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엄마; 불안의 몸부림
새엄마를 가족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볼 때,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다. 어릴 적 많은 부를 가지고 재일교포인 아버지를 따라 8살에 한국에 왔다. 그때가 1955년경인데, 등에 가방을 멜 정도로 부자였다. 60년 초까지도, 우리는 거의 책보자기를 가지고,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제일 큰 오빠가 사업하다가, 순식간에 속임 당하고, 사놓은 모든 땅을 다 잃고 폭삭 망했다. 엄마 나이 16세 때엔 집에 먹을거리가 없었다. 오빠는 이미 미국으로 도주했고, 언니는 시집갔고, 밑에 동생만 3명 있는 소녀 가장이었다. 매일 석회 화투에 풀을 붙이거나, 돌가루 봉지 접은 일당으로 겨우 풀칠을 했고, 둘째 손가락은 풀에 퉁퉁 불어 있었다.
그러다가 19살에 예쁜 얼굴로 화류계에 발을 들이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냈다. 거기서 아버지를 만났다. 얼마나 예쁘게 생겼는지, 긴 눈썹에 쌍꺼풀진 눈이 김ㅈㅁ를 닮았다. 어떤 감독이 영화배우 하자고 할 정도였는데, 이미 아버지가 기둥서방이었다. 그렇게 모은 돈을 거의 아버지 사업에 주었고, 결국은 이혼한 아버지를 따라 우리들의 새엄마가 되었다.
처음 새엄마 집에 갔을 때가 기억난다. 중 1학년에 아버지가 거기 데리고 갔는데, 일단은 집이 너무 깨끗했고, 모든 반찬이 단짠으로 맛있었다. 하필이면 화장실에 휴지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엄마”라고 불렀다. 당황한 나를 보고 얼마나 잘해 주던지, 있는 동안 공주 대접을 받았다. 아마 내가 엄마라고 불러서 더 기뻐했을 것이다. 새엄마는 내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그때 이미 나는 돈맛을 본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에 우리는 산 근처 큰 집으로 이사했다. 난 두렵고 슬펐다. 무서운 아버지와 새엄마와의 생활이 어떨지 두려웠다. 자주 안 오던 아버지와 계속 살게 되는 것이 두렵다니, 우리 가족은 이미 조금씩 찌그러져 있었다. 또 맏이인 나는 동생들의 대변인이 되어야 했다. 그때, 홀로 절뚝거리며 슬픔 가운데, 집에 가는 길에, 노을 속에 교회 종탑을 보았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미래가 두려웠다. 조물주가 있다면 나를 도와 달라는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는 4살 된 여자아이와 같이 왔다. 엄마 딸인 줄 알았지만, 집 앞에 있던 업둥이였다. 유전자 검사는 안 했지만, 우리는 아버지의 아이라고 단정했다. 새엄마는 이미 아버지의 아이를 한 번 중절했고, 임신 불가였다.
새엄마와의 삶은 한마디로 가면과 차별이었다. 우리한테 정말 끔찍이 잘해 주었다. 학대도 많은 세상에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아주 작은 것에 차별을 느꼈다. 실은 이것도 어릴 때의 속 좁은 생각이다. 막내는 엄마가 씻는 향수 나는 비싼 외제비누로 씻기고, 우리는 딱딱한 알뜰 비누로 씻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픈 일이다.
할머니에게, 우리에게 잘 보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우리도 따랐다. 그러나 남자 형제들은 비뚤어진 사춘기를 보내게 되었다. 첫째는 머리가 좋아 공부를 정말 잘했으나, 거의 시내 패거리가 되어 공부에 손을 놓았다. 둘째는 아무 말 없는 아이가 되었다. 나는 교회에 열심 내고, 서울의 대학을 탈출구로 생각하며, 공부했다. 막내가 제일 안 되었다. 엄마는, ‘여자는 남자 잘 만나서 팔자 고치면 된다.’가 주된 의식이었다. 거의 그런 삶들만 보고 왔을 것이다. 그것이 막내에게 주입되어, 밑에 두 자매는 무용에, 예쁜 꾸미기로 키워졌다.
