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革新)의 아이콘, 거장들의 환생(還生) 여행

1.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모나리자 <下>

by 박인권

과거를 떠나(革) 미래로 나아간(新) 화가들

1.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모나리자(Mona Lisa) <下>


모나리자

# 다시 만난 내 그림

감개무량이다. 얼마 만에 다시 보는 내 그림인가. 허나 그런 기분도 잠시, 내 그림을 다시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가뜩이나 그림이 아담한데(세로 77cm, 가로 53cm), 투명 방탄유리벽으로 중무장한 단독 박스 안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모습이 너무 처량해 보였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더 아픈 것은 유리벽 박스 3미터 전방에 보호 펜스까지 둘러쳐 있어 그 지점에서는 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가 힘들어 보여서다. 그림을 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희한한 일도 다 있다 싶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77 x 53cm, 나무판에 유화, 1503-1506(추정), 루브르박물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곰곰 생각해보니, 그림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할 박물관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내 그림은 세상에 나온 지 너무 오래됐다. 그림의 나이는 자그마치 500살을 훌쩍 넘는다. 나무 판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작품이라 세월의 무게를 어찌 견디랴. 그림이 손상되지 않도록 만전을 다해야 할 박물관으로서는 이만저만 애가 타는 게 아닐 것이다. 더구나 1911년 8월 어느 날 빗나간 애국심의 유혹에 홀렸는지, 돈이 궁했는지 박물관에서 일하던 한 직원이 내 그림을 훔쳐 이탈리아로 밀반출하려다가 실패한 희대의 도난사건까지 있었다니, 신줏단지처럼 모실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듣자하니, 그 직원은 내 조국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란다. 그럼에도 지금의 위치에서 내 그림을 온전히 감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아쉬움은 내 마음을 아리게 한다. 할 수만 있다면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차제에 개선책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쓸데없는 바람이겠지만.


내 그림은 세계3대 박물관 중 하나인 루브르박물관 드농관 2층 이탈리아 회화 제6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물론 그림이 루브르박물관에 있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나를 밀착 안내하고 있는 박물관 고위 간부는 전 세계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은 박물관이라고 귀띔했다. 내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본 그 간부는 이때다 싶었는지, 그 이유가 내 그림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서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에는 내가 박물관의 연간 입장객수를 물으니, 2018년 한 해 무려 1천20만 명이 루브르박물관을 찾아 사상 최초로 1천만 관람객 시대를 열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관람객이 1천만 명이라니, 15세기 사람인 나로서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여간에 루브르박물관 하면 모나리자, 모나리자 하면 루브르박물관이라니 환생여행의 보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내 그림이 세상에서 가장 인기가 많고, 궁금증도 많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들었다. 인기의 비결은 보면 볼수록 알쏭달쏭한 모나리자의 미소에 있단다. 궁금증은 한 두 개가 아니라는데 제작연도와 초상화 모델의 신원에 대한 갑론을박, 끝내 마무리를 못한 미완성 작품이라는 그럴듯한 주장, 심지어는 의도적으로 생략했다는 눈썹 등 주워섬기기도 버거운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는 것이다. 웃기는 점은 내 그림을 둘러싼 유권해석에 대한 미심쩍은 반응들이 오히려 작품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에 기여했다는 설명이다. 태생적으로 탐구지향적인 내가 신비주의를 선호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작품해석에 대한 세간의 의견충돌은 현재진행형이고 그로 인해 내 그림의 신비성만 한껏 부풀려졌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유구무언이다. 차라리 110년 전에 벌어진 도난사건이 내 그림을 확고부동한 글로벌 블루칩으로 안착시켰다는 말이 덜 거북스럽다.


# 혁신의 3대 요소

어쨌거나 타임머신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지상의 나라에 왔으니,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풀어보자. 앞서 말한 대로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의심하기, 다르게 생각하기’다. ‘모나리자’ 그림을 그릴 때에도 나만의 이 대원칙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세 가지 나만의 사고방식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혁신’이다. 유식한 표현을 빌리면 ‣사물의 현상에 숨은 비밀을 풀 수 있는 보편적 원리와 법칙을 탐구하고(과학적 사고-의심하기), ‣특정한 목적 달성에 필요한 방법을 생각하며(전략적 사고-물어보기), ‣과거에 연연하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미래지향적 사고-다르게 생각하기) 것이다.


