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의 타임캡슐, 로마나 델 카살레
노토의 Caffe Sicilia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피아사 아르메리나 Piazza Armerina 로 출발했다. 시칠리아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노토에서 섬의 중심부에 있는 마을인 피아사 아르메리나까지 차로 두시간 정도 걸렸다. 마을은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어 넓게 펼쳐진 주변 지역을 내려다 보는 멋진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피아사 아르메리나는 풍부하고 다양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발견된 유적의 조사 결과는 마을의 기원이 로마의 통치 기간 이전 선주민들이 정착했던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양한 역사적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9세기 아랍인에 의해 정복되면서 시칠리아가 외부로 알려지면서 부터다. 이외도 비잔틴, 노르만 및 스페인 지배를 포함하여 다양한 통치자들을 겪으면서 이 마을의 건축, 문화 및 전통에 각 시대별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명소 중 하나는 빌라 로마나 델 카살레 Villa Romana del Casale이다. 서기 4세기에 지어진 매우 넓고 복잡한 구조를 가진 로마 대저택이다. 3,500㎡ 면적의 이 대저택에는 총 63개의 방 있다. 그 중 40개의 방의 바닥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으며, 나머지 23개의 방은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당시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데 그 생생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각 방들은 당시 로마의 생활과 문화를 보여주는 풍부한 자료로 가득하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람객들이 너무 많아 방마다 자세히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꼼꼼히 살펴보려면 하루 종일 구경해도 시간이 부족할 테니 말이다. 저택 바깥에서 대략적인 설명을 한 가이드도 실내에 들어 오자 우리 스스로 감상하도록 말을 최대한 줄였다. 시칠리아에 온 뒤 외국관광객들을 제일 많이 만난 곳이 여기인 듯 같다.
각 방마다 다른 주제와 스타일로 꾸며져 있으며, 로마인들의 취향과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다. 동물 사냥 장면이 표현되어 있으며, 신화 속 인물들과 동물들도 있다. 특히 60미터에 달하는데 글레디에이터 경기를 위해 보내질 동물을 사냥하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다.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사냥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땀을 흘리며 여러 명이 혼신을 다해 사냥하고 있다.
또 당시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은 물론이고 여러 속국에서 다양한 의상을 입고 공물을 바치기 위해 줄을 늘어선 사신들의 모습, 현대적인 비키니를 입고 공놀이를 하는 여자노예들의 모습도 자세히 그려져 있다. 푸른 눈에 금발을 가진 게르마니아 노예부터 검은 피부를 가진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들까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카르타고를 격파하고 게르마니아, 갈리아, 그리고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까지 정복한 로마의 역사가 여기에 다 있다.
역사에 관심이 깊은 박사장님 부인은 새로운 방에 들어설 때마다 펼쳐지는 흥미로운 모습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꼼꼼히 살펴보다 항상 뒤쳐지는 바람에 내가 다른 일행과 중간쯤 보조를 맞추면서 따라가야 했다. 사진은 박사장님이 전담하기로 한 것 같다. 최사장님 부부는 다음 방에 들어설 때 마다 모자이크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는데 가만히 들어 보니 폼페이에서 본 모자이크보다 훨씬 다양하고 잘 보존된 탓에 많이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전사장님 부부는 일행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따라다니는 바람에 이 아름다운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했을 지 싶다.
프레스코 벽화도 보존 상태가 나쁘지 않았지만 색깔이 다른 돌 조각 하나 하나를 짜맞춘 바닥의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은 특히 놀랍다. 지금도 전혀 변색이 없고 훼손도 거의 되지 않은 채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산사태와 홍수 때문에 오랫동안 묻혀 있다 19세기 때 재발견되었고 20세기에 와서야 발굴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1,700년의 세월을 옮겨 놓은 타임캡슐인 셈이다. 나는 이 유적을 본 뒤 부터는 2,000년 로마의 역사는 왜곡이나 과장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모자이크에 당시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이 방들은 4세기에 지어진 것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다양한 기능과 용도를 가지고 있다. 현관, 정원, 목욕탕, 식당, 침실, 도서관, 사무실, 창고 등이 다양한 용도의 방이 있다. 근처의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이용한 상하수도 시스템도 구축이 되어있다. 수원지에서 보내진 물은 수조와 분배탑을 거쳐 수로와 파이프를 통해 대저택 안과 밖의 정원, 분수와 목욕탕에 공급된다. 이 물은 또한 바닥 난방 시스템인 하이포코스트hypocaust에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이포코스트란 고대 로마의 저택, 공중목욕탕 등에서 바닥이나 벽을 가열하는 난방시스템이다. 외벽의 바닥 밑에 있는 아궁이에 땔감을 지펴 넣어, 열기를 바닥 아래로 보내서 벽체내에 뚫린 통기로通氣路, 또는 벽체와 마감재와의 사이에 만들어진 틈새를 통해서 벽을 데운다. 배기는 건물의 상부에서 옥외로 하는데 우리나라의 온돌과 비슷한데 바닥보다 벽을 데우는 것이 주목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또한 목욕탕과 화장실에서 나오는 폐수와 오물은 땅 밑의 배수관을 통해 대저택 밖으로 배출되는 하수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로마인들이 위생과 공중 보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목욕탕은 네 개로 되어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은 남성용 목욕탕으로, apodyterium(탈의실), frigidarium(차가운 목욕실), tepidarium(미온 목욕실), caldarium(뜨거운 목욕실), laconicum(건식 사우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여성용 목욕탕은 남성용보다 작고 간단하며, frigidarium과 caldarium만 있었다. 또한 손님들을 위한 작은 목욕탕과 독탕도 있었다고 한다. 목욕탕은 로마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여가를 즐기고 위생과 건강을 챙기며 사교와 정치를 펼치는 공간이었다.
빌라 로마나 델 카살레를 지은 사람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몇 가지 추측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추측은 이 대저택을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지었다는 것이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공동 통치를 했으며, 시칠리아 섬 출신이었다. 자신의 고향에 멋진 저택을 지어서 자신의 권위와 부를 과시하고 싶지 않았을까? 또 다른 추측은 이 대저택을 로마의 귀족이나 장군이 지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시칠리아에서도 로마에서와 같이 안락하고 호사스런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당시의 모든 생활상을 영화보듯이 생생하게 관람할 수 있지만 정작 누가 왜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니 좀 의아하다.
피아사 아르메리나는 로마보다 더 로마 같다. 이 사실만으로 코로나 코로나 격리해제 후 어렵게 첫 여행지로 택한 이번 시칠리아 여행은 충분히 보상받은 기분이다. 피아사 아르메리나의 로마유적을 들러 보고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로 시아카의 베두라 리조트로 향했다. 해가 진 뒤 도착하여 주변의 풍광은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아주 아름다운 곳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내일이 기대되었다. 긴 하루여서 체크인을 하고 바로 간단한 저녁식사를 했다. 객실은 모두 해변에 접한 방갈로 스타일이었는데 식사 후 모두 바로 방으로 돌아가 쉬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바다위에 비친 달빛을 보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