나는 공부에만 열중했다. 내가 서울의 대학을 간 뒤, 두 여동생에게 미안하다. 거의 돌봄을 못 했다. 나도 내 살기가 벅찼다고 변명해 본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큰일들이 되어 돌아왔다. 남자 형제들이 싸움이나 술로, 사고를 칠 때마다, 새엄마는 아버지 모르게 많은 것을 해결해 주었다. 결국은 퇴학조치가 되기 전에 서울로 학교를 옮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로 새엄마의 소속과 위치가 점점 중하게 되고, 아이들은 못된 망나니들로 아버지께 비추어졌다. 일정 부분은 사실이기도 했다. 이것이 이혼 후에 새 가정에서 맞게 되는 찢어진 가정의 아픔이었다.
아이들이 결혼하자, 새엄마는 더욱더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기 위해, 아들 며느리에 대해 아버지께 잘못된 고자질을 하기도 했다. 때로는 두 며느리, 사이도 이편, 저편 만들며 이간질을 했다. 어떤 때는 아버지가 “못된 아들 며느리 같으니라고” 하며 오밤중에 호출되어, 밤새 큰 호통을 들었다. 심지어 집에 못 들어가고, 마당에 무릎을 꿇게 했다. 그러면 새엄마가 중재하고, 말리고 해서, 해결되었다. 그러면 새엄마의 위치는 더욱 공고해졌다. 나도 오밤중에 자주 불려 가서 중재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 며느리들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새엄마 밑에서 이리저리 휘둘린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엄마 모시는 것은 내 몫이 되었다.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한 것은 그래도 우리 형제들이 반듯하게 자랐다는 것이다. 이상한 성격들은 좀 있어도, 일단 사회에서 폐인이 된 자는 없다. 여긴 은근히 내 자랑도 있다. 나는 그 와중에 치대를 갔고, 이것은 동생들에게도 자극제가 되었다고 본다. 지금도 동생들은 나를 가장 존경하는 누나라고 하니까..^^
새엄마는 정말 아버지에게 잘했다. 이불 천을 일주일마다 새것으로 빳빳하게 갈았다. 물론 파출부가 있었지만, 그래도 쉬운 것이 아니다. 아버지 식사가 끝나면, 곧장 옆에서 손에 약을 들고 대령하고 있었다. 어릴 적 일본 영향인지, 화류의 영향인지 몰라도, 이건 하라고 해도, 못 할 만큼, 애교 천지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화내면 일단 저 멀리 도망부터 가 있는 지혜 있는 처신가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본인에게 얼마나 스트레스였을까? 그러나 티도 내지 않고 모든 것을 잘 감당했다.
엄마는 항상 친구들을 집으로 불렀다. 담배 피우고, 드링크를 늘 먹고, 고스톱 치고, 외제 물건 자랑하고, 남자들 이야기를 했다. 수입상점이나 백화점에 물건을 사면 모든 친구 것을 다 사주었다. 외국 여행을 갔다 올 때도 그랬다. 그러니 친구들이 항상 득실거렸다. 그 당시 할머니는 우리 형제들이 다 서울서 공부하니, 아예 서울에서 우리를 보살폈다.
그리고 광산업 같은 돌산 채석장을 시작한 뒤로 더욱 힘든 날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세월에 아버지 곁에 있어 준 사람이 새엄마였다. 어느 날,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거의 백억 가까이가 스르륵 사라졌다. 다른 넘어가는 회사를 경매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집과 차는 번듯했다. 그래야 돈을 더 빌려 댈 수가 있었다. 먹을 쌀이 없을 때도 있었다. 새엄마가 그 능수능란한 친분으로 여기저기 외상을 했다. 당시 내가 결혼도 했는데, 내 결혼도 거의 외상 결혼이었다. 패물, 함, 결혼비용, 심지어 집도 월세였다. 억울한 마음에 매일 술을 먹던 아버지가 암이 왔다. 새엄마는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다. 그러나 그 시간이 3년이 지나자, 엄마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입지와 아버지 사후의 일에 초조한 것 같았다.
