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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승 Oct 25. 2023

유럽의 고향 시칠리아(2)

타오르미나 언덕의 카바렐리아 루스티카

우리가 카타니아 공항에 도착한 것은 일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원래 스케줄은 루프트한자 항공편으로 뮌헨을 경유하여 팔레르모로 입국하여 카타니아에서 출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항공권 예약 후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뮌헨 – 팔레르모’ 연결편이 불가능해졌다. 러시아 영공을 통과할 수 없어 ‘인천 – 뮌헨’ 비행시간이 2시간 이상 늘어난 탓이다. 러시아 상공을 통과하지 않는 터키 항공으로 변경했는데 터키항공은 팔레르모로 가는 연결편이 없고 이스탄불 – 카타니아 노선 밖에 없다. 그래서 입국뿐만 아니라 출국도 카타니아에서 해야 했다. 마지막날 팔레르모 일정을 마치고 4시간 차를 타고 다시 카타니아로 와야 된다.


항공스케줄이 꼬이는 바람에 카타니아 공항으로 입국하여 오전 10시경 타오르미나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얼리체크인이 안된다고 했다. 인천 출발 때까지 확답은 못 받았지만 가급적 편의를 봐 주겠다는 말에 기대했는데 낭패다. 위드코로나로 전환한 이탈리아는 2021년 11월부터 외국인 입국을 허용했는데 코로나 이후 첫 번째 맞는 시즌이라 대부분 고급호텔이 풀부킹인 탓이다. 하는 수 없이 1시간 거리에 있는 아웃렛에 가서 쇼핑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장시간 비행 후라서 그런지 모두들 쇼핑이 그렇게 즐거운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호텔 풀장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우리 일행은 오후 3시쯤 체크인을 하고 휴식을 취한 뒤 5시경 로비에 나오니 현지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호텔 뒤쪽에 있는 원형극장만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이드는 호텔 뒤 언덕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언덕을 올라서자 커다란 유적이 나타났다. 그리스 원형 극장이었다. 가이드 말로는 지금도 음악 공연이 때때로 열린다고 한다. 아니게 아니라 그때도 공연을 준비하느라 무대 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일을 하고 있다. 커다란 앰프를 설치하고 있는 것을 봐서 팝음악 공연인 것 같았다. 일행들만 없었다면 나머지 일정을 조정해서라도 관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 팝오케스트라 음악을 즐겨 듣는데 그중에서도 엔리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를 좋아한다. 그의 공연을 평생 한번 현장에서 들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2020년 고인이 되었으니 이제 실현 불가능한 버킷 리스트가 되어버렸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리스 유적인 타오르미나의 원형 극장 역시 로마시대 때 빨간 벽돌과 시멘트로 대리석 기둥 사이를 막아 투기장으로 개조했다. 하나의 유적에 두 시대의 경계가 육안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흥미롭다. 그런데 원형극장의 무대를 한참 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해안가 언덕 위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던 정명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렇다! 정명훈이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 간주곡을 지휘하던 모습을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다. 그 장소와 꼭 닮았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내 기억이 맞았다. 정명훈이 2017년 G7 정상회담 때 이곳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다른 정상들을 포함한 관객들을 위해 라 스칼라를 지휘했다고 한다. 정명훈이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지휘하던 모습이 떠오르며 순간 전율이 흘렀다. 그 공연이 있었던 현장에서 무대를 내려다보니 마치 내가 그때 있었던 것처럼 듯 감동이 밀려왔다. 이번 여행을 떠날 때 기대하지 않았던 소득이다.

2017년 G7 정상회담 때 정명훈이 라 스칼라를 지휘했던 타오르미나 언덕의 원형극장
이번 여행 때 방문했던 타오르미나 원형극장의 모습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 오페라는 피에트로 마스카니Pietro Mascagni가 작곡하였는데 우아하고 격조 높은 다른 오페라와는 달리 서민적이고 평범한 사랑을 담고 있다. 이 오페라의 간주곡 인터메죠intermezzo는 영혼을 울릴 만큼 깊은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선율로 구성되어 있어 국내외의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다.


나는 한가한 주말이면 음악을 듣곤 한다. 한번 몰입하면 몇 시간씩 빠져들기도 하는데 집에 오디오가 거실에 있다 보니 마음먹고 음악을 들으려면 집사람과 딸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음악을 즐기지만 오디오 매니아라고 하기에는 게으르기 짝이 없다. 고가의 오디오이지만 서버를 연결하여 고음질 음악을 다운받아 주로 듣는다. 매니아라고 하면 LP나 CD 음반 수집은 기본인데 나는 귀찮아서 포기한 지가 2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래서 내 오디오에는 턴테이블이나 CD플레이어도 없다. 최근에 TV를 95인치로 바꿨는데 사운드바를 공짜로 받았다. 그 이후부터는 오디오도 자주 틀지 않는다. 특히 실황공연 음악은 사운드바에서 뿌려주는 입체적인 사운드와 눈앞의 대형화면에서 펼쳐지는 카메라에 잡힌 섬세한 장면과 어우러져 깊은 현장감과 몰입감을 느끼게 한다. 고급 오디오에서 듣는 스테레오 음악보다 더 감동적이다. 특히 심신이 지치고 위안이 필요할 때 타오르미나에서 정명훈이 지휘한 오페라 카발렐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을 유튜브를 통해 감상할 때는 더욱 그렇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감동에 젖었다 깨어 나니 여러 나라의 언어가 들린다. 관광객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그중 대구에서 온 한 부부를 만났다. 60대 전후인 듯 보였다. 우리 일행과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었는데 매년 한 번씩 이렇게 역사탐방과 음악기행을 묶어서 한다고 한다. 이번에는 시칠리아에 오기 전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루체른 음악제에서 오페라를 관람하고 왔다고 했다. 궁금했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는지, 아니면 은퇴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초면인 데다가 외국이어서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 그런 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바빠서 미루어 두었던 일들을 이제 여유가 생겨 실천하는 게 아니었을까. 나는 그들의 여유로운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울메이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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