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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꼭또 Jul 01. 2022

성경 스토리 (창세기 1 장 – 6 장)

헬레니즘 과 헤브라이즘


   그리스나 로마를 방문하게 되면 수 많은 인간모습의 조각상들을 보게 됩니다. 사람도 있지만 신도 있습니다. 신도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조차 인간의 몸으로 표현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인간은 그들 사고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이들의 사상과 철학을 그대로 계승한 로마의 문학을 아우르는 공통의 관심사 또한 인간입니다. 주인공들은 분노, 탐욕, 시기, 질투, 허영심, 오만 그리고 지나친 욕정 같은 내부의 적에 의해 희생되기도 하고 신이 정해준 운명에 서 싸우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전쟁터와 바다에 던져져 지혜와 용기로 끝까지 살아남는 캐릭터도 있고 개인의 감정을 희생하고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 영웅도 등장합니다. 작가들은 이들의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며  인간은 왜 고통 받는지, 비극은 왜 생기는지, 인간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인간 그 자체였다는 말이며 이를 우리는 헬레니즘 혹은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오거스터스



   서양 문학에서 모든 걸 인간 중심으로 보던 관점에서 서서히 신 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계기가 바로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오비드의『변형』이 출간되기 8 년 전이며 로마의 초대 황제 오거스터스 집권 28년 차 였습니다.  예수님 탄생이후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이 달라지는 세상을 구분하기 위해 주전(BC: Before Christ), 주후 (AD: Anno Domini)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이 아노 도미니는 라틴어로 우리 주님의 해라는 뜻이고 예수님의 생일을 의미합니다. 요즈음은 비크리스천들을 고려하여 같은 표현을  공통의 시대 전 (BCE: Before Common Era), 공통의 시대 (CE: Common Era) 로 씁니다. 이렇게 단어는 바뀌었지만 의미는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 역사의 흐름을 예수님의 탄생 전과 후로 나누어서 본다는 점입니다. 이는 실로 예수님의 탄생이 인류의 역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처형 직후의 예수님


   예수님의 탄생을 인류사에 새로운 인간형의 출발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역사의 한 획을 긋는 과거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혁명적인 사상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세계관, 종교관, 윤리관, 그리고 도덕관에 매료된 수많은 추종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기를 원하는 제자들입니다. 로마 당국에 의해 수없이 많은 핍박과 박해를 받아오던 기독교는 서기 372년 로마의 국교가 됩니다. 이후 서양 세계는 빠르게 기독교화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 로마의 세계관에 익숙해 있던 유럽인들에게 크리스천의 세계관 즉 신본주의 사상이 주입되기 시작한 겁니다.

   

   예수님 이후의 문학도 기독교의 이해 없이는 온전히 즐기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영향을 안 받은 작가가 없고 기독교의 세계관이 반영되지 않은 작품을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사후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기독교의 영향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우리가 읽는 책 뿐 만아니라 뮤지컬, 영화, 음악 미술 등 대중문화 전반에도 기독교의 영향이 안 미친 곳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세계관은 무엇이고 신 중심 사고는 무슨 의미일까요? 이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 바로 구약입니다. 창세기로 시작되는 구약이 기독교 사상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시작하기 전 한 가지만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하나님의 성스러운 말씀이 아닌 히브리 사람들이 기록하고 모은 일종의 문학작품으로 접근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목표는 종교와 신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구약이 언제 기록되었고 누가 썼는지는 학자들이 제시한 여러 가지 이론들만 있을 뿐 아무도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구약에 나오는 내용들 예를 들어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 노아의 대홍수, 모세의 이야기들은 창세기나 출애굽기에만 있는 스토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그 당시 즉 기원전 천 오백년에서 이천년 경 중동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주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여러 가지 다른 버전으로 존재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그 당시 여기저기에 있었던 신화와 전설적인 이야기를 가져다가 히브리인들만의 고유한 숨결을 불어넣어 그들 특유의 종교관과 세계관을 반영한 이야기로 재창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러 버전 중 구약에 자리를 잡은 이야기들만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아직까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그 이야기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우리의 맘을 감동시키는 진실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히브리 민족과 늘 대립하며 싸웠던 히타이트, 수메르, 바빌로니안, 페니키안, 아시리아인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은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세계문명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민족의 저력 뒤에 그들이 간직해온 이야기의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헤브라이즘의 힘이기도 합니다.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 창세기 1 장 1,2 절)



창세기 1 장의 저자는 하나님이 세상의 탄생 전부터 먼저 존재 했다고 기술 합니다. 고대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여러 창조신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입니다. 이들은 태초에 혼돈과 텅 빈 암흑이 먼저 존재했고 여기에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신들이 탄생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께서 천지를 비롯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관점이 히브리인들의 신본주의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힘의 원천도 분명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사물이 말씀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세기 1 장 4  절)



또한 사물에 이름을 붙이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 창세기 1 장 5 절)



창조만 하신 게 아니고 만물을 움직이게 하고 자라게 하고 번성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우주 만물의 창조자도 하나님이시요 주관자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5 일 만에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6 일 째 되는 날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창세기 1 장 26절)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 직전에 나오는 인간창조 이야기입니다. 먼저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합니다. 우리의 형상에 따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복수로 지칭한 점이 눈에 띕니다. 히브리인들도 처음에는 다신 개념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유일신의 개념으로 바뀝니다.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었다고 나오는데 이는 신들의 육체적인 형상이 아니고 관계나 행동을 가르킨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은 어떤 형상에 국한되는 신이 아닙니다.    왜 만들었는가에 대한 목적도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세상의 주인이 되도록 계획하셨다는 점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사랑이 느껴집니다.  

