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투하던 개척자 아버지
어릴 적 아버지를 자주 본 기억이 없다. 아마 돈을 버느라 바빴을 것이다. 당시엔 다 가장이 일에 매달려 사는 시대였고, 벌이도 쉽지 않았다. 집안에 할머니와 엄마의 알력들이 싫었을 것이고, 또 장애인 나를 보는 것이 속상했을 것 같다.
한 기억이 있는데, 9살 적에, 아버지가 나를 차에 태워서 (사실 다른 사람도 갔을 텐데, 기억이 없다) 강가 다리 밑에 놀러 갔다. 차를 많이 타보지 않은 나는 가는 도중에 멀미하고 토했고, 다리 밑에서 아버지는 나를 안고 사진을 하나 찍은 것 같다. 이렇게 안고 사진 찍는 아버지가 있구나!라고 느꼈던 첫 기억이다.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다. 그분의 인생 서사는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듯, 굴곡 많고 억척의 삶이었다. 아버지는 9살에 할머니와 둘이 남하한 이북 사람으로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만 다닌 아버지는 배우지 못한 한을 늘 가지고 있었다. 돈을 벌지 못하는 할머니와 먹고살기 위해, 9살 때부터 산에서 나무해서 팔고, 온갖 머슴 일을 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타향살이였다. 겨우 주유소에서 심부름하다가, 주임 자리를 얻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술만 드시면 그때의 서러운 이야기를 하신다.
살아내야 하고, 먹고살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셨고, 당시의 타향살이가 그렇듯, 누가 날 속이지 않는가 하는 두려움이 늘 있었다. 다섯 명의 자식들을 굶기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운지도 모른 체, 앞만 보고 돈을 향해 달려가는 삶이었다. 수많은 적과 싸우는 전쟁터가 인생이라고 터득하신 것 같다.
찢어질 듯 가난해서, 예방주사를 맞히지 못해서, 내가 소아마비에 걸렸으니, 돈이 한이자 목표였다. 그리고 주위에는 일가친척, 아무도 없는 혼자이니, 항상 누군가가 자기를 등치거나, 속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사셨다. 그래서 우리 가훈은 <속이지 말고 속지 말자!!>였다. 아버지의 얼굴은 무거운 책임감에 준엄한 얼굴이었다. 우리가 어릴 때는 함부로 말을 붙이지도 못했다. 아버지의 삶은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이, 처절히 몇십 년의 무거운 짐을 혼자 감내해야 했다. 짐을 벗은 뒤에는, 과거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과 자식에게 과시와 분통이 뒤섞인 몇십 년을 지내셨다. 아버지의 얼굴은 불안과 비장함, 외로움과 과시욕이 같이 있었다.
드디어 내가 초등 6학년 때, 당시 성장판을 닫는 수술을 받던 때에, 아버지는 엄마와 이혼을 하셨다. 이미 내연녀가 있었다. 더욱 아버지를 보는 것이 드물었다. 때로 엄마가 학교로 찾아오면 몇 가지 선물을 들도 왔는데, 나는 선물 받는 것이 좋았다. 동시에 들킬까 봐 두려워했다. 드디어 들키었고, 나는 얻어맞았다. “그년이 나를 얼마나 무시했는데.. 더 만나기만 해 봐라.”라고 화를 많이 내셨다. 그래도 그런 말을 엄마에겐 못 했고, 가끔 만났다.
드디어 새엄마와 한 가족을 이룬 고등학교 때, 기타를 배운다고 띵가띵가 기타 줄을 튕기는 것을 본 아버지가 그 기타를 내리치며 부순 기억이 있다. “너는 자립해서 먹고살아야지 이런 기타, 글 쓰는 나부랭이 하면 누가 너를 먹여 살려 주냐고!!” 호통하셨다. 나는 스스로 독립해서 먹고살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
당시 여고에 다닐 때 우리 집은 산 밑이었다. 아버지는 자기 차로 출근하면서도 나는 그 산꼭대기를 걸어 내려와서, 버스를 타고 가게 했다. 아버지의 훈련 방법이었다. 덕분에 나는 보조기를 찼음에도 당당하게 남학생 앞을 잘도 다니는 배짱이 생겼다.
