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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꼭또 Jul 16. 2022

창세기 이야기 : 2 % 부족한 삶의 지혜

 

   요즘 세상을 보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고 “나는 싸운다, 고로 존재한다”가 더 어울리는 듯합니다. 인간 존재의 의미는 “생각”이 아니라 “분쟁”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사자들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한 나라의 정치의 역사 또한 각 정당 간 처절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한 인간의 일생도 예외는 아닙니다. 싸움으로 시작해서 싸움으로 끝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 저는 늘 대답합니다. “세상에 안 좋은 사람은 없어. 이해관계로 엮이지만 않는다면.” 겉은 모두 점잖고 나이스합니다.  그러나 일단 이해관계가 조금이라도 걸려있으면 한결같이 냉혹한 투사로 변신합니다. 타인과도 싸우지만 아는 사람끼리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부부도 가족도 친척들도 돈 문제만 걸리면 양보가 없고 타협이 힘듭니다.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진심으로 싸웁니다. 뻐꾸기 새끼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기위해 형제자매를 둥지 밖으로 밀어냅니다. 사실 인간의 모습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은 탐욕을 그럴듯하게 정당화하는 능력이 있을 뿐입니다. 창세기는 제목(Genesis)이 암시하듯이 시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천지창조가 시작되고 인류가 시작되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시작과 함께 인간의 갈등과 분쟁의 역사도 시작됩니다.  그 싸움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가까운 부부, 형제, 친척부터 시작됩니다. 인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가족 외에는 싸울 상대가 없어서 그랬을까요? 오늘은 창세기에 나타난 가족 간의 분쟁 모습을 통해 성경의 지혜를 배워보고자 합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목적은 신앙이 아닙니다.     

   

   아담과 이브는 인류가 기록한 최초의 부부 갈등 사례의 주인공입니다. 그 갈등의 원인은 바로 지나친 욕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담과 이브에게 정원을 선물하시고 여기에서 다른 과일은 다 먹어도 되지만 단 두 나무의 과일 만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98%를 허락하시고  2%만 금지시키신 겁니다. 사실 이 두 나무 열매 없어도 먹고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허락받은 물질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이미 잡아 놓은 물고기나 다름없으며 언제든 처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금지된 2 %를 향합니다. 그러나 그 금단의 열매를 차지했다고 인간의 욕심이 채워질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게 인간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금지된 2%에 손을 대다 하나님께 들키고 맙니다. 아담과 이브의 대처법은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아담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줘서

       먹었습니다.”  ( 창세기 3장 12절)



아담은 문제의 원인으로 아내를 지목합니다. 사실 아내의 권유에 동의를 한 사람은 자신인데 말입니다. 그 사실은 애써 외면하려 하는 겁니다. 이는 이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브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도대체 네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이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뱀이 저를 속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 창세기 13절)



내 탓이 아니고 사기꾼 탓이라는 겁니다. 일은 같이 저지르고 책임은 남에게 돌리는 인간의 속성이 드러납니다. 아담과 이브에게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졌을 뿐 아니라 부부간의 관계도 틀어집니다. 이 일 이후 아담과 이브가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은 없지만  파산당한 후 집마저 날려버렸으니 니 탓이니 어쩌니 하며 평생 싸웠을 것 같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교훈은 분명 합니다. 2% 부족하지만 그 부족한 상태에서 만족하는 지혜를 배우라는 겁니다.

  

    

카인과 아벨



   아담과 이브는 잠자리를 같이 한 후 카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부부싸움의 원조라면 카인과 아벨은 형제 싸움의 원조입니다. 형은 농업에 종사하고 동생은 목축업에 종사를 하는데 이 형제는 등장하자마자 서로 싸웁니다. 그 계기는 하나님께서 카인이 바친 제물보다 아벨이 바친 제물을 더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아벨의 제물을 더 좋아 하셨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에 대해 농업하는 사람들과 목축업하는 사람들의 갈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아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뿐이라는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벨의 선물을 더 좋아하시자 카인이 동생을 질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카인은 동생을 죽여 자신의 화를 달랩니다. 성경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카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왜 화를 내느냐? 왜 안색이 변하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어찌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 죄는 너를 다스리고 싶어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들로 나가자”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들에 나가 있을 때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 창세기 4 장 6-8 절)