# 모나리자의 비밀 1 - 자연 그대로, 날 것 그대로의 자세

애초에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명색이 화가라면,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기본의 기본이 아닌가. 영원히 잊혀 지지 않는 그림,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 이름 석 자(다빈치)가 영원불멸로 남아 있을 그림이 나의 목표였다. 그래서 나는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착석(着席) 상태의 모델의 자세 설정을 위해 적지 않은 불면(不眠)의 밤을 지새웠다. 뜬 눈으로 밤과 친해지기를 밥 먹듯이 한 어느 날, 나의 뇌신경에서 태동한 정보는 내 두 동공에 선명한 포즈를 아로새겼다. 앉은 자리에서 상체를 왼편으로 25도~30도 가량 살포시 돌리되, 얼굴은 정면을 바라보고 왼손을 팔걸이의자에 걸치고 있는 모습, 그것이었다. 들키지 않으려는 듯, 알듯 모를 듯 엷디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표정과 함께. 이 자세가 나를 사로잡은 가장 큰 이유는 단 하나,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몸가짐 중 꾸미지 않아 어색하지 않고 저절로 그렇게 된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데에 있다.


원래 나는 ‘자연 그대로’라는 말을 사랑한다. 곧 등장하겠지만 모나리자 그림을 통해 내가 ‘스푸마토 기법’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를 그리는 시도를 최초로 단행한 것도 그런 내 철학에서 비롯됐다.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부드러움이 강함을 앞선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얼굴과 상체가 똑같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의도성이 빚은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움의 결과일 뿐이다. 왼쪽으로 살짝 비튼 비스듬한 사선 형태의 상체의 방향성이 있기에 모나리자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비밀스러운 미소도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다. 하나 더, 모나리자는 왜 의자의 팔걸이에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을 걸치고 있을까. 그것은 잘 알다시피 내가 왼손잡이라 본능적으로 왼손잡이 자세가 떠올랐을 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Vitruvian Man) 또는 인체 비례도(Canon of Proportions), pen, ink and wash on paper, 1492년경, 이탈리아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 모나리자의 비밀 2 - 공기를 그리다, 스푸마토 기법

공기의 움직임은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물감의 집적(集積)인 그림 속으로 옮겨 이식(移植)한다면 생물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공기의 미세한 낌새를 느낄 수 있다. 내가 노린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공기의 모습, 육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형체를 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왜? 그것이 세상 만물의 근원이고 존재하는 그대로의 생김새이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듯이, 어릴 때부터 나는 사물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을 좋아했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그 의문은 또 다른 의문을 낳는 식으로 순환 반복됐다. 그것은 곧 나를 르네상스 형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스푸마토 기법의 창안도 순전히 나의 편집증적인 관찰정신 덕분이었다. 우리는 분명 공기의 존재를 알고 있다. 공기가 없다면 우리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공기의 확고부동한 존재 이유다.


나의 공기에 대한 호기심은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태양이 작열하는 뜨거운 여름, 내가 살던 마을은 놀이터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발이 닿는 곳이면 어디서나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다. 친구들과 신나게 놀던 나는 갑자기 내 눈 앞에 신기한 광경이 펼쳐지는 경험에 발걸음을 멈췄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물안개 비슷한 희미한 형상이 땅에서 스멀스멀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장면 말이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나의 스승, 책의 힘을 빌렸다. 공기의 온도가 기온이고, 공기의 움직임이 바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여름에는 태양의 강한 열기를 받아 땅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는 지열이 뜨거운데, 지열 때문에 땅 속의 지하수는 기체 상태의 물인 수증기로 변한다. 수증기는 땅 바깥의 공기 속으로 빠져 나가는 증발현상을 보이는데, 이 때 더운 공기와 찬 공기가 만나면서 아주 작은 물방울이 흩어져 김(steam)이 생긴다. 내가 본 물안개가 바로 이 김이었다. 여름에 습도가 높은 것도 공기 중에 수증기 많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공기의 기본 성질을 파악한 나는 공기를 어떻게 그림으로 나타내야 할지 고민하다, 무릎을 탁 쳤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은 가까이 있으면 크기도 크고 색이 선명하며 형태가 뚜렷한데 비해, 눈에서 멀어질수록 작아지면서 흐릿하고 모양도 불분명해진다는 경험상의 깨달음이 생각났던 것이다. 거리가 멀어지면 공기의 영향으로 뇌신경에 포착되는 시각정보의 양과 질이 떨어지는 데서 오는 현상이다.

서양미술사에 스푸마토 기법이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나의 조국 이탈리아의 할아버지뻘 선배 화가 마사초가 1427년 ‘성 삼위일체’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1점 투시원근법을 진일보시키겠다는 내 자신과의 약속이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스푸마토(sfumato)는 이탈리아말로 ‘연기처럼 사라지는’, ‘안개처럼’이라는 뜻이다. 이 말에 충실하게 따르기로 결심한 나는 수차례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해법을 찾아냈다. 우리가 눈으로 식별하는 사물의 테두리 혹은 둘레, 즉 가장자리의 윤곽선은 실제 사물의 형체처럼 분명하고 확실하지 않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차츰 흐릿해진다는 사실이 내가 공기를 그릴 수 있게 된 결정적인 단초(端初)였다.

