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둥근 공의 미학(美學)

축구 4. 골키퍼(下) ①

by 박인권

축구 4. 골키퍼(下) ①


#골키퍼의 조건과 재능

골키퍼의 신장(身長)은 절대 조건에 가까운 필요조건이다. 키가 클수록 두 팔을 뻗었을 때 공중볼 경합이나 다이빙 캐칭, 펀칭, 크로스 볼 처리 등 골키퍼의 필수 임무 수행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골키퍼의 재능을 판단하는 요소로는 ▲위치 선정, ▲반사 신경, ▲순발력, ▲민첩성, ▲동체(動體) 시력, ▲점프력, ▲판단력, ▲침착성, ▲담력, ▲수비 조율 등이다. 후천적 학습과 반복 훈련으로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위치 선정과 점프력, 수비 조율을 빼고는 거의 다 육체적 재능과 타고난 성정(性情)과 관련이 깊다.


필드플레이어들과 달리 골키퍼는 골문을 지키는 포지션이라 늘 골대 앞이 제자리다. 골키퍼의 기본 위치는 골대 중심과 골의 위치를 직선으로 연결했을 때 그 라인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정거리 내의 공의 방향이 골대의 두 기둥 중 어느 한 기둥에 특별히 가까울 때는 가까운 기둥 쪽으로 몇 발짝 이동해 니어 포스트를 겨냥한 슛에 대비해야 한다.


골키퍼의 최우선적 방어 대상은 움직이는 공이다.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공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공을 쫓는 눈, 동체 시력이 좋아야 한다. 공이 움직이도록 인위적인 동력(動力)을 제공하는 필드플레이어들의 동작 하나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수비 뒷공간을 파고드는 상대의 움직임도 선제적으로 포착해 동료 수비수들에게 일깨워줘야 한다. 골문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인 골키퍼의 실수는 실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골키퍼는 늘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공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반사 신경과 상황 판단력, 순발력과 민첩성이 중요한 이유다.


4-7. 골키퍼의 슈퍼 세이브 장면.jpg

골키퍼의 슈퍼 세이브 장면. ⓒNbrooks503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골키퍼의 수비 조율 능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골키퍼는 맨 뒤에서 선수들의 움직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자리에 있다. 빌드업과 수비에 필요한 적재적소(適材適所)의 처방책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동료들에게 전달하는 소통력이야말로 골키퍼가 갖춰야 할 또 다른 덕목이다.


축구 경기 도중 골을 기대하는 관중들의 엔도르핀이 급상승하는 장면이 있다. 수비벽이 뚫리며 골키퍼와 상대 공격수가 1대 1로 맞닥뜨렸을 때다. 득점 기회와 실점 위기가 정면으로 부딪친 1대 1 상황은 골을 막아야 하는 골키퍼는 골키퍼대로, 골을 넣어야 하는 상대 선수는 상대 선수대로 정반대의 목적 달성을 위해 극심한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는 순간이다. 이때 골키퍼에게 필요한 것은 순간적인 판단력과 침착성, 담력이다.


상대 선수 앞으로 달려 나가 온몸으로 방어벽을 칠지, 유효 슈팅 각을 좁힌 채 침착하게 적정 거리까지 다가오도록 기다리다 덮칠지를 찰나에 결정해야 한다. 어느 경우든 공을 무서워하지 않는 승부사 기질, 뱃심과 담력(膽力)은 필수적이다. 골키퍼로서는 근접 거리의 공격수가 자신의 키를 넘기는 칩샷을 시도하거나 개인기로 따돌릴 수 있다는 것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골키퍼는 어려운 포지션이다. 시대를 풍미한 골키퍼들의 족적(足跡)이 남다른 이유다.


#시대를 풍미한 골키퍼

▲1960년대

*레프 야신(1929~1990, 구소련). 앞서 게재한 <축구 4. 골키퍼(上)> 참조.


*고든 뱅크스(1937~2019, 영국)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우승의 주역으로 당시 443분 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웠다. 뱅크스의 월드컵 무실점 기록은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월터 젠가(517분)에 의해 깨졌다. 고든 뱅크스를 상징하는 장면이 있다. 뱅크스는 1970 멕시코 월드컵 브라질과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골이나 다름없는 펠레의 결정적인 원바운드 헤더를 크로스바 위로 쳐내는 세기의 선방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헤더 직후 골을 직감한 펠레가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가 뱅크스가 오른손으로 공을 걷어내는 모습을 본 순간, 낙담하는 표정은 축구사의 명장면으로 유명하다. 훗날 펠레는 자신이 목격한 골키퍼의 선방 중 최고의 퍼포먼스라고 찬사를 보냈다.


