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둔 이야기

13. 사수(射手)

by 박인권

13. 사수(射手)


사수의 유형

입사 초년병 시절, 어떤 사수(射手)를 만나는지는 순전히 복불복(福不福)이다. 수습 후 배치된 첫 부서의 사수는 나보다 두 살 위였다. 성실하고 차분한 성격에 교과서적인 취재 방식과 군더더기가 없는 기사에서 배울 게 많았다. 동기들이 나에게 말했다.

“너는 좋겠다. 좋은 사수를 만나서.”

입사 후 막 일을 배우기 시작할 때 사수를 잘못 만나면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많다. 실무 전수에는 관심이 없고 딴전만 피우는 탓에 사수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느라 전전긍긍한다.

내가 겪은 직장 선배는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찍어 눌러서 가르치려는 일방적 계몽형, 믿고 맡기되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합리주의적 위임형, 알아서 하라는 식의 무간섭 방임형, 성실하기는 한데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지는 미련한 돌쇠형.

후배들이 선호하는 유형이 어떤 건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첫 번째 유형은 의외로 많다. 내가 너보다 우월하니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것인데 반(反) 지성적 접근법이라 반감만 살 뿐이다. 동기부여가 될 ‘왜’라는 설명이 없어 공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은 실력이 월등해서가 아니라 근속 연수인 짬밥을 실력으로 착각한 나머지 맹목적인 자기 과신의 오류에 빠진 사례다. 어느 직종이나 실력이 아니라 짬밥의 힘에 기대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이런 부류일수록 자아도취의 덫에 갇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상대를 고압적으로 대한다. 일방적인 지시만 남발하는 불통(不通) 스타일이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두 번째 유형은 아랫사람의 개성을 존중하고 소신껏 일하게끔 권한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워 자기 주도적 업무 역량 향상을 유도하는 스타일이다. 이런 상사들은 조직 관리력이 뛰어나고 그 밑에서 일하는 후배들은 자신의 재능을 소신껏 펼칠 수 있어 누구라도 같이 근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상사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조직의 상사들은 으레 자신이 잘났다는 마음이 앞서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끼어들고 싶어 하고 후배들이 돋보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아니라 자의식의 늪에 빠졌다고나 할까.


세 번째 유형은 잘되면 자기 덕이고 잘못되면 남 탓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이기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염불보다 잿밥에만 관심이 있어 업무는 뒷전이고 사내 정치에 능하다. 후배들에게는 꼴불견이지만 윗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에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

마지막 네 번째 유형은 부지런하고 품성이 반듯해 인간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으나 업무적으로는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 후배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스타일이다. 뻔한 결과가 예상되는데도 윗선의 지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따르는 바람에 겪지 않아도 될 시행착오를 사서 겪는다. 후배들로서는 안 해도 될 일을 하게 되고 해야 할 일을 못 하게 되니 죽을 맛이다. 믿고 따르기에는 능력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이다.


사수의 여린 심성

그런 점에서 나는 사수 복(福)이 있었다. 업무적으로 빈틈이 없고 배려심이 많은 그에게도 아쉬운 면이 있었다. 심성(心性)이 지나치게 여렸다는 점이다. 사수를 따라 현장 취재를 나갔을 때다. 일이 끝나자 출출하기도 하고 소주 생각도 났다. 사수를 따라간 곳은 전철역 근처의 포장마차. 술 마실 때의 시간은 왜 그리 빨리 가는지. 술꾼들은 안다, 술자리에서 간단하게 한잔만 하자는 말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사수에게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나는 계속 잔을 주고받았고 그럴 때마다 사수는 뜬금없이 화장실을 간다며 포장마차를 들락거렸다. 자리를 비우는 횟수가 잦다 싶을 때쯤, 느닷없이 포장마차 바깥에서 누군가가 사수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전철역 앞에서 만나기로 한 사수의 여자 친구가 기다리다 못해 일격을 가한 것이다. 서둘러 미안하다는 말을 던지듯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떴다. 저간의 사정을 알았더라면 벌어질 리가 없는 일이었겠지만 어쨌거나 나로 말미암은 술자리가 빌미가 된 것인 만큼 얼굴이 화끈거렸기 때문이다. 마음이 여린 사수는 화장실을 간 게 아닌데도 나에게는 일부러 그렇게 둘러댄 것이다. 사수는 그 여자 친구와 결혼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사수의 집에 놀러 갈 기회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이라 사수는 의정부 본가에서 출퇴근했다. 의정부에서 시청역 인근의 프레스센터를 매일 오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일 텐데도 사수는 내가 체육부로 떠나기 전까지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었다. 술 취한 다음 날 아침에 본 사수의 집은 넓은 마당이 있는 기와집이었다. 내가 성장한 고향집을 보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사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 또 한 번 사수의 집에 갔다. 병원이 아니라 안방에 차린 빈소에 모셔진 사수 아버지의 영정 사진 앞에서 절을 올렸다. 특이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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