공기가 둥둥 떠다니는 지상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물의 원래 모습, 그것은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윤곽선을 희미하고 어슴푸레하게 처리하는 방법에 의해 존재를 드러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석고에 템페라, 460 x 880cm, 1495-1498, 이탈리아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모나리자’를 통해 완벽하게 구현한 스푸마토 기법도 일부 나타난다. 예수 뒤 창문 밖 배경에서 확인된다.

# 모나리자의 비밀 3 - 수수께끼 같은 미소

모나리자의 얼굴을 보라. 눈가와 입가, 코언저리와 코 밑 그늘진 부분.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눈치 빠른 사람은 ‘아-하!’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렇다, 모두 사물의 경계인 윤곽선이 뭉개진 것처럼 흐리고 희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공기가 형체에 닿은 사물의 본래 모습을 그린 결과다. 순간, 가장 작은 움직임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모나리자의 표정은 우리에게 깜짝 선물과도 같은 변화무쌍한 감흥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공간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공기와 부딪혀 생성된 그 찰나, 그 지점에서의 자연 그대로의 사물의 생김새를 육안의 세계, 그림의 영역으로 끌어왔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에 마음의 문을 연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보는 순간, 무장해제를 당하는 거 같다는 사람들의 반응도 그런 까닭에서다. 조건 없이 마음의 빗장이 열리니 모나리자의 미소는 아름다움으로, 부드러움으로, 자연스러움으로, 온화함으로, 아늑함으로, 신비감으로, 오묘함으로, 은밀함으로, 와 같은 천의 얼굴을 한 마법의 미소로 우리 앞에 다가설 수 있었다.

일각에서는 모나리자 뒤로 펼쳐진 풍경의 묘사에 스푸마토 기법의 흔적이 보이는 것도 내 그림의 신비성에 한 몫을 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모나리자의 미소와 모나리자의 얼굴에 승부를 걸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 처음 그렸을 때보다는 못하지만, 지금 봐도 모나리자의 얼굴에서 물안개가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내 눈에는.


참, 스푸마토 기법을 공기원근법, 대기원근법이라고도 한다지. 공기를 그렸으니, 맞는 말이다. 빛의 방향, 빛의 양에 따라 눈과 입, 코의 언저리가 달리 느껴지는 것도 공기를 들이마신 윤곽선의 형태 덕분이다. 나보고 선택하라면, ‘수수께끼 같은 미소’보다는 ‘천의 얼굴을 한 미소’에 한 표를 던지겠다.


# 모나리자는 모나리자일 뿐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온 얘기, 내 그림을 둘러싼 숱한 의혹과 난무하는 추측 말이다. 모나리자 모델의 신원과 제작연도가 불명확하고, 미완성 작품이라는 가설, 눈썹과 관련된 주장 등은 정말이지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성가시게 하고 있다.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학자들은 내 그림, ‘모나리자’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사실은 별로 없다고 삐죽된다.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데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다니, 나로서도 어이가 없다.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그렇게 철두철미하고, 밥 먹기와 숨쉬기처럼 몸에 밴 메모습관이 행방불명이라도 됐냐고? 어마어마한 연구 성과를 방대한 양의 메모노트로 남긴 내가 어째서 유독 ‘모나리자’ 그림에 대해서만은 넋을 놓았냐고? 혹자는 메모광인 내가 메모하는 것을 잊어버릴 리는 만무하다며 뭔가 특별한 의도를 숨겨 놓았는데, 단지 우리가 아직까지 찾지 못했을 뿐이라는 그럴듯한 주장을 한다고도 들었다. 다, 부질없는 억측이고 그들만의 상상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완벽할 수가 없다. 나도 인간이니, 예외일 수는 없다. 고백컨대, 내가 아무리 광적으로 메모를 좋아한다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기록을 했거니, 생각하고 기록을 빼먹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그것은 내가 메모와 기록에 치열했던 만큼이나 다방면에 오지랖이 넓어 벌어졌던 일이라, 순전히 내가 감수해야할 몫이다. 내 그림은 내가 간수해야 하는지라 나의 잘못이라면 나의 잘못인 것이다. 그게 다다. 설사 후대인들의 유권해석이 맞든, 내 말이 맞든지 간에 다 떠나서 500년도 더 된 일을 지금의 내가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닐까.