그때에, 아버지를 속이고 가던 등산 모임에서 어떤 연하의 유부남 남자를 알게 되었다. 자주 만났다. 아버지는 여전히 엄마만 의지하고 믿고 있었다. 거의 아버지의 마지막 무렵에 내가 “아버지, 엄마를 너무 믿지 마세요, 남자도 있어요”라고 했다가 호통을 받았다. “그럴 일 없다. 이간질하지 마라, 혹 남자가 있어도, 그런 여자는 없었다”라고 했다. 그다음부터 말을 못 했다. 아버지는 그 모든 사실을 알았어도, 당시에 거의 남지 않은 재산 중에 가장 큰 부분을 엄마에게 주었다. 큰 저택의 집과 매달 몇백만 원씩 생활비를 주라는 유언장이었다. 당시엔 거금이었다. 우리 자식들은 거의 빚만 남은 회사의 지분을 준다는 종이 한 조각을 받았다. 내겐 그것도 다 나중엔 꽝이었다. 동생이 빚만 남았으니, 포기각서를 쓰라고 했다.
아버지의 사후,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그 연하남과 살림을 차렸다. 내가 적극적으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아마 따뜻하게 대해주는 남자(제비라도)가 그리웠을 것이다. 웃픈 일은 그 남자의 아내도 형님, 형님, 하면서 다녔다. 요지경이었다. 매달의 생활비 외에도, 운전도 못 하는데 가장 좋은 차 사달라 등등, 모든 돈을 다 빼앗아 갔다. 그 세월이 10년 가까이 지난 뒤, 새엄마는 일찍 치매가 왔다. 아마 오랜 기간의 명랑 두통약, 온갖 약의 남용이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엄마가 치매가 오자, 남자는 ‘나는 모른다’ 하고 우리에게 전화했다.
새엄마 집에 갔을 때, 이미 집은 월세로 변경되었고, 많던 옷과 가방은 물론, 가진 밥솥조차도 없었다. 텅장이었다. 그로부터 6년간 요양병원에 있었다. 사실 나는 그 새엄마가 미워, 얼마동안 가지 않았다. 그러나 착한 며느리들은 자주 가 보았다. 내가 갔을 때, 굽어지지 않는 무릎으로 인해 휠체어를 타고 있었고, 기억은 거의 많이 잃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고운 얼굴이었고, 소녀 같았다. 이런 상황을 만든 새엄마가 미워도 불쌍했다.
돌아가실 즈음에 계속 복음을 전했다. 엄마로서 우리에게 헌신한 시간도 먹먹하고, 한 여성으로서 세상에 마음 붙일 곳이 없는 삶이 안타까웠다. 복음을 종종 전했으나, 하나님은 좋은데 교회는 가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임종 전에 “엄마, 우리 키우느라고 너무 고생했어. 고마워, 예수님 믿고 천국에 가야지. 거기서 오래 같이 살자. 새롭게 살자, 예수님, 저를 용서해 주시고, 받아주세요,라고 기도해”라고 계속 말하라고 했다. 엄마는 “아멘”이라고 했다. 다행이다.
새엄마의 삶이 슬프다. 마음이 아프다. 누구보다 예쁘고, 성격도 여성 그 자체고, 정말 예쁜 여성이었는데, 가정의 망함과 화류계와 아버지와 우리를 만난 것, 그리고 떠도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여기저기 자기의 소속을 찾아 헤맨 인생, 정주할 곳을 찾던 삶이 너무 안쓰럽다. 그렇게 스스로가 만든 생의 마지막 허망함이 쓸쓸하다. 사랑과 인정을 찾아 헤맨, 새엄마의 예쁜 눈망울에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