카인은 동생을 살해한 죄로 인해 땅에서 떠도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훼손된 관계가 카인과 아벨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부부 싸움은 자식을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노아는 부부생활을 잘 했습니다. 덕분에 하나님께서 홍수를 계획하실 때 그와 그의 가족을 살려주신 듯 합니다. 성경을 보면 노아의 자식이 분쟁을 일으켰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이 홍수가 사라지고 집에 돌아온 후 노아의 아들들이 의견을 달리하는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관련 내용이 나오는 성경을 읽어 보겠습니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9 장 20-23 절)




노아는 하나님의 특혜를 받아 목숨을 구해 돌아왔지만 기껏하는 짓이 술 취해 아랫도리를 드러내놓고 잠을 잔겁니다.  오늘날 공연 음란죄에 해당하는 노아의 행동은 그가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아들로 인해 생깁니다. 막내아들 함은 아버지의 나체를 보고 형인 셈과 야벳에게 알렸고 형들은 아버지의 나체를 보지 않고 덮어 주었습니다. 노아는 깨어나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자신의 하체를 본 아들 함의 손자를 저주합니다. 왜 손자를 택했는지는 따로 설명이 없지만 이로 인해  저주받은 함의 자손들과 축복받은 셈의 자손들이 서로 싸우게 됩니다. 함의 자손들은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고 후일 셈의 자손들에게 정복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상들의 사소한 문제로 후손들이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카인과 아벨 이후 두 번째 형제 난의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입니다. 에서는 힘은 세나 단순하고 오로지 먹을 거에만 진심인 곰 같은 인간입니다. 반면 야곱은 힘은 약하나 영리하고 재물에 진심인 여우 형 인간입니다. 동생은 호시탐탐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고 또 가족의 리더가 될 수 있는 장자권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옵니다. 어느날 야곱은 사냥에서 돌아와 피곤하고 허기진 형을 보고 거래를 제안합니다.  죽 한 그릇을 줄 터이니 형에게 돌아갈 장자권 즉 아버지의 유산과 가족의 리더가 될 권리를 달라는 거죠. 배가 몹시 고팠던 에서는 배를 채우고 대신 자신의 권리를 넘깁니다. 형은 이 권리는 나중에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야 정식으로 효력이 발생하니까 안심하고 거래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훗날 야곱은 눈과 귀가 다 어두어진 아버지를 속여 형에게 돌아갈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 챕니다. 이로 인해 형은 아우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게 됩니다. 에서와 야곱은 이렇게 서로 원수가 되고 맙니다.

에서와 야곱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빼앗아 간 야곱을 미워했습니다. 에서는 속으로

       이렇게 다짐을 했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곧 돌아가실 것이다. 아버지를 장사

       지낸 뒤 야곱을 죽여 버리고 말겠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한다는 말이

       리브가에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사람을 보내 야곱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마음을 달래려고 한다.

       그러니 내 아들아, 내 말을 잘 들어라. 지금 당장 하란에 사시는 내 오빠

       라반에게로 가거라. (창세기 27 장 41-43절 )  



야곱은 사는 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외삼촌에게 가지만 그에게 속아 20 년 간 노동을 착취당합니다.  자신이 물질적 이익을 위해 형을 속인 것처럼 똑 같이 삼촌에게 당한 겁니다. 남을 속이는 자 똑같이 속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일 후에 야곱은 에서에게 행한 자신의 행동을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하신 듯 합니다. 야곱은 길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그는 새로운 이름의 이스라엘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곤 나중에 자신의 형과 화해를 합니다. 그러나 에서와 야곱이 진정으로 화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장자권을 놓고 벌인 싸움으로 인한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았고 결국 에서와 야곱의 자손들이 서로 원수가 됩니다. 선대의 갈등이 깨끗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 문제는 반드시 곪아 후대에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을 편애하는 아버지 야곱  

