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와 출애굽기는 태고적 인류 이동에 대한 서사시이며 이스라엘 조상의 이주 역사입니다. 아담과 이브에 의해 시작된 인류의 위대한 여정은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모세의 시대까지 계속됩니다. 살던 곳을 떠나 끊임없이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가는 이들의 이동 드라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간관과 종교관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수천년 전 중동지역에 살았던 성경 속 주인공들의 출발과 새 출발의 모습은 왠지 낯설어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구약에서 펼쳐지는 인간 이동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 살펴봅니다.
인류 최초 이동의 역사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에서 살도록 허락하시면서 온갖 편의를 다 봐주었지만 돌아온 건 인간의 불순종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게 될 거라는 명령을 어긴 죄로 하나님의 집에서 쫓겨납니다. 새로운 장소에서 아담과 이브는 카인과 아벨을 낳고 가정을 꾸리는 일로 새 출발하지만 인류 최초 가장의 앞날은 그리 밝지 않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동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훼손은 아담과 이브의 부부간 갈등과 이제는 가족 살인으로까지 이어집니다.
노아도 아담과 이브가 걸었던 길을 반복합니다. 주인공이 달라지고 스케일이 좀 더 커지고 홍수라는 변수가 추가 되었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죄로 물든 세상, 새 출발 그러나 죄로의 원위치입니다. 이제 악으로 물든 장소는 에덴동산이 아니고 세상 전체입니다. 누구를 어디로 쫓아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홍수로 세상의 악을 전부 없애버린 후 다시 시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딱 한 명 괜찮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악으로 오염된 세상을 말끔히 청소할 때까지 다른 곳에 있다가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렇게 세상은 다시 시작되었고 노아는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와 새 출발을 했지만 결론은 역시나 입니다. 노아는 술에 취해 하체를 노출한 채 잠이 들어 결국 후손들이 서로 등을 돌리는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갈등 없이 살 수 없나 봅니다.
세월이 흐른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 시작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번 주인공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네 고향, 네 친척,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 창세기 12 장 1 절)
성경에는 왜 아브라함인지 왜 그의 나이 75세에 고향을 떠나란 명령을 내리셨는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새 출발 역시 아담과 노아의 판박이입니다. “네 고향, 네 친척, 네 아버지의 집”은 아브라함의 과거와 현재로 아브라함이 태어나서 여태껏 안락하게 살아왔던 생활의 터전입니다. 아담과 이브로 말하면 에덴동산 같은 곳이고 노아로 말하면 노아가 가족과 함께 살던 곳입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이 살던 하란이란 지역 역시 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란은 우상숭배자들이 많은 지역이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도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우상 숭배자가 득실거리는 지역에서 새 출발을 시키실 수는 없습니다. 새 출발은 악으로 얼룩진 과거와의 단절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부터는 새 출발만 있고 죄로 원위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새 출발이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 끝은 바빌론에 의한 멸망이며 그 원인은 바로 하나님과 멀어진 탓입니다. 결국 시간만 오래 걸렸을 뿐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담과 이브의 패턴이 되풀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그는 리브가와 결혼 후 자신이 2 대 족장이 되었을 때 기근이 심해집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땅에서 살아라. (창세기 26 장 2 절)
그동안 이야기에 등장했던 불순종, 악, 우상숭배가 이제는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근의 형태로 바뀌었을 뿐 문제점을 피해 살던 곳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창세기의 스토리 구조는 그대로입니다.
야곱과 요셉의 삶도 디테일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창세기 기본 주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형에게 돌아갈 장자의 권리를 훔친 야곱은 형의 분노를 피해 멀리 친척집으로 떠나야 했고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자의 던 타의 던 둘 다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점입니다. 야곱은 위험을 피해 도망친 삼촌 집에서 요셉은 고향을 떠나 이집트에서 노예로 새 출발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두 이야기의 초반에는 등장하지 않으시지만 나중에 이 둘의 새 출발 역시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점도 같습니다.
