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한스 홀바인, 대사들(Ambassadors)
한스 홀바인(1497~1543)
16세기, 독일에 걸출한 초상화가가 한 명 있었다. 독일에서 태어난 독일인이지만 스위스 바젤을 거쳐 런던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화가로서 꽃을 피운 곳도 런던이요, 삶을 마감한 곳도 런던이다. 그는 잉글랜드 튜더 왕가의 두 번째 국왕으로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창설한 헨리 8세(1491~1547)의 궁정화가로 활약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의 이름은 한스 홀바인. 독일 르네상스 미술을 빛낸 초상화의 거장이다. 서양미술사에서 초상화의 마술사로는 우리가 잘 아는 렘브란트(1606~1669)가 첫 손에 꼽힌다. 그러나 렘브란트보다 100년도 훨씬 전에 태어난 홀바인의 그림을 보노라면 세 가지 이유에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경이로운 관찰력과 정교하고 치밀한 사실적 묘사력, 인물의 신분과 특징, 성격까지 짐작하게 하는 화면 구성이 바로 그것이다. 세 가지 이유를 완벽하게 입증한 작품이 홀바인의 대표작이자 16세기 초상화의 백미(白眉)로 불리는 ‘대사들’(1533)이다.
한스 홀바인, 대사들, 참나무에 유화, 207 x 209.5cm, 1533,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홀바인이 태어난 고향 아우크스부르크는 16세기 당시 유럽의 상업 중심지였으며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도 상당한 명성을 떨친 도시였다. 18살 때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스위스 바젤로 떠나기 전까지 고향에 머문 홀바인의 그림에 천문과학 관측기구들이 실물처럼 등장하는 것도 이런 성장배경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홀바인은 화가 2세다. 동명(同名)의 아버지가 꽤 유명한 화가였고, 형도 화가, 삼촌도 화가였다. 이런 집안 분위기의 영향으로 미술 친화적인 성장기를 보낸 홀바인은 1515년, 형과 함께 바젤로 유학을 떠나 그림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10년 동안 거주한 바젤 시기는 홀바인이 화가로서 소양을 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 운동의 파고(波高)는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다.
바젤도 예외가 아니었다. 1522년경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한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이 바젤에도 유입됐다. 바젤시 당국은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예술작품에 대한 검열제를 시행했다. 홀바인의 입지도 좁아졌다. 이때 나타난 구세주가 르네상스 인문주의 학자 에라스무스(1469~1536)다. 세상의 악습과 폐단을 풍자형식으로 비판한 책 ‘우신 예찬’(1511)의 저자. 홀바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에라스무스는 그에게 런던행을 권유했다. 1526년 마침내 홀바인은 처음으로 런던 땅을 밟았다.
그곳에서 에라스무스의 친구인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1477~1535)를 소개받았다. 토머스 모어는 정치인이자 학자로 훗날 대법관을 역임한 영국의 대표적인 지성(知性)이 아닌가. 홀바인은 즉석에서 모어의 초상화를 그렸다. 자신의 초상화를 본 모어는 홀바인의 신기에 가까운 솜씨에 넋이 나갔다. 모어는 서둘러 런던의 실력자들에게 홀바인을 추천했다.
소문은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1532년 런던에 완전히 정착한 홀바인은 4년 뒤인 1536년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 정식 임명됐다. 1543년 페스트로 죽을 때까지 런던을 떠나지 않았다. 대표작으로 ‘헨리 8세의 초상’,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죽음의 무도’, ‘게오르크 기체의 초상’, ‘무덤 속의 예수’, ‘십자가 위의 비탄에 잠긴 인간 예수’ 등이 있다.
대사들
홀바인이 그린 초상화 중 이견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그림이다. 이 작품이 홀바인 초상화의 정수(精髓)로 평가받는 이유는 두 가지. 우선 그의 그림 속 인물과 대상, 배경 하나하나가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고 사실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최첨단 디지털카메라로 포착한 이미지라 해도 군말이 없을 사실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그림이 16세기 유화물감으로 그려진 것이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대사들(일부)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다른 하나는 그림 속의 다양한 소품과 상징적 오브제, 기이한 형상, 바닥의 무늬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신분과 지위, 특징 나아가 인간 사회의 세속적인 욕망과 삶의 유한성을 적시했다는 데에 있다. 화려한 녹색 비단 커튼을 배경으로 2단 선반 탁자 양쪽에 두 남자가 서 있다. 왼쪽 인물은 영국 주재 프랑스 대사 장 드 댕트빌로 홀바인에게 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한 당사자다. 고급스러운 흰 담비 털로 만들어진 망토와 왼손을 탁자 위에 걸치고 있는 당당한 모습에서 거칠 것 없이 잘나가는 고위급 외교관임이 느껴진다. 나이는 고작 29세, 젊은 나이에 정치적으로 성공한 엘리트 공무원임을 알 수 있다. 홀바인은 댕트빌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칼집 한구석에 그의 나이를 의미하는 ‘29’라는 숫자를 새겨 넣는 재치를 발휘했다.
