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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QP Oct 06. 2023

문학의 개념


   다른 모든 구체성에 앞서. 문학에 대한 모든 논의는 그 말로써 우리가 무엇을 마음에 호출하는가, 그러니까 그것이 전체집합으로서 존재들의 세계 가운데 정확히 어디 즈음에 위치하는가 하는, 혹은 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나의 개념이란, 곧 단어란, 명명이란 말 그대로 이름이라 생각하는 편이 수월할 것이다. 즉 그것은 무수한 존재들 가운데 단지 호명함으로써 선택받은 일부를 불러내는 행위이다 - 순수하게 인식된 바/또는 순수한 인식의 객체와 구분하여 개념에는 이 같이 작업임을 암시하는 수사를 적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 점이 추후의 논의에서 핵심이 될는지도 모르기에 - . 그렇다면 어떻게 이름을 붙이는가. 성씨가 되었건 뒤따르는 이름이 되었건 그 역사적 기원을 추궁하는 것은 별 소득 없는 일일 테다. 이름은, 물론 자녀들에게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자 하는 부모들의 애틋한 마음이 깃들어 있겠지만, 결론적으로는 별다른 이유(특히 효용이란 측면에서) 없이 지어지고 일단 확정이 되고 나면 반의 어느 누군가를 지칭하고 또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름은 그 자신으로써 불리우는 대상을 설명하지는, 따라서 그를 붙들고 따라다니며 자유롭지 못하게끔 구속하진 않는다. 언젠가 세계 각지에서 이름이 정말로 그의 직업 따위를 명시하던 태고가 아닌 이상에. 이쯤에서 가능한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다. 제기될 수 있는 반론으로서, “이름에 대한 비유는 슬슬 그만둘 때가 아닌가?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이야 그것의 객체를 조금도 설명해주지 않지만, 예를 들어 사과라는 이름이 사과가 어떤 과일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것처럼(한자 뜻풀이니 어원학은 사양하겠다), 한낱 이름과 사과라는 개념은 엄연히 다른 둘이 아닌가? 삼각형의 개념은 가능한 모든 삼각형의 공통된 성질을 단적으로 제안한다." 이상의 물음에 대하여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물론 통상적으로 보아 개념과 이름의 차이라면 후자가 좀 더 단순하다는 것, 이름에는 소리나 모양이라는 물리적 성분만이 있지만 개념은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적어도 한 가지를 더 - 자신이 아우르는 개별자에 필수적이라 여겨지는 비물리적 형식을 부과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개념이 되었건 이름이 되었건 간에 이 수단(또는 발명; 도구; 행위.. 등)이 특수한 목적성의 대상이라면 바로 그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양자가 보다 동질적인 것인지 혹은 전혀 상이한 것인지를 판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름의 목적은 무리들 사이에서 오직 내가 원하는 '그'를 불러내는 것이다. 개념의 목적은? 그것은 (존재의) 무리들 사이에서 오직 내가 원하는 '그들'을 불러내는 것이다. 앞서 삼각형의 예시에서도 세 변과 세 각으로 이루어지는 도형이란 개념은 그것으로써 호명하는 구체적인 형태들을 설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만일 설명하고자 했더라면 그것들의 독자적인 성질과 외부적인 성질을 일일이 나열했어야 할 것이다. 사과도 마찬가지. 사과라는 이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라는 개념이 또한 있는 것은, 사과 A나 사과 B 또는 사과 C와 같은 구체적인 존재들을 설명하려는 게 아니고, 그것들을 단순히 뭉뚱그려 부르기 위함이다. 모두에게 각기 다른 이름을 붙여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이러는 편이 더 유용할 수 있다. 본래의 목적을 따르는 데 있어. 한 반에 동명이인이 있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사과라는 개념은 ㅇ학년 ㅇ반에 속한 두 김ㅁㅁ 학생의 이름이 모두 김ㅁㅁ이라는 사실과 동격이다.


   그렇다면 이제 개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선 충분히 고민했으므로 다음 단계로, 즉 문학의 개념을 설정하는 목표에로 향할 수 있겠다. 앞에서 개념이란 단순히 구별하기 위한 도구임을 말했는데 이로써 두 가지가 시사된다.


