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은 다 많은 말들을 하고, 글을 쓴다. 특히 자기 주변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심지어 뒤에서 흉도 본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뒷 담화를 해도, 끝까지 말하지 않고 숨기는 일들이 있다. 특히 가족사이다. 더구나 그 가족이 지금 살아있다면,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 대한 예의이며, 마지막 자존심이며, 또한 누워서 침을 뱉는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식이 다른 이에게 사기를 쳐서, 감옥에 4-5년 썩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본인도 수치스러운 일이니까.. 자식이 살인을 해서 무기징역을 받은 부모들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평생 가슴에 짊어지고 있다. 자식과 함께, 세상 감옥에 살고 있다. 꽃다운 나이에 아이를 떠나보낸 부모도, 그 아이와 함께 저승에 살지, 이승은 의미가 없다.
어떤 자식은 세상이 버거워 목숨을 스스로 버렸다. 그러나 남겨진 그 부모는 누구에게도 그 충격과 슬픔을 차마 말할 수 없다. 세상의 남은 모든 시간이 멈춰 선 듯 아찔한 절벽 끝에 있을 뿐이다.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무거운 바윗덩이에 짓눌려 살뿐이다. 우리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도박하는 사람과 근처 도숙자(도박장 옆에서 노숙하는 사람)가 우리나라에 200만이라 한다.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거의 수십만에 이르고, 게임 중독, 포르노중독, 공황장애에 빠진 자녀들이 많다. 검은 커튼 안에 사는 그런 자녀의 마음 안을 볼 수도 없어서, 부모의 마음에도 늘 검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나오지 않고, 씻지도 않는 자녀에게, 매일 밥을 방으로 차려준다. “밥이라도 먹으라”라고 하며 돌아서 나온 부모는, 차마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눈물과 한숨을 먹는다. 냄새나는 방안을 기웃거리는 부모에게, 이 자식은 원수보다 못하다. 이 악연의 고리를 떼어 낼 수도 없다. 그렇다고 굶길 수도 없다.
언젠가 스스로 저 터널에서 돌아올 일말의 희망 하나를 붙들 뿐이다. 그런 고통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다. 그러면 그 소문은 더욱 켜져서, 부메랑이 되어 그 가정을 부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부모 외의 사람에겐, 다 가십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살고 있다.
여리고 곱게 자라던 아이가 갑자기 우울증과 정신분열을 겪으며, 모든 문을 걸어 잠글 때, 부모는 세상에서 말의 문을 걸어 잠근다. 더 심해져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향해 소리 지르고, 악을 쓰는 자녀는 독한 약에 절어있다. 멍하니 모든 것에 무관심해져, 초점을 잃은 자녀를 쓰다듬다가 울음을 삼키고 온다. 부모는 그 자식의 몰골이 떠올라, 어디 마음대로 놀러 가지도 못하고, 세상 병원에 갇혀서 지낸다.
또 마약에 절어서 나오지를 못하는 아들을 끌고 경찰서로 가서 감옥에 넣은 부모도 있다. 그러나 내 자녀가 마약 중독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이후에 아이가 정상이 되었을 때, 주변으로부터 받을 선입견과 무시를 알기 때문이다. 차마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아픔이다. 우리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아픔들을 체증처럼 가지고 있다.
겉으로는 아주 인자하고 직위도 괜찮은 남편이 가정에서는, 말의 칼날을 서슴없이 찌른다. 화나면 집안의 기구들을 집히는 대로 던지는 폭군이며, 이중적인 사람임을 어디에도 말할 수 없다. 사회적인 위치와 그 수입을 받고 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자녀들에게 어떤 누가 될까 봐, 더욱 말할 수 없다. 이혼하면 해결될 것 같으나, 결정이 쉽지 않다. 폭력의 상처는 다시 이혼녀라는 상처를 문지르는 소금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말할 수 없는 것을, 가슴에 억누르고 살아낸다.
누구나 가슴 저 구석에는 말할 수 없는 응어리들을, 가지고 있다. 그 응어리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생을 빗장처럼 걸고 산다. 침묵의 잠긴 문이다. 그 문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세월이 가면서, 그런 닫힌 문들끼리는 서로를 기웃거려 보면 위로가 될까?. 그 문들 안에 문드러진 가슴끼리 말없이 안아주면 조금 나을까? 가슴속을 저미듯 불어대는 칼바람이 훈풍이 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우리는, 나는, 차마 아직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자들에게 더 힘든 것은 그런 일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무관심과 침묵이다. 이중고이다. 믿는 자에게 일어나는 이 비참한 상황에 대해 스스로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겨우 이유를 알 수도 있고 끝까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침묵에 대해 우리는 신앙의 가슴앓이를 한다. 그 기간이 10년-몇십 년이 될 수도 있다. 상황의 변화 없이 그때를 견딤이 고통이다. 그러나 그런 견딤이 능력이며, 사랑임을 알아가기까지 우리는 많이 아프다. 그리고 그 아픔은 주님의 아픔을 이해하고 조금 동참하는 시간이 된다. 영광은 고난을 통과해야 하는 온다는 역설은 주님이 먼저 이루셨고, 그 일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신다.
가장 사랑했던 나사로를 죽음에 두신 이유이다. 기별을 받고도, 죽기까지 오지 않은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게 고난의 인생이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사로는 주님의 죽음도 이해했고 주님의 부활을 더 실감했고, 주님을 더 신뢰했을 것이다. 주님이 더 사랑해서 주시는 고난의 잔을 네가 마실 수 있느냐? 네가 견딜 수 있느냐? 그 고통의 잔을 통해, 주님이 너를 더 사랑해서 주신 잔이라는 이 아이러니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