4-8.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출전 당시의 고든 뱅크스.jpg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출전 당시의 고든 뱅크스. ⓒPanini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뱅크스는 뛰어난 위치 선정 능력과 점프력으로 야신의 뒤를 이어 당대 최고의 골키퍼로 이름을 날렸다. 한 손으로 중앙선까지 공을 던지는 엄청난 괴력을 확인할 수 있는 흑백 동영상도 남아 있다. 1972년 차량 전복 사고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상실했는데도 불구하고 마흔한 살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인간 승리다.


▲1970년대

*디노 조프(1942~ 이탈리아)

1982년 마흔 살의 나이로 이탈리아 대표팀 주장을 맡아 대회 우승을 이끌며 최우수골키퍼로 선정됐다. 앞서 유럽 국가 대항전인 유로 1968, 1976-1977 UEFA컵(2009년부터 UEFA 유로파 리그로 명칭 변경) 우승도 차지했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벌어진 이탈리아 대표팀 경기에서 무려 1,142분 동안 무실점을 기록하는 진기록을 달성했다.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 A 나폴리(1967~1972)와 유벤투스(1972~1983)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수비 진영의 효율적인 플레이를 진두지휘하는 수비 조율 능력이 탁월했다. 대표팀 112경기를 포함해 통산 840경기에 출전했다.


4-9. 1972년 유벤투스 소속일 때의 디노 조프.jpg

1972년 유벤투스 소속일 때의 디노 조프.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제프 마이어(1944~ 독일)

1974 서독 월드컵과 UEFA 유로 1972 우승의 주역. 분데스리가 명문 바이에른 뮌헨에서만 18년간 활약한 원클럽맨이다. 베켄바워(1945~2024), 게르트 뮐러(1945~2021)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유러피언컵(1992년부터 UEFA 챔피언스리그로 명칭 변경) 3연패(1974~1976)를 달성했다. 분데스리가 442게임 연속출장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동물적 반사 신경과 민첩성, 다이빙 캐치가 압도적이었다. 마이어에게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있다. 유로 1976 대회 결승에서 마이어는 신종 페널티킥 옵션으로 명명된 파넨카킥의 희생양이 됐다. 연장전까지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해 전개된 승부차기에서 체코의 마지막 키커 안토닌 파넨카(1948~)는 골대 오른쪽으로 예측 다이빙한 마이어가 무색하게 골키퍼 정면으로 공을 느리게 띄워 차는 새로운 유형의 페널티킥을 성공시켰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낯선 스타일의 페널티킥이었고 이때부터 키커의 이름을 따 파넨카킥이라 불리게 됐다.


4-10. 제프 마이어(왼쪽)와 게르트 뮐러.jpg

제프 마이어(왼쪽)와 게르트 뮐러. 둘은 바이에른 뮌헨의 전성기를 이끈 독일 국가대표팀 동료였다. 게르트 뮐러는 월드컵과 UEFA 유로, 유러피언컵(1992년부터 UEFA 챔피언스리그로 명칭 변경)에서 모두 득점왕에 오른 유일한 선수다. ⓒKoen Suyk / Anefo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1980년대

*토니 슈마허(1954~ 독일)

1982, 1986 월드컵에서 서독이 준우승했을 때의 주전 골키퍼. 대표팀에 발탁된 이듬해인 UEFA 유로 1980에서 게임당 0.75골만 내주는 눈부신 활약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토니 슈마허 시대를 예고했다. 열여덟 살에 입단한 FC 쾰른에서만 15년(1972~1987)을 뛰었으며 마흔두 살 때인 1996년 도르트문트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월터 젠가(1960~ 이탈리아)

월드컵 최장 시간 무실점 기록의 보유자다. 젠가는 자국에서 벌어진 1990 월드컵에서 8강전까지 5게임 연속 무실점을 이어가며 철벽 방어를 과시했다. 준결승에서도 전반 17분에 터진 대회 득점왕 스킬라치의 선제골로 1-0으로 앞서다 후반 22분 아르헨티나의 클라우디오 카니자(1967~)에게 통한의 백 헤딩골을 내주면서 517분 연속 무실점 기록에 마침표를 찍었다. 젠가의 월드컵 연속 시간 무실점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축구 4. 골키퍼(下) ②에서 계속

keyword
작가의 이전글둥근 공의 미학(美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