원을 나에게 준 복지재단과 대기업의 선심을 꼽지는 않을 것 같다. 수여식 날 산 책가방은 이미 낡아서 쓸 수 없게 되었고, 남은 돈으로 산 TV는 고장이 나서 바꿨다. 여전히 해당 복지재단의 운영 방식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으며, 모종의 사유로 그 대기업에 대한 이미지는 썩 좋지 않게 되었다.


여러가지의 답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그 날의 아침 조례 시간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짧은 한 문장과 그 뉘앙스로는, 우리 반의 어느 누구도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저소득층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장학금을 주기 위해서 교무실로 불러낸 것이라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속 페달을 밟으며 막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나는, '예상하기 어렵게' 잘 살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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