창세기 다음에 이어지는 출애굽기 역시 새 출발의 드라마입니다. 이제 이주의 주인공은 한 개인, 한 가정이 아니라 60 만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여호와다. 내가 너희를
이집트의 압제에서 꺼내 주고 그 속박에서 건져 줄 것이다. 내가 쭉
뻗은 팔과 큰 심판으로 너희를 구원해 줄 것이다. ( 출애굽기 6장 6-7절 )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 출발을 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즉 노예상태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처럼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이동 모습은 출발과 끊임없는 새 출발의 역사입니다. 성경 속 이동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의 주역 아담과 이브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신화적 인간입니다. 아담이란 이름은 흙이란 의미도 있지만 히브리어로 인간성을 뜻하며 이브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란 뜻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각각 남녀의 아키타입 즉 원형이란 말이며 이 둘이 남녀 고유의 역할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삶 역시 인간만이 경험하는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보면 에덴동산은 태어나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는 우리의 어린 시절이나 다름없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에 대한 걱정이 필요 없는 곳이며 부모님의 사랑으로 웃음이 그치지 않는 곳입니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고 또한 남녀의 차이도 못 느끼는 곳이며 남녀가 벌거벗고 살았는데도 아무 일도 안 생기는 곳입니다. 구별도 차이도 없으니 자연히 다툼도 갈등도 없습니다. 사실상 인간이 단 한 번 경험하는 유일한 낙원입니다. 단지 부모님 품안이 낙원인 줄을 모르며 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는 순간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면서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 숲속으로 도망을 갔고 무화과 잎으로 민망한 부분을 가리기 시작합니다. 너와 내가 다르고 남자와 여자가 차이가 있다는 인식이 생겼고 성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 접근은 사탄의 꾐에 넘어간 거지만 우리의 성장과정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되도록 설계된 생명체입니다. 성에 눈을 뜨는 순간은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애초에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지만 실제로 내린 벌(창세기 3 장 16-19절)을 보면 어쩐지 벌이라기보다는 부모가 결혼하여 분가하는 아들부부에게 주는 고언으로 들립니다. 이를 요약하면 첫째 여자는 출산의 고통 (“너는 고통 중에 아기를 낳게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부부의 갈등문제 (“너는 네 남편을 지배하려 할 것이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세 번째는 남자는 노동의 고통 (“너는 평생토록 수고하여야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둘이 살면 아이를 갖게 되며 여러모로 고생이 많겠다. 그러니 각오하고 살아라 정도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또한 아담은 하나님 말씀처럼 선악과를 먹은 뒤 죽기는 했지만 무려 130년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금단의 열매를 먹고 죽었다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오래 살았습니다. 이 네 단계는 부모를 떠나 새로운 가정을 시작하면 누구나 겪는 과정이 아닌가요? 다시 말하면 아담과 이브는 죄를 지어 에덴동산으로 부터 추방 되었다기 보다는 태어나서 시간이 흘러 나올 때가 되어 나왔다는 겁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나오자마자 제일 처음 한 일을 보면 이러한 견해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성경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세기 4 장 1 절)
요즈음 시각으로 보면 결혼 후 신혼여행을 갔고 허니문 베이비가 생겼는데 바로 가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계속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이제 본가에서 나와 처음으로 자신만의 가정을 갖게 된 거죠. 부부갈등도 시작되고 진정으로 고생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평생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요. 살만하니 이제 자식들이 싸움을 시작합니다. 가장으로 산다는 건 끝없는 시련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삶의 패턴은 노아부터 모세의 이야기까지 반복됩니다.
부모님 곁을 떠나 새 출발을 한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아프리카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피식자 신세나 다름없습니다. 대홍수 전 노아가 살았던 세상과 달라진 것이 없이 언제나 나쁜 놈들이 득실된다는 말입니다. 살림을 시작하자마자 전세 사기를 당하는 신혼부부도 있고 보이스 피싱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중고 거래 사기를 당하기도 합니다. 순진한 사회 초년생들이 쉽게 돈 번다는 말에 혹해서 주식 코인 등 여기저기 앞 뒤 가리지 않고 투자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 마저 날립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하란 지역의 우상숭배자들은 지금 우리나라에도 넘쳐납니다. 우상숭배자란 하나님의 가치가 아닌 세상의 가치를 좇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는 가치를 숭상하며 가진 건 허영심뿐인 사람들입니다. 원룸에 살면서 빚내서 외제차 타고 명품가방 들고 다니다가 쪽박 차는 젊은이들도 같은 부류입니다. 깡통처럼 텅 빈 머리와 마음을 고급 액세서리와 럭셔리 브랜드 옷으로 감추려는 자들입니다. 이삭이 피한 기근은 요즘 말로 이야기하면 국가적 경제 위기입니다. 우리나라가 1997년에 경험한 국가 부도사태 같은 케이스입니다. 살다 보면 별의 별 위기가 다 닥칩니다. 또 우리 주변에 카인, 야곱, 그리고 요셉의 형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유산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잘 나가는 형제자매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는 가족 간 칼부림도 이어지기도 합니다. 진정한 카인의 후예들입니다. 기원전 1440 년 경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이들은 어쩌면 지금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살면서 그런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나는 돈과 일의 노예인가? 물질 혹은 명예의 노예인가? 살면서 사기를 당하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나요? 삶과 일에 지쳐 스스로 노예라고 느낄 때마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떠나 새로운 지역으로 가서 새 출발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나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떠나라” 하고 직접 주문하신 건 아니지만 우리 맘속에 그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나요? 그 하나님의 음성은 어떻게 보면 아담과 이브 이래 인류를 이끌었던 새로운 기대와 희망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서기 1630년 청교도가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떠날 때 그들은 영국을 우상숭배자들이 가득한 악으로 물든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했듯이 자신들을 영국 국왕들의 탄압에서 구해 대서양 건너 언덕 위의 새 도시로 인도해 주시리라 굳게 믿었습니다. 퓨리턴 들은 그 믿음 하나로 바다를 건너 다시 시작했으며 그 결과 오늘날 세계 최강국 미국이 탄생하였습니다. 실로 대단한 믿음의 결과입니다. 이러한 새 출발에 대한 믿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되어야 합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다고 느낄 때 더욱 가져야할 믿음입니다. 사업실패로 아이와 처를 차에 태우고 바다를 향해 달린 가장의 절박했던 심정을 헤아려봅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창세기 12 장 1-2 절의 말씀을 접했다면 말입니다. 그랬다면 다시 용기를 얻어 새 출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