1. 문학의 개념은 문학과 문학이 아닌 것을 효과적으로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2. 그것은 최소한으로 설명적이어야 한다. 즉 지나치게 구속해서는 안 된다.


   위 두 가지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개념이란 지금 통용되는 문학의 전 범위를 포괄하면서도 현재의, 그리고 미래에 올 문학으로 하여금 마음껏 자유를 구가하도록 방임하는 것이다. 다만 미래의 풍요로운 가능성에 대해 벌써부터 고민하는 것은 그 자체로 미정적인 무한한 가능성을 턱없이 제약하는 것이므로 현재 우리의 문학에 대한 관점들에서 출발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겠다.  


   문학에 대하여 누구나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바는 단연 그 물리적 성상으로, 곧 문학은 글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는 이견이 없을 법하다. 이상의 첫 번째 개념은 가능한 한 최소로 규정한다는 조건에 있어서도 무결하다. 하지만 반대로 말해 그것이 충분히 규정적인가를 묻는다면 어떨까. 우리는 모든 글이, 혹은 넓게 보아서 언어 일반은 문학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 따라서 부득이하게도 문학의 개념은 추가적인 제한을 요구한다. 여기서 나는 예술이란 케케묵은 그러나 시의적절한 수식을 불러오길 제안한다. 일반적으로 문학은 전통적인 예술의 한 장르로, 전체로서의 예술이란 집단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지므로. 그렇다면 문학의 개념을 예술인 언어 또는 언어인 예술이라고 정립할 수 있을까? 과연 전자와 후자의 차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기에 앞서 예의 구상은 꽤나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뭇 도구의 운명이 예사 그러하듯이 그것은 실질적인 시험을 필요로 할 것이다. 글에 꼬리표처럼 접착하는 시나 소설 따위의 분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상태에서 저 홀로 문학인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면 문학은 첫째) 언어이고 또한 둘째) 예술이라는 저 개념이 충분히 효과적일까?



문학보다도 훨씬 더 모호한 예술의 개념을 제시하는 일


   그러나 마찬가지로 예술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예술을 어떻게 규정함으로써 실제 세계의 역사 축과 지도상에 널브러진 가능한 전 대상을 포괄할 것이며, 또 의심할 여지없이 생성할 것인 후대의 새로운 예술에게도 제 자리를 늘림으로써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에 있어서도 방법은 문학에서와 동일하다. 다만 문학에서와 달리 조건들은 공연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에 도움을 구하고자 역사책이나 경전이랍시고 오래된 사상들을 들쑤셔 본다면 현명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술이란 모호함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들을 포함하여 일관되지 못한 채 지속해 왔으므로 - 차라리 그로써 지시되는 사물들은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는 편이었고, 정작 그를 껴안으려는 개념은 멈출 곳 없이 표류해 왔다. 더군다나 지나간 과거의 예술 개념은 오늘날의 예술 존재들을 전부 다 호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각각의 시대는 인류에게 일견 보편적인 이름들에 대한 자신만의 개념들을 필요로 한다. 기껏해야 유행하는 소위 '시대정신'을 담고자 함이 아니라, 즉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같은 부류의 속 편한 인과관계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코 빠지는 이가 없도록 하려는 자명한 목표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찍이 칸트는 본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저작보다도 그 뒤에 출간한 실천이성비판을 더 소중히 여겼다는 얘기를 나는 어딘가서 들었던가 보았던가, 그게 아니라면 꿈이라도 꾼 것 같다. 하여간에 그 소문의 진위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이 이야길 꺼내는 것은 상정된 가상의 칸트가 견지하는 입장에 나 역시 동감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주장하는 바가 더 독창적이라는 생각에, 다른 이유는 후자가 지금 시점에 더 유효할 것이란 판단에, 그러나 가장 중요한 까닭은 그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는 그가 철학을 결심한 이상 맞닥뜨려야만 했던 관문인 도덕을 정의 내리는 과업에 착수한다. 여기서 그가 채택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그는 의지에 따른 실천 일반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수단과 목적이란 두 요소로 구성되는데, 언제나 A를 위해 B를 한다는 식이다. 그런데 칸트에게 있어 도덕이란 [A의 자리엔 아무것도 없이 B를 한다] 그뿐이다. 달리 말해 그는 일반적인 행위의 원칙에서 A를 제거하는 것으로써 도덕을 정립했다. 기존의 윤리학이 A 자리에 마땅한 '최고선'을 찾고자 그토록 노력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필연적인 수난에 빠지는 것을 목격하고서, 늙은 여우 같은 칸트는 응큼하게도 그에 대해 아예 생각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 실제로는 그 자신도 복잡한 구체성의 영역으로 진입하자마자 부적절에 당도할 수 밖엔 없었으므로 -.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칸트식의 윤리학이야 말로 당대나 오늘이나 여타 구체성을 해명하려는 이론들과 비교했을 때 여전히 탁월한 생명력으로 남아 타당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도덕이란 보편적인 명령이라는 대전제에 동의하는 것이 우선이겠으나, 위 전제와 별개로 그의 방식이 개념과 설명을 구분하는 것이며 또한 내용을 비워둔 채 형식만을 남겨 둠으로써 존재의 호출을 비길 데 없이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 필히 칸트 본인은 정반대의 효과를 기도했겠지만. 물론 이상에는 생략된 바도 많고 생전 철학자의 견해와는 전혀 상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 누군가를 인용한다는 것은 좀 더 고상한 비유법과 다를 바 없으며, 요지는 예술의 개념을 설정하는 작업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법을 적용할 수 있으리란 것이다.