오른쪽 인물은 댕트빌의 친구로 가톨릭 주교인 조르주 드 셀브. 댕트빌보다 4살 아래로 셀브 역시 20대에 종교계의 거물로 성장한 프랑스 교단의 실세다. 셀브의 오른팔 밑에 깔린 책에 적힌 숫자 ‘25’로 나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세로 207cm, 가로 209.5cm라는 압도적인 스케일의 그림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두 사람 모두 실물 크기로 그려졌다. 그림의 바닥에 장식된 모자이크 무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바닥 모양과 똑같은데, 대사와 주교의 넘볼 수 없는 권위를 시사한다.
홀바인의 치밀하게 계산된 알레고리식 묘사는 가운데 탁자에 놓인 갖가지 물건들에서 절정을 이룬다. 댕트빌의 왼팔 뒤로 천구의(天球儀)가 보이고, 그 옆으로 원통형 모양의 휴대용 해시계와 황동(놋쇠)으로 만든 듯한 사분의(四分儀), 휴대용 사분의, 다면 해시계가 줄지어 놓여 있다. 셀브 주교의 오른팔 뒤로 다소 기이하게 생긴 것은 태양광선 각도 측정기구인 토르카툼이다. 공통점은 모두 천체 관측에 사용되는 도구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면 해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날짜와 시간이 4월 11일 10시 30분으로 특정되어 있다. 왜일까? 바로 헨리 8세와 왕비 캐서린이 이혼한 날과 이혼서류에 서명한 시간을 나타내기 위한 홀바인의 의도된 도상학적 장치다. 당시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을 반대한 교황청에 맞서 가톨릭교회 탈퇴를 선언한 가운데 파국을 막기 위한 프랑스 국왕의 특사 자격으로 런던에 파견된 인물이 댕트빌과 셀브였던 것이다. 결별의 위기에 놓인 가톨릭교회와 영국과의 대립과 갈등을 기막힌 알레고리식 표현으로 드러낸 홀바인의 재능이 놀랍다.
한스 홀바인, 헨리 8세 초상화, 캔버스에 유화, 239 x 134.5cm, 1537, 영국 리버풀 워커 아트 갤러리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탁자 아래쪽 선반에는 익숙한 지구의(地球儀)가 눈에 띄고 지구의 앞으로 수학 교본과 교본에 끼워진 삼각자, 기타 비슷하지만 생뚱맞게 생긴 악기, 펼쳐진 찬송가 책이 보인다. 악기 이름은 류트인데, 중세와 근대 이슬람 음악에서 유행한 현악기다. 자세히 보면 류트의 줄이 끊어져 있는데, 이 또한 유럽 종교계의 이상 징후를 암시하는 장치다. 탁자 선반 위의 물건들은 댕트빌과 셀브, 두 사람 모두 해박한 과학지식과 풍부한 문화예술 소양을 갖춘 지성인임을 대변하는 소도구들이다.
홀바인의 계산된 알레고리 탐구는 계속된다. 그림의 맨 왼쪽에서 위로 끝까지 올라간 지점에 어렴풋이 물체가 하나 보인다. 커튼 속에 살짝 숨겨 놓은 이 이미지는 십자가상이다. 당시의 종교 상황을 시사하는 동시에 전지전능한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한낱 미물(微物)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인생무상(人生無常)으로 귀결되는 동서고금의 절대적인 진리이자 교훈은 홀바인이 절묘하게 그림 속에 툭 던지듯, 엉뚱한 곳에 그려 넣은 수수께끼 같은 형상에서 화룡점정으로 치닫는다.
그림 맨 아래 가운데 비스듬히 걸쳐져 곧 넘어질 것 같은 희한하게 생긴 물체가 바로 이 그림에 내재한 다양한 알레고리의 하이라이트다. 그냥 보면 아무리 봐도 형상 분별이 불가능하다. 실체 파악의 실마리는 그림 옆쪽에서 이 형상을 사선 방향으로 훑어 내려가듯 보는 데서 발견된다. 형상의 실체는 다름 아닌 해골(骸骨)이다. 물체를 왜곡해서 실제와는 다르게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왜상(歪像)기법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해골은 죽음의 다른 말이다. ‘죽음을 생각하라’라는 뜻의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홀바인은 왜상기법으로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또 우리에게 남긴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법. 부귀영화의 부질없음과 현세의 허망함을 한시라도 잊지 말라는 홀바인의 가르침은 500년 세월을 훌쩍 넘어서도 메아리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