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을 형성하는 개인의 언어적 정의
언니는 나에게 물었다.
"파워가 무슨 뜻이게?"
나는 대답했다.
"힘이지. 힘이 세거나 권력 같은 거?"
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전력이야 임마"
언니는 공대 출신이고 나는 사회과학대 출신이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화가 나서 주절주절 떠들어대면 언니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네가 잘 못한 거라며 아주 고마운 판단을 내려주곤 했다. 형식적이라도 위로 좀 해주면 안 되냐, 언니는 우뇌가 없냐고 물으면 또 똑같은 표정으로 그런 쓸데없는 건 갖다 버리라고 했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가, 각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언어는 그 사람의 관점을 구성한다. 그렇게 보자면 언어가 계속해서 흐르지 않으면 존재는 변화가 없게 된다. 개인은 개별적으로 형성된 자신의 언어의 집 안에서 그것을 전부로 믿고 살 수밖에 없다. 영성 쪽에서 보자면 '프로그래밍'된 대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이 말을 하면 이런 반응을, 저 말을 하면 저런 반응을 보낸다. 프로그래밍되어 있으면 편하다. 생각할 필요를 없애주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생각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굉장히 의아했는데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생각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생각한다는 것'이 너무 피곤하고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을 선택해서 쉬고 싶다는 것을. 즉 생각하는 것이 피곤하기 때문에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최근에는 그것뿐만이 아니라 생각을 통해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머리로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정신적인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며 성장해 나가는 것을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어른의 특권 아닌가.
프로그래밍된 시스템은 무의식을 형성하지만 상황이 닥치면 사고의 과정을 거치는 것만 같다. 왜냐하면 마치 사고를 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낳기 때문이다. 최소한 나에게서 만큼은. 그래서 각자가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물론 나도 그러하다. 언어가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독서가 필요하다. 새로운 언어의 정의가 들어와야 한다. 새로운 목소리가 필요하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폴 부르제라는 프랑스 작가가 했다고 한다. 직관적으로 읽어보면 바로 이해되는 말이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과연 그럴까 의문이 든다. 생각하면서 산다는 건 다양한 범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사는 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상황마다 생각해서 해결해 나가는 게 인간의 삶 아닐까. 이 '생각한다'의 의미를 어떤 상황이나 개념에 대해서 ‘자신만의 관점 또는 자신만의 언어로 내용을 정의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이후는 이해가 된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교육학을 배울 때 ‘안다’라는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로 보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보자면 개개인이 정의 내리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고 논쟁이 될만한 것들을 예측하는 능력이 부족하면 남들이 옳다고 여기는 대로, 원래 그렇다는 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거나 그럴 확률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최근 AI를 주제로 독서모임에 참석했다. AI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본질은 간단하다고 한다. 바로 ‘내가 나로서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 AI는 내가 명령하는 것을 해결해 줄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가진 관점으로 무엇을 해결하고자 하는지, 세상을 바라보는 각자의 관점이 가장 본질적인 지점이 된다. 각자의 생각, 각자의 관점, 각자의 언어가 필요하다. 나 스스로 만들기 힘들다면 나 또한 그러하듯이 책이나 강연 등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같은 결과여도 서로 다른 이유와 논리를 공유하며 생각이 확장되는 매력적인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무엇보다 내가 그런 사람이기를 바라며 책 읽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