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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아이콘, 세기의 화가들 Ⅳ

31. 푸생,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by 박인권

니콜라 푸생(1594~1665)

17세기 유럽 미술계의 유행 사조(思潮)는 바로크 양식이었다. 바로크 미술은 1600년대 초반부터 1700년대 초반까지 유럽 대륙의 가톨릭 국가에서 성행했던 미술 사조다. 바로 앞 시대의 르네상스 미술이 조화와 균형이라는 고전적인 미술 교범 지향적이었다면, 바로크 미술은 화려하고 찬란한 색채를 이용한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대비 효과, 풍부한 질감,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붓 터치에서 우러나오는 역동성, 과장된 표현을 통한 우연성의 창출 등 비고전적인 가치를 추구했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도 바로크 미술은 당대 화가들의 주요 화두였고 많은 화가가 앞다퉈 바로크 양식을 구현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른바 바로크 미술은 당대 예술의 대세였다. 예나 지금이나 주류, 즉 기득권을 거슬리는 목소리를 내면 거센 저항에 부딪히는 법. 새로운 가치를 추종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일이라 그만큼 용기와 희생정신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다.


니콜라 푸생, 게르마니쿠스의 죽음.jpg

니콜라 푸생,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캔버스에 유채, 147.96 x 198.12cm, 미네소타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런 점에서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은 원칙주의자다. 주목할 점은 푸생의 원칙은 낡고 퇴행적인 단순 과거지향적인 발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그는 시대의 유행과 관습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이야말로 반(反) 원칙적이라 확신했다. 본질적인 가치는 외부의 자극이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흔들릴 수도, 흔들려서도 안 된다는 신념,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력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이 바로 푸생이 평생 견지한 원칙이었다.


푸생의 원칙, 본질적인 가치는 다름 아닌 고전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문화에 바탕을 둔 정형화된 구도와 단순명료한 형태, 균형과 비례, 인류 역사를 꿰뚫는 지적인 주제가 특징이다. 일찍이 푸생이 인문주의를 동경하고 찬란한 인문주의 예술을 꽃피운 르네상스 시대 대가들의 작품에 심취했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실제로 푸생은 30살 때 처음 이탈리아 땅을 밟은 이래 단 2년을 빼고는 죽을 때까지 거의 40년을 로마에서 살았다. 고대 그리스문화와 철학적 주제를 한평생 연구한 그의 삶은 학구적인 영역을 넘어 철학자의 사색이나 신앙인의 구도를 연상케 했다. 푸생은 그만큼 자신에게 엄격했고, 삶과 불변의 진리 탐구에 평생을 바쳤다.


푸생이 일흔 평생 심혈을 기울인 예술적 성과는 프랑스 고전주의의 선구자 또는 프랑스 근대미술의 시조라는 칭송으로 이어졌다. 푸생이 세운 기틀은 후배 화가들이 계승, 발전시켜 18세기 후반에 신고전주의로 새롭게 완성된다. 그 주역이 바로 프랑스 근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까마득한 후배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다. 19세기 초까지 이어진 신고전주의는 단순 ‧ 간결한 구도와 제한적인 공간, 그림의 배경에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의 건축양식이 등장하는 점이 핵심 요소다.


푸생은 1594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센 강 골짜기에 자리한 레 장들리라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추적할 수 있는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18살 무렵 기성 화가로부터 미술 수업을 받으면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로 가기 전, 주로 파리에서 10년 넘게 그림을 그린 푸생은 그리스, 로마 역사와 철학 등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했고 이는 훗날 그가 고전주의 회화의 시조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에게 그리스, 로마 시대의 사상은 예술적 영감이자 그림의 소재이며 회화의 특징을 구성하는 원천 재료였다. ‘그림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읽는 것’이라는 소신을 견지한 푸생을 후배 화가들이 ‘사색하는 화가’, ‘철학적 사고의 화가’라고 부른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서른을 코앞에 둔 1623년 12월 말, 푸생은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의 흔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르네상스의 산실 이탈리아로 떠났다. 꿈에 그리던 로마 땅을 밟은 것은 이듬해,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행운도 따랐다. 그곳에서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가 될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을 만나게 된다.


고전주의 회화의 전형(典型) ‘게르마니쿠스의 죽음’(1628)도 바르베리니 추기경의 주문으로 그리게 됐다. 추기경과의 인연은 20년 동안 계속됐다. 1641년~1642년 루브르궁의 왕실 수석 화가로 활동했던 2년을 빼고는 죽을 때까지 로마를 떠나지 않았다.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푸생은 평소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전주의 회화 양식의 전제조건으로 ‘영웅적이고 위대한 주제’를 첫손에 꼽았다. 그런 점에서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은 그의 회화 철학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의 고전에 지나치리만치 애착을 보였던 푸생이 오랜 세월 갈고 닦은 영웅적 서사의 회화적 구현이 고전주의 양식의 모범답안처럼 완성된 그림이 바로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인 것이다. 특히 푸생이 지향한 영웅적 서사는 승리의 환희를 만끽하는 구태의연한 영웅이 아니라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는 희생자로서의 영웅의 모습을 부각했다는 점에서 고전주의 역사화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푸생이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통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박해자로 묘사한 새로운 유형의 영웅상은 훗날 신고전주의 후배 화가들이 즐겨 그린 인물상으로 거의 200년 동안 영웅의 죽음을 다룬 회화의 전범(典範)으로 미술사를 장식했다.


역사와 신화, 성서 속에 나오는 고대의 정신을 자신만의 고전주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이 그림은 고대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서기 56년경~120년경)가 저술한 ‘연대기’에 등장하는 한 장면을 표현한 작품이다. ‘연대기’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재위 말년부터 5대 네로 황제까지 약 55년간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그림의 주인공 게르마니쿠스(B.C.15~A.D.19)는 로마 제국의 장군이다. 화면 오른쪽에 누워 있는 사람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의부(義父)이자 큰아버지이기도 한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명에 의해 억울하게 독살당한 뒤 죽음을 앞두고 있다. 연대기의 기록을 따라 묘사한 영웅의 최후 모습은 오른편에서 슬퍼하는 가족들로 비통함이 더하다. 긴 창을 들고 서 있는 왼쪽의 군인들은 게르마니쿠스의 전우들이다. 그들은 장군의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겠다며 복수를 다짐하고 있다.


그림의 배경을 보자. 아치 형태와 벽기둥이 고대 로마 건축양식이다. 사건이 벌어진 곳도 로마다. 등장인물이 여러 명이지만 구도는 단순 간결하다. 가운데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군인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구도다. 인물 묘사 하나하나에 조화와 비례, 균형미가 돋보이는 것이 고대 조각을 보는 듯하다. 색상대비가 뚜렷한 대신 색깔의 강약, 즉 색조에서는 의도적인 절제의 흔적이 엿보이며 치밀한 데생 솜씨가 눈길을 끈다. 그림 전체에서 풍기는 엄중하고 장엄한 분위기. 모두 르네상스 고전미술의 특징이다. 푸생이 프랑스 고전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이유다.


덧붙일 사실 하나, 게르마니쿠스의 사인은 연대기에 기록된 독살이 아니라 말라리아 때문이라는 게 후대의 역사가들이 밝혀낸 사실이다. 3대 황제 칼리굴라가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동생, 5대 황제는 네로는 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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