  


창세기 마지막이야기 주인공인 요셉은 아버지의 편애로 인한 형제간 갈등의 희생자가 됩니다.  요셉은 야곱의 11 번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는 야곱이 늘그막에 낳은 아들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합니다. 야곱은 요셉이 너무 이뻐 그에게는 특별히 소매가 달린 긴 옷을 선물까지 했습니다. 긴소매는 관리자용 옷입니다.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짧은 소매의 옷을 착용해야 했는데 이는 형들의 옷이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편애로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샀습니다. 게다가 그는 형들에게 자기 꿈 이야기를 하며 잘난 체 합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 창세기 37 장 7절)



이에 형들은 요셉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게 되고 급기야는 막내동생을 죽일 계획까지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맘을 바꾸게 됩니다.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자,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말고,

       차라리 그 아이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넘기자. 아무래도 그 아이는

       우리의 형제요, 우리의 피붙이이다."  ( 창세기   26-7)



이때가 요셉의 나이 17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직하고 똑똑하며 지혜롭고 인내심 많은 성격에다 꿈으로 미래를 읽는 예지력까지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요셉은 이집트 노예로 팔려온 이후 온갖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남아 그의 나이 30에 이집트의 왕의 대리인 위치까지 오르게 됩니다. 7 년 풍년에 7 년 흉년을 정확히 예측한 요셉은 이를 잘 대비하여 더욱 부를 쌓지만 가나안에 있던 요셉의 가족은 흉년이 들자 식량이 떨어져 굶어죽을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온 형제들과 재회하곤 과거 일을 용서해주고 식량까지 주어 가족을 구해줍니다. 갈등으로 시작됐지만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창세기에서 유일하게 분쟁이 없는 주인공이 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입니다. 이삭의 경우는 가족 간 분쟁이 없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외동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이스마엘이라는 배다른 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스마엘을 그의  어미 하갈과 함께 일찌감치 정리를 해버립니다. 여종인 주제에 아들을 낳았다고 아브라함의 본처를 무시하다가 내쳐진 거지요. 아무튼 이 때문에 이삭은 혼자가 되었습니다. 분쟁을 일으킬 상대가 없으니 평화롭게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가족이 있으면서 분쟁이 없는 경우는 아브라함이 유일합니다. 그와 분쟁을 일으킬 유일한 친척이 바로 그의 조카 롯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카와 좋은 관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합니다. 그 이유가 성경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는 롯과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말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다툼이 있어서야 되겠느냐?

       네 목자들과 내 목자들 사이에서도 다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친척이 아니냐? 모든 땅이 네 앞에 있으니, 우리 서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 창세기 13 장 8-9절)



선택의 우선권을 롯에게 주니 다툼의 여지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초대 부족장으로 존경을 받는 가장 큰 이유가 물론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 때문이지만 늘 타인을 먼저 챙기는 그의 배려심도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가족 간의 분쟁과 이를 해결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숨어있는 신학적 의미는 배제하고자 합니다. 가족 간의 분쟁은 인류 창조 이래 변하지 않는 우리의 본질적인 모습이며 지금도 매일 목격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총 7 명의 주인공 중 5 명의 집에서 분쟁이 있었습니다. 약 70% 정도 해당하는 이 수치는 지금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듯 보입니다. 열 가구당 일곱 집 정도는 이런 가족 간 갈등을 겪고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애초에 가족 간 분쟁을 피할 수 있는 해결책도 제시합니다. 아담과  이브를 통해 2% 부족한 채 사는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2% 채우는 순간 또 다시 2% 부족함을 느낄 인간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처럼 완전히 비우기는 어려워도 2 % 정도는 비워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친척에게 먼저 양보하고 배려하면 됩니다. 이렇게 배려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갈등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나겠습니까? 아브라함처럼 자식을 한 명만 두는 방법도 있긴 합니다. 저는 후자를 택한 케이스입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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