   흔히 예술을 규명하려는 작업에 있어 다음과 같은 방식이 채택된다. 그러니까 다만 안전을 기하여 현재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장르 구분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 따라서 예술인 것으로 별 잡음 없이 통용되는 장르들의 단순한 묶음을 예술이라 뭉뚱그려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비록 전통이라는 권위에 힘입어 틀리거나 오인할 위험이 극도록 적기는 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경직된 것이어서 인식론의 자유를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단지 외관상으로만 형식화한 순수한 내용으로서(구속력 있는 학문의 개념들을 흔한 예시로 들 수 있겠다), 주어진 한 시점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유입도 내부로부터의 탈출도 철저히 거부되고 오직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압력에 의해서만 스스로를 동화시키는 가장 소극적인 시도이다. 이처럼 역사적인 - 박물학의 - 해석이 전락을, 그러니까 예술이 드높은 진지함의 영역에서 별반 중요하지 않은 주제로 소외되었음을 증거한다는 사실은 따로 덧붙일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이와는 상반되게 극도로 열정적이고 또 한결 전통적인 규명 방식이 있다. 여기서 인간의 활동 - 사물을 실제로 제작하는 것이든,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든 - 이란 측면이 대단히 강조되며 따라서 여느 '행위'와 마찬가지로 목적론의 기본적인 틀, A를 위한 B라는 도식이 근저에 자리한다. 언뜻 보기엔 가장 적합한 시도이며 고고한, 차라리 신사적인 노력을 닮은 이 방식은 기실 전의 것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설명적이다. 물론 어떠한 목적의 기체 - 예를 들면 인간적인 삶의 특수하고 더욱 진실한 반영. 현대에 그 존재의 객관성마저 상실한 듯한 아름다움 자체를 A 자리에 놓는 일은 오히려 드물다고 느낀다 - 라는 정의가 영화, 회화, 조각... 등등의 총칭이라는 무성의함보다야 투명한 형식에 가깝겠지만, 이는 전자의 설명이 존재 자체에 귀속하는 성격이라기보다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부가된 바라는 이미지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여튼 낫다고는 하더라도 만족할 정도는 아니다. 순전한 목적론은 그 각각이 현존하는 전체 예술 대상을 성공적으로 포괄하지 못하며, 뿐만 아니라 앞의 방식이 그러하듯 예술을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제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어떻게 할 것인가. 이상에서 예술의 개념을 설정하려는 일반적인 시도가 직면한 필연적인 한계로서 존재를 호출하는 그것이 지나치게 설명적인 탓에 충분한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채로, 달리 말해 사전에 기입된 바에 따라서만 개별성이 드러남을 지적했다. 기껏해야 구체적인 내용들을 형식화의 시발점으로 삼으려는 노력에서 기인하는 이 문제를 - 실상 모든 개념들이 같은 상황(내용이 형식을 자처하는)을 공유하겠지만, 예술의 경우에는 정말로 주어진 세계의 전 대상이 예술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여건이 다르다 - 나는 칸트가 이미 수 세기 전 사용했던 방식을 참고하여 해결하고자 한다. 정확히는 예술을 어디서건 독립시키는 것, 곧 세계와의 관계를 절단하는 것이다. 전체로서의 세계 속에서 존재란 그 전체인 세계와 어떻게든 묶여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를 테면 팽팽한 인과 법칙에 따라. 또는 칸트가 상정한 목적론에 따라서. 그런데 여기서 예술을 완전히 독자적인 존재로, 즉 그것은 어느 무엇의 원인도 결과도 아니고 어떠한 수단도 그리고 목적조차도 아니라고 정의한다면 어떨까. 그리고 이러한 순수함을 곧 아름다움이라 명명한다면, 그래서 아름다움을 담지하는 사물인 예술이 아니라 예술의 성격-형식이 곧 아름다움이 돼버린다면. 예기될 효과는 분명하다. 상술한 개념은 가능한 그리고 가능할 모든 예술인 대상들 - 곧 사물들을 쉬이 총괄하면서도, 예술인 것과 그렇지 않은 존재들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외려 의문은 왜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 어째서 예술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만 그렇게나 형식임을 강조하고, 따라서 인식의 한 범주라는 중요성까지도 부여하려 하는가에 있다. 예컨대 사과나 의자와 같은 일상적 세계의 개념들을 전부 다 같은 방식으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므로.


