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모나리자 <上>
혁신(革新)의 아이콘, 과거를 떠나(革) 미래로 나아간(新) 화가들
1.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모나리자(Mona Lisa) <上>
나는 누구일까?
나는 502년 전에 죽은 사람이다. 태어난 것은 그보다 67년 전이니, 일흔이 못돼 죽었다. 지금이야 장수(長壽)했다고 명함도 못 내밀겠지만, 내가 살던 당시에는 축복받은 나이였다. 까마득한 15세기에는 그랬다. 나는 지금부터 자그마치 569년 전인 1452년에 세상에 나왔다. 내 고향은 이탈리아 중북부 토스카나의 주도(州都) 피렌체현의 시골마을 빈치인데, 빈치 외곽에 있는 내 생가(生家)는 지금도 잘 보존돼 있다. 해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내가 태어난 생가를 보러 전 세계에서 몰려온다니, 흐뭇한 마음 가눌 길이 없다. 아쉽게도 2020년 초부터는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니, 하루빨리 전염병의 불길이 잡히기를 바랄 뿐이다. 다행히 빛의 속도로 코로나 백신이 개발돼 각국에서 분주히 접종을 하고 있다니 내 생가가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 찰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이쯤 되면 내가 누구인지 벌써 눈치 챈 사람도 있을 것이다.
희한하게도 생가에서 머지않은 빈치 주변 풍경이 내가 살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 적잖이 놀랐다. 오늘날 토스카나 지역의 랜드 마크로 사랑받는 토스카나 언덕이 여전하고 광활한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로 상징되는 아름다운 풍경도 그대로다. 이런 걸 두고 ‘인걸은 간 데 없어도 산천은 의구하다’고 한다지.
빈치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가. ⓒRoland Arhelger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제부터는 집안 얘기를 좀 해야겠다. 내 아버지(피에로)는 공증인이었다. 계약서와 같은 문서가 진본임을 증명하는 작업을 대리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우리 마을 뿐 아니라 우리 마을에서 25km 정도 떨어진 피렌체 전역에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여럿 있었다. 당시 피렌체 지역 공증인들은 성(性)이 ‘다 빈치’(da Vinci)로 다 똑같았는데, 조상 대대로 직업을 물려받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인 내 할아버지(안토니오)도 공증인이었다. 나만 다른 길로 빠졌다. 아뿔싸! 이제 내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인다. 여러분의 짐작대로 내가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
500년 만에 하늘나라에서 지상계에 내려온 내가 듣자하니, ‘르네상스 형 천재의 전형(典型)’이라거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2007년 11월 영국의 과학전문지 네이처 발표)라고 나에 대한 상찬(賞讚)이 끝이 없는데,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쑥스러운 얘기지만 살아생전에도 제법 유명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유명을 달리한지 5세기가 지난 21세기 에 들어서까지 나를 천재 중의 천재라고 칭송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알고 보면 나도 불쌍한 사람
고백하건대, 알고 보면 나도 불쌍한 사람이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불행했다. 내가 출생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거만 하고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태어나고 한참 뒤에 알았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의 어머니는 결혼식에 필요한 지참금을 마련할 형편이 못됐다. 그럼에도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끔찍할 정도로 애틋했으나 완고한 할아버지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결국 아버지는 내가 돌이 되기 전, 나를 낳은 생모가 아닌 이팔청춘의 꽃다운 처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졸지에 나는 사생아가 된 것이다. 사생아의 설움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처음에 나는 생모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생모 또한 살림살이가 빠듯해 이내 아버지가 있는 본가로 들어갔다. 계모 밑에서 유년기를 보낸 나는 워낙 어리기도 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와 삼촌의 보살핌으로 그럭저럭 생모의 빈자리가 불러올 어긋나기 쉬운 성정(性情)을 제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12살 되던 해, 계모는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아버지는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그 여자도 얼마 안가 혈육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다.
한량 기질이 남달랐던 데다 핏줄 욕심이 많았던 아버지는 이후 두 차례나 더 결혼했다. 이때부터 사달이 나기 시작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 내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벌어진 이복형제의 출생행렬은 사춘기가 끝나고도 계속돼 12명을 채우고서야 막을 내렸다. 내 밑으로 배다른 형제가 12명이라니. 설상가상 나만 유독 법적인 어머니가 없는 사생아 신분이라니, 운명의 장난치고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에 사생아가 정상적으로 사회에 뿌리내리기에는 적지 않은 제약이 뒤따랐다.
