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삶은 폭삭 속았수다

by 선지은

엄마의 삶은 폭삭 속았수다

이 제주도 방언은 <엄청 힘들었다>라는 뜻이란다. 그러나 난 그냥 폭삭 속았어요도 의미도 그 안에 있다고 느껴진다. 정말 속아 사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엄마>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각자 다 다를 것이다. 내게 <엄마>는 자존심이라고 떠오른다. 어릴 적 제일 교포인 할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초등학교 때에 건너왔다. 8남매가 다 쟁쟁한 가운데 공부해서, 거의 다가 의사, 교수, 간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엄마는 대학 1학년 때, 초등도 못 나온 아버지에게 폭삭 속아 시집을 왔다. 당시 아버지는 군인으로 장교 차를 몰았는데, 지프차가 귀하던 그 시절에 너무 멋져 보였다. 그때부터 폭삭 속아온 삶인데, 그나마 남은 엄마의 자존심이, 그런 속음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무식하고 가난한 데다, 엄하고 못된 성격의 남편과 독자 홀시어머니의 시샘과 분노까지 더해진 혹독한 시집살이에 오직 붙든 건, ‘그래도 나는 너네보단 낫다’라는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은 모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사사건건 미운털이 박혔다. 남편 생일에 양말을 샀는데, 시어머니 것을 같이 안 샀다고, 시어머니는 새 양말을 싹둑 잘라버렸다. 결국은 아버지의 외도와 할머니의 핍박 속에 이혼을 당했다. 1970년 당시에 두 집 살림은 많았으나, 이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당시의 여성에게는 치명적인 흠이었고, 집안의 수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나, 이혼이 많다 보니 용인될 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미워한 할머니가 거의 돌아가실 때 즈음에, 네 엄마를 한번 만나보자고 했다. 그때, 할머니는 새엄마의 이중성을 자주 보았다. 그런데 나는 너무 어려서 아버지가 무서울 뿐이었다. 미워하는데, 눈치를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이혼 가정, 또한 새엄마를 맞이한, 찢어진 가정의 비애이다. 특히 자기 소속과 주도권을 찾으려는 새엄마의 여러 술수로 인해 자녀들은 비참한 지경으로 몰렸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엄마는 ‘자존심’으로 버티다가, 자존심으로 이혼당하고, 자존심으로 나머지 이혼녀의 삶을 살아내 왔다. 지금 90여 세에 치매가 심한 삶도 여전히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있다. ‘그래도 나는 이런 거는 잘났고, 학교 때 운동으로 날렸다’라는 자존심이다. 그 자존심이 폭삭 속게 했고, 이혼당한 삶을 만들었고, 그 후를 지탱하는 힘이 된 것이다.

46세의 이혼녀의 삶이 어찌 쉬웠겠는가? 언니 집에 얹혀살면서, 이것저것 손대 보았지만 결국은 실패했고, 변변한 직업을 가지지도 못했다. 어쩌면 차라리 엄한 남편 밑에서 지속적인 학대를 당하는 것보다, 더 창피하고 자존심 상하는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엄마 없는 집에 친구들을 데려올 수도 없었고, 새엄마가 온 이후로, 거의 집안 사정을 숨기기에 바쁜 학창 시절이었다. 20살이 넘어서야, 그래, 부모 인생은 부모 거, 나는 내 인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잠시 홀로 사는 가벼움도 누렸으리라 보인다. 그것조차 없었다면 어찌 홀로 외로운 인생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홀로 정하고, 놀러 가고, 외국도 가고, 자유로운 시간이 있어서, 그나마 살아진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 20년의 기간 동안 더욱더 독립적인 사고들이 생겼던 것 같다.

그런 시절을 지내던 엄마가 내 나이 37, 엄마 나이 60세에, 아버지에게 항변하며, 내 곁으로 모셔왔다. 그전까지 우리 자녀들은 거의 아버지에게 엄마에 대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새엄마가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도 나이가 들자, 배짱이 좀 생겨서 그 엄마도 엄마니, 언제까지나, 이모 도움으로 살게 할 수는 없다고 모셔왔다. 처음 작은 아파트를 사서 이사하던 날, 엄마 눈에 눈물이 흘렀다.

그때부터 엄마는 자주 아버지 모르게, 우리와 왕래했고, 이것 또한 새엄마의 불안 요소이기도 했다. 물론 아버지의 아들과 며느리는 아는 체,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자녀를 키우는 희로애락이 없었다. 이혼당한 가슴 아프고 억울한 남편과 시집살이의 한만 가슴에 사무쳤다. 우리를 만나면, 늘 한과 분함이 이야기의 주제였다. 불쌍한 아이들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달라는 넋두리가 더 많았다. 자식에 대한 애틋한 정보다, 자신의 처지가 더 급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서서히 나이가 들면서 그것도 사라져 갔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새엄마도 빨리 돌아가시자, 모든 분노가 눈 녹듯이 녹았다. 80세가 지나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니, 남은 것은 시간의 싸움이다. 하루하루가 그냥 숨 쉬는 것이다. 10분 전의 일을 잊어버림에도, 순간의 즐거움은 몸이 기억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엄마가 나를 키운 12년 시간만큼, 내가 엄마를 보살피고 있다. 나도 엄마를 닮은 걸까? 사랑보다는 의무감이 크다. 사실 내 나이 70에 장애로, 몸도 힘드니 지치고 짜증이 날 때가 있다. 나는 이런 ego까지 엄마를 닮았다...

자존심 하나로, 핍박과 바람난 남편 밑에서 13년을 참고, 자존심으로 이혼의 삶을 견뎌내고, 자존심으로 삶의 끝자락의 치매도 이겨내고 있다. 폭삭 속은 삶은 폭삭 속았수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