   재차 실천이성비판으로 돌아와서, 그 전반의 주장을 형성하고 통일하는 구심력으로 작용하며 그 자신도 이에 대한 언급을 아끼지 않았던 대목은 바로 주제에 대한 칸트의 존경 어린 애착이다. 그곳에서 작가의 의도를 단순히 윤리학에 적당한 자리를 마련하고 보장해 주는 것만으론 요약할 수 없다. 그에게는 도덕을 다른 모든 존재들(여기서는 실천의 일반 형식에 따르는 각각의 내용들)의 곁에서 멀리 높이 띄워 보내 누구나가 우러러볼 수 밖엔 없는 곳, 저 하나의 별자리로 임명하는 것이 유일한 책무였다. 특수한 양식의 존재 전체를 단숨에 두 가지, 곧 도덕과 도덕이 아닌 것으로 구별하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함이 마땅할 정도로. 칸트는 도덕을 그것이 출발한 기원(공시적으로나 통시적으로나)으로부터 철저히 구분하여 독자적인 지위를 부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왜' 그러하느냐는 물음에는 언제나 두 종류의 대답이 뒤따른다. 하나는 쉽지만 또한 무관심한 방식으로 사건의 인과만을 밝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내가 예술에 각별한 시선을 할애하는 것은 그것이 전통적으로 대우받는 주제였고; 나 또한 그 전통의 연속상에 있으며; 그렇기에 자연히 어느 정도 호의와 존경심을 가지고서 예술을 대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두 번째는 주체로서 행위의 의도를 고백하는 것이다 - 여기서 인과성의 논리, 즉 최초로 행위에 돌입할 때에 정말로 두뇌의 작용에 관여했는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내밀한 목적을 선언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단순히 솔직함을 요구한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전적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어렵다. 그럼에도 적어보겠다. 내가 여타 수많은 개념들을 저만치 제쳐두고 굳이 예술에만 편협한 관심을 가지는 까닭은 오늘날 획일화된 진지한 주제들 및 그것들을 이해하는 방식에 반감을 가지기 때문이고; 이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고자 함이며; 이때 새로운 주제를 발견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주제를 활용하는 편이 쉽고; 그 주제가 한때의 위용을 상실한 채 스러져 가는 것을 목격할 때면 항상 기분 묘한 동정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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