성장기의 가정사가 순탄하지 못한 것도 억울한데, 내가 살던 당시 피렌체 일대에는 서자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다. 정상적인 교육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직업 선택의 자유에도 제약이 따랐다. 아버지는 바깥으로 떠돌고, 조부모와 숙부가 나를 돌봤다지만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에 대한 그리움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화상.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내가 이탈리아 사람이니 이탈리아 언어로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은 당연지사. 유년 시절, 나는 읽고 쓰고 셈을 하는 초보적인 산수교육만 받았을 뿐, 식자층에게 꼭 필요한 라틴어를 배울 수 없었다. 서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훗날 서른이 넘고 마흔이 될 때까지 독학으로 라틴어를 익혀 학문적 욕망을 채울 수 있었지만. 어쩌면 내가 상류계층의 필수언어였던 라틴어 세계에 뒤늦게 뛰어든 것이 행운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언젠가 라틴어를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동기부여가 됐고, 그런 자극은 안 그래도 차고 넘치던 나의 지적 호기심을 더욱 용솟음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어떻게 그런 가정환경과 정상적인 교육의 부재 속에서도 인류 역사상 가장 걸출한 천재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불가사의하다. 살아 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그것은 아마 내가 타고난 두뇌의 소유자였다는 데서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가 기억하는 나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말하면 너무 주제넘은가.
나의 지적 탐구 방식
굳이 덧붙이자면 아주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몸에 밴 관찰과 사색, 독서와 메모습관을 들 수가 있겠다. 대개 어린아이들은 호기심이 남다르다. 매순간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이 신기하고 새롭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호기심이 나는 조금 더 특별났다. 일종의 편집증에 가까운 탐구욕구라고 할까, 나는 한번 마음이 끌리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매사에 얼마나 파고들었으면,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이제 그만하면 됐다. 그러다가 병난다.”고 말씀하셨을까.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집요하게 파고들어도 만족할 줄을 몰랐고, 그럴수록 또 다른 호기심이 새록새록 돋아날 뿐이었다. 그 시절, 나의 호기심은 세포분열 하듯이 전방위적으로 영역을 확장시켜 나갔고, 그 결과 나는 세상 모든 것에 숨겨진 비밀을 문을 열고자 했다. 이것이 곧 내가 죽기 8년 전에 태어난 이탈리아의 후배 화가이자 건축가 겸 전기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1511~1574)의 말처럼 내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탐구한 사람으로 나아가게 된 근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코포 주치, 조르주 바사리 초상, 캔버스에 유화, 101 x 80cm, 1571-1574, 우피치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나는 왕성한 호기심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사물에 대한 끈질긴 관찰과 사색에 매달렸다. 비록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엘리트 교육의 문턱을 밟지는 못했지만 반복적으로 쌓이고 숙성된 나의 지적 층위는 하루가 다르게 학문적 경지로 다가섰다. 그 지적 층위는 다방면에 걸친 잡식성 독서를 자양분 삼아 독창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웅장하고 화려한 지성의 왕국을 건설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닥치는 대로 메모하는 습관이다. 메모는 기억을 되살리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자 글쓰기의 원천 재료. 메모가 지속적으로 축적되면 삶의 기록이 되고 그것이 모이고 모여 역사가 된다. 그런 점에서 메모는 인간에게만 허용된 최고의 지적 생산도구라 할 수 있다.
나의 메모습관은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나에게 메모는 습관이라는 자율신경계의 조건반사를 넘어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몸부림이었다. 나는 나의 생각과 지적 활동의 전반(全般)을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겼다. 67년 내 인생을 관통하는 연구과정과 연구결과, 스케치 등 모든 육필메모를 노트로 제작해 보관했다. 내가 남긴 메모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상당량이 전해지고 있다. 수 백 년 전에 죽은 나의 행적과 업적을 동시대 인물처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것도 모두 메모노트 덕분이다. 나에게 메모노트는 인간 다 빈치의 지식창고인 셈이다. 메모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말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명심하고 실천한 내가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직업의 소유자였던 것도 순전히 메모습관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나는 내 직업이 몇 개인지 모르고 죽었다. 화가이자 발명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해부학자, 수학자, 건축가, 천문학자, 물리학자, 생리학자, 식물학자, 시인, 작곡가로까지 이름이 거론된다는 것을 지상에 내려와서야 알았다.
변명 같지만 호기심과 지적탐구의 가지가 사방팔방으로 뻗친 나는 겨우 17점의 그림만 그렸다. 명색이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미술사에 등재돼 있는데 쑥스럽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도 ‘모나리자’(1503-1506)와 ‘최후의 만찬’(1495-1498)을 내가 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니 화가로서도 꽤 성공했다고 자부해도 욕먹을 일은 없지 싶다.
참, 여기 와서 들었는데 스티브 잡스(1955~2011)라는 친구가 나를 ‘예술과 공학의 아름다움을 하나로 융합한 융합형 인간의 원형’이라고 했다지. 내가 살던 때에는 ‘융합’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는데, 아마 나처럼 사통팔달인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 짐작된다면 오지랖이 넓다고 하겠지. 환생여행이 끝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면 잡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스마트폰에 대해 한번 물어볼 참이다.
내가 사고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의심하기, 다르게 생각하기가 전부다. 단순하다고 했지만 실천을 해보면 정반대의 경험을 하게 된다. 자세한 설명은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으로 대신하겠다. 실로 오랜만에 지상계를 밟다보니 말이 너무 많아진 것 같다. 나의 신상에 대한 얘기는 이쯤해서 접기로 하고 여러분이 너무나 사랑해주어 진작부터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던 내 그림 이야기를 이제부터 하려한다. ‘모나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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