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저는 그럭저럭 잘 지냅니다.

by 워니

친정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동안 감정을 다독여 가둬둔 둑이 터질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시 돋친 말이 마구 터져 나올 수도 있어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지방에서 혼자 살아오신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집 가까운 곳으로 모시고 왔다. 머리를 감겨드리는 일부터 시작해서 보살펴 드려야 하는 일은 많고, 책임감으로 마음은 무겁다. 주위에서는 이런 처지의 내가 안타까운지 위로한다고 한 마디씩 거든다.

“참 고생하게 생겼네. 어떡해, 그냥 대충 하면서 살아”

그런데 같은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하는 말은 공허하기만 하고 소음일 뿐이다. 오히려 아픈 상처에 뿌리는 소금처럼 따갑다.

어쩜 당신은 시어머니가 없으니 참 편하겠어’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귀를 닫고 쓴웃음도 참는다.


시누이도, 시이모님 들도, 이웃들도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라고 거세게 요구하는 했지만 그 소리를 듣지 않았다. 서러운 삶을 살아온 시어머니는, 가족을 잃어 본 적 없는 친정엄마만큼의 원망이나 불만조차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시어머니는 다가가기 어려운 대상이었고 일일이 나열하게 어려운 자질구레한 갈등도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결코 며느리에게 화를 내거나 불만을 토로하거나 금전적으로도 부담을 주지읺았던 분이다.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낼 수는 없었다. 시어머니는 서른다섯 살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장남은 그런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으로 이성을 잃을 때가 많았다. 장녀로 자란 마음이 여린 나는 상처를 가진 두 사람 사이에서 살아내야 했다. 장녀로 자란 내게 주어진 맏며느리 역할에는 시어머니를 돌보는 특별한 숙제가 들어있다고 길들여졌지만 시어머니를 한집에서 모시고 살아갈 자신은 없었다.


시어머니의 집을 장만했다. 평생 단독 주택에서 살아오셨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하는 번잡한 고층 아파트보다는 나지막한 저층 아파트에 아픈 다리로도 이동이 가능한 1층을 골라서 월세 집을 구했다. 시어머니는 변변한 살림살이도 없었다. 3년 전에 우리 집에 와서 살겠다고, 선전 포고 같은 결정 후에 이웃에게 살림을 나눠주다가 다시 주저앉자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기 때문이다. 예쁘고 아늑한 시어머니 집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옷장과 작은 소파와 작은 화분까지 마음껏 챙겼다. 시어머니의 기억이 어느 정도 지워진 것은 다행이기도 했다. 시어머니는 자신을 위해 돈 들어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돕기 위해 사이가 돈독했던 시이모님 두 분을 이사하는 날 함께 모시고 왔었다. 친정 이모처럼 친근하게 느꼈던 분들이었는데 결국은 시어머니가 세 명이나 되는 일을 경험하고 더 눌러 계시려는 분들을 내려가시도록 했다.


열흘을 지내다 가신 시이모님들 때문에 지나치게 소모된 감정으로 나는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한 시어머니의 무표정한 모습과 서서히 다가오는 버거운 경제적 부담도 나를 조금씩 힘들게 한다.


내가 자초한 일인 걸 어쩌겠어’

이렇게 되뇌면 정신이 든다. 나는 이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다스리고 살아갈 것이다.


친정 엄마는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친정 엄마와의 통화 내용을 전해 주는 남편의 말에도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애타는 마음이 느껴져 코끝이 찡하고 눈이 촉촉해졌다. 그토록 닮고 싶지 않으려고 갈등했던 친정 엄마인데 아마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대상이었나 보다. 선택권 없이 맡겨졌던 장녀의 자리처럼 낡고 뻔뻔한 희생이라는 마취제가 든 맏며느리 역할을 잘 살아내야 한다. 연민의 힘으로 잘 버텨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