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병승 Feb 22. 2024

유럽의 고향 시칠리아(14)

'황성옛터'를 떠올리는 헤라클레스 신전 신전의 계곡에서의 시간여행

다음날 베두라에서 두번째 골프 라운딩을 마치고 휴식을 충분히 취한 뒤 오후 5시쯤  ‘신전의 계곡Valley of the Temples’ 투어를 위해 아그리젠토Agrigento로 출발했다. 


'신전의 계곡' 투어는 이번 여행 중 기대가 큰 곳 중 하나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고대 그리스의 중요한 유적지 중 하나로 유명하다. 또 역사적, 문화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계곡에 있는 사원은 기원전 582년경 아크라가스Akragas의 전성기 때 지어졌다. 아크라가스는 그리스 식민지 개척자들이 시칠리아에 세운 폴리스 중 하나다. 아그리젠토의 옛 이름인 이 도시는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 지중해에서 가장 번영하고 강력한 폴리스 중 하나였다. 이곳의 신전들은 도리아Doric 양식으로 건축되어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으며 각 신전은 저마다의 고유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곳에 도착하니 현지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가이드의 면허가 지역별로 따로 발급되어 가는 곳마다 가이드가 바뀐다. 한 지역의 가이드가 다른 지역을 안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오르미나와 시라쿠사에서는 남자 가이드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40대 중반의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였다. 박사학위를 가진 고고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런 전문가의 안내를 받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인사를 나누고 함께 계곡을 오르다 보니 벌써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9월의 따가운 잔양을 받으며 계곡을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연심 손수건으로 땀을 훔쳐야만 했다. 계곡으로 가는 길 너머에는 숨막히는 풍경이 펼쳐진다. 구불구불한 언덕과 지중해를 배경으로 고대 유적지가 펼쳐져 있어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일몰 시간이 되자 황금빛 색조가 고대 돌 위에 따뜻한 빛을 발산하여 계곡을 초현실적이고 다른 세상의 광경으로 바꾸어 버린다. 마법에 빠져들며 마치 내가 출연한 영화에서 고대 그리스를 여행하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왜 늦은 오후에 ‘신전의 계곡’ 투어를 시작하는지 알 것 같다. 한낮의 따가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일몰 때 몽환적인 이 곳의 분위기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일깨워주었다. 당시 이곳에 살면서 생활했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매일 대하는 이런 분위기 때문에 모두가 철학에 깊게 빠지지 않았을까. 


이 유적지는 제국의 흥망성쇠를 목격했고, 시간의 흐름을 돌에 흔적으로 남겼다. 그리스, 로마, 기독교의 영향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 계곡은 역사적 서사의 독특한 용광로가 되었다. '신전의 계곡'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위대함과 그리스 사람들의 신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다. 우리는 어느덧 과거로 이동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이 밟았던 것과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아까 인사할 때 가이드의 외모가 남다르다고 느꼈는데 문득 생각 나서 물어보았다.


"혹시 북유럽이 고향입니까?"

"아뇨, 시칠리아 토박이예요"

"그런데 외모가 남부 이태리 사람들과 전혀 다르네요."


그녀는 웃으면서 자신의 부모와 오빠들은 모두 검은색 혹은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런데 앨리스Alice(이태리 이름은 알리체)는 어떻게 금발에 푸른 눈인가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그녀는 증조 할머니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다고 했다. 유전자가 한 두 세대 건너 뛰어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자신은 11세기 때 시칠리아를 정복한 노르만족의 피가 섞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칠리아에는 자기와 같은 경우가 더러 있다고 했다. 피가 섞이면 양쪽 유전자의 중간적인 특성이 대물림 하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 아닌가 보다. 더 이상 신상에 대한 얘기는 부담스러울 것 같아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 


그녀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투어의 출발점인 헤라(주노)신전Temple of Hera (Juno)에 도착했다. 이 신전은 기원전 5세기 때 지어졌는데 바위 꼭대기에 웅장하게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고대와 현대가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가족의 수호자이며 결혼과 다산의 여신 헤라에게 바쳐진 이 사원에 들어서니 고대의 의식과 의례의 메아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도리아 양식의 기둥은 비록 시간이 흘러 풍화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신성한 은총의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다. 구경을 마치고 신성한 길을 따라 다음 장소로 이동하면서 우리 부부와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 코스는 기원전 440년경에 지어진 콩코르디아 신전Temple of Concordia이다. 아몬드와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여 구불구불한 언덕을 내려다보고 있다. 조용하고 명상적인 분위기에 둘러 싸여 있는 이 신전은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도리아식 신전 중 하나라고 한다. 다른 신전과 달리 현재도 거의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신전의 인상적인 기둥과 복잡한 조각은 고대 그리스인의 건축적 기량이 얼마나 뛰어난 지 잘 보여준다. 화합과 조화를 상징하는 이 신전의 이름에 어울리게 앞쪽 6개와 옆쪽 13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이 건물의 대칭성과 우아함은 감탄스럽다. 또 신전을 둘러싼 평화로운 분위기와도 이름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콩코르디아Concordia 신전


다시 방향을 서쪽으로 돌려 헤라클레스 신전Temple of Hercules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지중해가 내려다 보인다. 기원전 6세기에 지어져 지금은 기둥만 몇 개 남아 있지만 터의 규모와 우뚝 솟은 기둥의 크기를 보면 한때 웅장하게 서있던 당시 건축물의 위용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와 인간인 아르크메네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그의 삶은 이를 질투한 제우스의 아내 헤라에 의해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강인함과 용기 그리고 인내로 시련을 극복하지만, 또 다시 헤라의 개입으로 광기가 발작하여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만다. 그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 12년 동안의 12가지 형벌을 감수한 인고 끝에 용서받고 불멸을 부여 받게 된다. 신성한 영웅 헤라클레스의 강인함과 용기가 가슴속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비록 폐허만 남아 있지만 방문객들에게 경외심과 존경심을 불러 일으킨다. 외롭게 남아 있는 기둥은 헤라클레스의 업보인 인내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헤라클레스 신전 Temple of Hercules

또 한편 시간앞에서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업적도 무상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상기시켜 준다. 번성했던 예전 아크라가스 시절의 영광과 현재 유럽의 변방으로 전락하여 빈곤에 시달리는 시칠리아의 모습이 겹치면서 문득 '황성 옛터'의 가사가 떠오른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을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 노라


나는 가리 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아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 속 깊이 안고

이 몸은 흘러서 가 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작가의 이전글 캡틴과 선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