변명 같은 한마디만 더 하겠다. 원래 세상에는 때로 의도하지 않았는데 의도한 것처럼 각인되거나, 의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각인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은가. 가령 내가 현 시대 인물이라는 가정 아래 야구에서 투수가 분명 자신이 던지고자 한 구종의 그립으로 투구했는데, 타석의 타자나 포수, 주심의 눈에는 투수가 의도한 것과는 다른 구종으로 보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랄까. 이런 경우 투수의 말도 맞고, 타자나 포수, 주심의 말도 맞다. 세상에는 정답이 없는 것도 존재하고, 굳이 정답이 필요하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

한참 내 말을 듣고 있던 박물관 간부가 분위기를 바꾸려 거들었다. 확인할 수 없는 의혹과 추측, 소문이 무성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미 모나리자가 역사가 된 것도 사실이라며 모나리자는 모나리자일 뿐이라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모나리자의 신원(身元)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

따지고 보면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지, 제작시기가 언제인지, 눈썹이 원래부터 없었는지, 그렸는데 없어졌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본질은 모나리자는 분명 나, 다빈치가 16세기 초에 그린 그림이라는 점이다. 확실한 것은 모나리자가 미술역사상 가장 신비로운 그림이라는 사실이다.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실수였든, 의도였든, 기록이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림을 그린 내가 500년 전의 일을 되살려 증언을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런 점에서 내 그림의 부차적인 곳에서 파생된 세간의 의혹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술평론가나 학자들은 본래 밥 먹고 하는 일이 유식한척, 따지고 파헤치고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논쟁의 주체가 되고 싶어 하는 요즘말로 관종(關種, 관심종자)들이 아닌가. 내 그림에 대한 의혹은 모두 그들이 발굴해낸 것들이다. 가만있었으면 일반인들은 결코 모르고 알 필요도 없었을 것을, 그들은 굳이 들쑤셔 자신들의 업적인 양, 공치사를 남발하곤 한다. 하긴 그 덕분에 내 그림이 더 유명해지긴 했으니, 그들의 공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여, 이런 저간의 사정을 살피건대 어차피 의혹의 실체를 명명백백하게 밝힐 수는 없는 바, 일반론 즉 통설을 쫓는 것이 무방하리라.


모나리자가 누구인가는 내 후배이기도 한 16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조 바사리의 의견이 울림이 가장 크다. 모나리자에 대한 미술사적인 평을 최초로 시도한 인물이자 저명한 전기 작가다. 그는 내가 죽은 지 31년이 지난 1550년에 출간한 자신의 명저 ‘미술가 열전’(화가, 조각가와 건축가의 생애)에서 모나리자를 피렌체의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부인 리자 게라르디니라고 주장했다. 모나가 이탈리아말로 귀부인이니, 모나리자는 리자 여사쯤 되겠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나리자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은 상당부분 바사리가 저서에서 주장했거나, 기술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내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1494~1547)의 품안에서 숨을 거뒀다는 임종과 관련된 것을 포함한 후대 학자들이 밝혀낸 바사리의 일부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이 지대함은 물론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모나리자 권위자인 바사리가 모나리자의 의혹에 불씨를 지피는 빌미도 제공했다는 점이다.


장 클루에, 프랑수아 1세의 초상, 참나무에 유화, 96 x 74cm, 1527-1530, 루브르박물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모나리자의 제작 시기는 1503년, 조콘도의 작품의뢰에 따라 그리기 시작해 1506년까지 4년 동안 작업을 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말년에 머물던 클로 뤼세에서 1517년경에 완성했다는 설도 있으나, 내 기억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해 안타깝다. 어쨌거나 내 서명도 없고, 제작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도 없는 데다 모나리자의 눈썹이 없다는 이유까지 더해 미완성 작품이라는 주장도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그에 대한 나의 답변은 ‘노코멘트’다.

눈썹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데, 내가 미처 그리지 못했다거나 당시 미인상(美人像)의 기준이 눈썹을 뽑거나 미는 것이었다는 풍문이 있는가 하면, 작품 복원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주장, 오랜 세월의 무게에 따른 탈색의 결과라는 등 온갖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이 또한 유구무언으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맺는 말

할 말은 많지만, 가뜩이나 무성한 소문을 확대재생산할 이유도 없거니와 환생여행의 여독(旅毒)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지라, 이만 작별의 인사를 전할까한다. 나는 이제 다시 나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보금자리로 돌아가야겠다. 내 무덤은 프랑스 중부 루아르 강 연안의 앙부아즈 성(城) 안에 있다. 앙부아즈 성은 나를 총애했던 프랑수아 1세가 살았던 곳이다. 프랑수아 1세의 부름을 받은 나도 앙부아즈 성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의 클로 뤼세에서 1517년부터 살았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탈리아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다. 챠오!(ciao,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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