   

아담과 이브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간의 모습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우스는 어느날 인간과 동물을 만드는 꿈을 꿉니다. 그리곤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에게 이일을 시킵니다. 제우스의 명에 따라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는 인간과 동물을 같이 창조합니다.  이 두 형제 신은 이들이 자연에서 생존에 필요한 무기들을 하나씩 선물 했습니다. 이를 테면 날카로운 발톱, 이빨, 시력, 청각, 후각 같은 건데 에피메테우스는 이러한 능력들을 모두 동물에게만 주었습니다.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까먹고 실수를 저지른 겁니다. 아무 능력도 부여 받지 못한 인간 즉 남자의 생존 여부가 걱정스러워진 프로메테우스는 이들에게 생존도구로 신의 불을 선물합니다. 이에 제우스는 격노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불을 가짐으로써 신에게 도전할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는 겁니다. 제우스는 인간은 영원히 무식하고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자신 같은 신들을 공경한다는 거죠. 제우스는 불을 갖게 된 남자들을 견제하고 벌하려는 목적으로 여자를 만듭니다. 판도라 덕분에 인간은 온갖 악과 고통에 시달리는 생명체가 됩니다. 우리가 여름마다 모기에 시달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제우스 입니다. 고대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은 우연히 같이 창조된 여러 동물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그나마 최고신의 견제대상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하나님에게 인간은 자식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들어 놓고는 늘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돌보시며 애를 쓴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2 장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집도 없이 먹지도 못하고 헐벗은 모습으로 고생하는 걸 좋아할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첫 번째 자녀들을 에덴동산에 살도록 허락하신 이유입니다. 에덴동산은 인류최초의 유토피아로 100% 렌트비 무료에 먹을 거 입을 거 걱정도 없습니다. 또한 여자를 창조하신 이유도 같은 개념입니다.  남자 혼자 지내는 게 보기에 안 좋다 말씀하시고는 그의 갈비뼈 하나를 빼셔서 이브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남자의 머리가 아니고 발도 아닌 가슴 위치의 갈비뼈에서 이브가 창조되었다는 말은 여성은 늘 가슴으로 사랑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 같습니다. 이 장면에서 혼기를 놓친 장성한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인간을 라이벌로 생각하며 짓밟을 궁리만 하는 제우스와는 너무 비교됩니다.  

   

   인간에게 행복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고통을 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에덴동산에 살도록 허락하시며 한 가지 조건을 겁니다. 그걸 구약에서는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와 언약을 맺습니다. 내말만 잘 들어라 그러면 그 대가로 너희는 행복할 것이다. 인간의 행복의 조건은 이처럼 상당히 간단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지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걸 구약에서는 인간의 죄성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명령만 잘 들으면 만사형통인데 인간은 사탄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고 인류 최초의 유토피아인 에덴동산에서 추방됩니다. 인류의 고통이 시작되는 순간이죠.  즉 고통의 시작은 하나님 말씀의 불복종이며 고통의 개념은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입니다.

  

   이후의 창세기를 비롯한 구약 이야기는 에덴동산 이야기의 무한 반복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 추방 이후에 이어지는 카인과 아벨,  바벨탑, 노아의 홍수이야기 모두 주인공도 다르고 사건의 내용도 다르지만 이야기의 본질은 똑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리셋을 시켜주시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해주시지만 인간은 늘 같은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즉 늘 타락하고 사악한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말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 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세기 6 장 5 -9 절)  



노아의 홍수는 다른 여러 가지 버전으로 존재하며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나옵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에 신들이 인간에게 홍수를 보내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이유가 재미 있습니다. 인간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 신들이 잠을 잘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음 공해는 신들도 이렇게 힘들어 합니다. 타인에 방해되는 층간 소음이나 북치고 꽹과리 치며 확성기 틀어 놓고 시위하는 분들이 새겨 들어야 할 대목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좀 더 고귀합니다. 홍수로 세상의 악을 응징하시기 위함입니다. 물로 죄를 없애버린다는 의미는 훗날 신약에서 침례 또는 세례의 개념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없애 또 다시 시작하시길 원하셨습니다. 이번에 새로운 시작의 주인공은 노아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선택하신 이유도 간명합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은 악인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맺습니다. 인간을 죄악에서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 . .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 22 )   



이 두 번째 언약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와 맺었던 최초의 언약과 동일합니다. 내말만 따르면 너희는 행복하고 또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의 시작부분 중 1 장에서 6 장까지 살펴보았지만 우주 만물의 창조부터 인간의 탄생 행복 불행 모두 하나님에 의해 결정됩니다. 즉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신 중심의 사고 방식을 우리는 신본주의 즉 헤브라이즘이라고 부르며 인본주의인 헬레니즘과 대척점에 있는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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