대학시험 발표 하루 전날에,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성적은 좋은데, 몸이 장애라, 치대는 못 가고, 생물과 장학생으로 오면 좋겠다”는 권유였다. 나는 울고불고, 아버지는 “보따리를 챙겨라”하고 5시간 차를 몰고 학교 총장실로 무조건 나를 데리고 갔다. 총장이 나오자, 아버지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딸을 치대에 넣어주세요” 하고 빌었다. 나는 아버지의 또 다른 얼굴을 보았다. 장애 딸을 위해 무릎 꿇고 빌고 있는 부성애의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이런 아버지는 평생 약해지지 않을 강인함만 있을 것 같았다. 예수님을 믿으시라고 전도하면, “내 주먹을 믿어라”라고 교만하셨다. 100억 이상의 자산을 가진 사업에 성공했지만, 당시 모든 아버지가 해 주는 아파트 하나 자녀에게 사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투자 실패이다. 그러나 사업하는 사람은 그런데 돈을 쓰지 않는 것이 본인의 사업원칙이라고 하셨다. 단 하나 나에게는 건물을 살 종잣돈을 빌려주셨다. 동생들에게 3천만 원씩을 갚아가는 조건이었다. 물론 다 갚았다. 아버지의 돈의 위세는 컸다.
그리고 새엄마의 여러 가지 이간질이 있었다. 물론 우리에게 너무 잘한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지지 않는 방법이, 우리를 이간시키는 것이었다. 아버지께 자식이 이렇게 못 한다고, 고자질하면서 자신의 위상을 올리는 작전을 썼다. 그런 새엄마의 말에 아버지의 얼굴은 분노에 찼다. 우리는 자주 한밤중에 첫째, 둘째 아들 며느리를 불러 놓고 호통치는 자리에, 중재자로 가야 했다. 쩌렁쩌렁한 아버지의 화난 소리와 새엄마의 말리는 소리가 밤을 갈랐다. 자식들은 죄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주유소와 택시업이 번창하였는데, 어느 날 유류파동이 난다고 그 업을 그만두고, 채석장을 인수했다. 그때부터 7년간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채석장의 고물 기계가 멈추면, 아버지의 심장도 멈추는 듯했다. 기계 수리에 몇천만 원이 들고, 수리하는 10일 동안 채석을 중지하니, 아버지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채석장은 곧 광산과 같았다. 발파 작업을 하다 인부가 죽고, 그 유족들이 채석장에 진을 치고 데모를 하였다. 무릎 꿇고 빌며, 오랜 재판과 합의 과정이 있었다. 그동안 채석장은 점점 적자가 되었다. 그래도 그런 상황에서 7년을 어떻게 버티었는지, 모두가 아버지의 뚝심에 놀랐다고 한다. 우리는 먹을 쌀이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몸부림으로, 차관을 받아 새 채석 기계를 들였다. 우습게도, 당시의 건설 붐과 맞물려 1년 안에 모든 빚을 청산하고 대박이 났다. 광산의 노다지와 같았다.
그러다가 옆의 경매가 난 공장을 인수했는데, 그 회사를 정상으로 하는데 돈이 수없이 들어갔다. 과욕이었다. 그 사업에 올 투자하다, 본 사업까지 망했다. 1년 동안 독한 술만 먹던 아버지에게 암이라는 병이 왔다. 사업 대성공에서 망하는 것이 이렇게 한순간인가 싶을 정도로, 신기루 같은 재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약해지지 않았다. 혹 자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왜 없었겠냐 마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온갖 치료와 아픈 세월을 5년 이상 견디고, 가셨다. 어느 날, 아이들 때문에 외국에 가는데, 아버지가, “가지 말고 옆에 있어라”라고 하셨다. 지독히 외로우셨던 것이다. 그때 복음을 전했다. 생의 끝이 오고 있음을 안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었다. 그런 약한 모습이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결국 시궁창 같은 탈북민의 삶에서, 화려하게 성공해서, 모든 삶을 떵떵 거리며 살다가,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는 인생이 가져다주는 온갖 얼굴들을 다 겪다가 삶을 내려놓으셨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우리에게 한탄하지 않으셨다. 강인하고 당당하게 삶을 마주하셨다. 혼자 감당하셨다.
그러나 한편으로 삶은 사망의 골짜기와 암벽등반 같은 아찔함이 있고, 정상을 누리듯 찬란하던 때,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는 허무가 공존하는 엄청난 서사가 있는 것을 본다. 그 안에 몸부림치며, 큰소리치며, 때론 울부짖으며 인생을 살아낸 아버지의 얼굴은 분투하신 황야의 개척자였다. 동시에 평생을 고향을 그리워하며 외롭게 타향에서 생을 접은 탈북민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