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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아이콘, 세기의 화가들 Ⅴ

43.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by 박인권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

인간은 근원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가? 생존의 갈림길에서, 극한상황에서 야만인으로 전락하는 인간의 본성을 다룬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윌리엄 골딩(1911~1993)의 소설 ‘파리 대왕’은 여전히 유효한가?

인간의 타고난 성품을 둘러싼 이 명제는 수많은 사상가의 논쟁 속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의 대립처럼 감성과 이성이 동시에 작동하는 인간 본성의 해독은 고등방정식을 동원해도 속 시원한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1만 년 전, 농경사회가 시작된 이후 본격화된 인간사회의 갈등과 분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이기적인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도 남 앞에서는 정의와 공정을 수호하는 의인으로 둔갑한다. 그런 위선 자체가 이기심을 은폐하는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기심은 집단 속에서 발호(跋扈)할 때 사회적인 재앙으로 폭발하는 인화성이 강하다.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인간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이기심이 불러온 재앙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재앙을 증명하는 자료는 다양하다. 문서, 책, 사진, 영상, 증언…. 재앙의 실체를 증명하는 방법은 다양한데, 시각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에서 극적으로 각인시킬 수 있는 대표적인 도구가 그림이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jpg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캔버스에 유화, 491 x 716cm, 1818-1819, 루브르 박물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33세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간 프랑스의 한 화가가 19세기 초에 그린 그림이 좋은 예다. 화가의 이름은 테오도르 제리코, 그림의 제목은 ‘메두사호의 뗏목’이다. 제리코를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자 자리에 올린 결정적인 작품이다.


‘메두사호의 뗏목’은 1818~1819년에 걸쳐 완성된 그림이다. 그림의 배경인 비극적인 사건은 1816년 7월 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정부가 아프리카 식민지인 세네갈을 통치할 원정 선단을 꾸리고 출항한 날이다. 선단을 맨 앞에서 이끄는 호위함은 프리깃 범선 메두사호. 제리코는 바로 이 배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을 19세기 낭만주의 그림의 효시로 승화시켰다.


무능한 낙하선 선장이 지휘하던 메두사호는 항해 도중 암초에 부딪혀 침몰 위기에 빠졌다. 배에는 승조원을 포함해 선발대로 파견되는 군인과 관료, 현지에 정착할 이주민 등 400여 명이 타고 있었다. 구명보트는 6대뿐, 선장과 고급관료, 장교 등 약 250명의 차지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부러진 돛대를 이용해 급조한 뗏목으로 밀려났다. 뗏목의 유일한 동력(動力)은 구명보트에 연결된 밧줄.


그러나 애초 약속과 달리 선장은 뗏목에 탄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인 밧줄을 끊어버렸다. 목숨을 앗아갈 기세로 달려드는 성난 파도를 뚫고 한시라도 빨리 섬이나 뭍으로 달아나야 하는데, 뗏목이 걸림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리저리 파도에 쓸려 바다에 빠져 죽고, 굶어 죽고, 아귀다툼으로 싸우다 맞아 죽고, 병에 걸려 죽는 등 뗏목 위의 광경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결국 12일 동안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사투 끝에 15명만 살아남는 참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대형 해상인재였다.


메두사호의 뗏목

무능하고 무책임한 인간이 감투를 쓰면 어떤 파국을 불러일으키는지, 생생하게 증언하는 그림이다. 전문성이 없는 무자격자가 지휘하는 배가 정상 운항하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이다. 공짜로 얻은 완장은 일촉즉발의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엉뚱한 결정을 일삼아 휘하의 동료들을 사지(死地)로 내몬다. 한 사람이라도 더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아랫사람의 지혜로운 조언은 쇠귀에 경 읽기다. 해괴한 결정은 자기만 살겠다는 이기심의 다른 표현이다. 메두사호의 선장이 전형적인 예다. 그에게 ‘선장은 배와 운명을 함께 한다.’라는 뱃사람들의 금과옥조는 딴 나라 얘기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중인 이 그림은 어마어마한 크기에서 뿜어내는 비장미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세로 491cm에 가로길이가 716cm로 19세기 유럽 열강들의 식민 통치 시대에 벌어진 해상 참사를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메두사호는 항해 며칠 후 북서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의 모리타니아 해안 근처에서 암초와 충돌해 좌초 위기에 빠진다. 무지몽매한 선장의 오판 때문이었다. 뗏목에 버려지다시피 한 140여 명에게 남은 것은 천운(天運)에 기대는 기적뿐. 식량도, 마실 물도 없는 처참한 상황에서 급기야 시체의 인육에까지 손을 대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제리코는 극적인 상황 묘사를 위해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 살아남은 자들의 모습을 한 화면에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실감 나게 그려냈다. 지금 우리는 수평선 저 너머 보일락 말락 희미한 점처럼 나타난 구조선을 보고 “우리가 여기 있다. 살려 달라!”고 절규하는 살아남은 자들의 아우성과 마주하고 있다. 오른쪽 맨 위의 흑인과 바로 아래 남자가 찢어진 옷가지를 들고 처절한 구조의 손길을 뻗고 있다. 그 아래의 남자들도 힘겹게 한 손을 펼쳐 들어 애타게 구조선을 부르고 있다. 그것은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기나긴 표류 끝에 기적적으로 구조의 순간을 마주한 살아남은 자들의 애절한 부르짖음이다. 뗏목 위에 널브러진 시체들은 당시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해부학적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완벽한 인체묘사,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뚜렷한 명암대비, 강렬한 색채 구사, 등장인물들의 역동적인 운동감뿐 아니라 생사의 갈림길에서 삶에 대한 갈망과 죽음의 공포 등 절정에 이른 심리묘사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림은 왼편의 돛대와 옷가지를 펼쳐 든 흑인을 중심으로 두 개의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정확한 비례를 강조한 이상적인 인체 표현과 함께 이 두 요소는 신고전주의 기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그림을 낭만주의 화풍의 효시로 내세우고자 한 제리코의 연막에 불과하다. 제리코는 신고전주의 그림의 전가의 보도인 모든 영웅적 서사를 거부했다.


시체 앞에서 넋이 나간 표정, 부서지고 망가져 금방이라도 물에 잠질 듯한 뗏목, 죽은 자들의 참혹한 모습, 죽을힘을 다해 삶에 대한 간절한 의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산 자들의 몸부림과 같은 고통스럽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전달에 화가로서의 직을 걸었다. 이 그림에 영웅적인 주인공도 없고, 영웅적인 행위도 없는 이유다. 이 그림으로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사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미술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이는 곧 화가들의 자기표현, 즉 주관적이고 개성적이면서 독창적인 정서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세상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낭만주의 미술의 탄생을 알리는 것과 함께 왕정복고에 매달린 샤를 10세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고발하는 정치적 함의를 품고 있는 것도 이 그림의 역사적 평가를 높이는 요인이다.

무엇보다 이 그림을 보는 우리가 실제 사건 현장에 있는 듯한 전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제리코의 투철한 직업정신 덕분이다. 그는 시체안치소에 보관된 시체 모습 하나하나를 스케치로 연구하고, 뗏목 모형을 손수 제작하는 등 그림의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 철저한 사전 준비를 했다.


제리코에 앞서 메두사호의 비극은 두 명의 생존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들은 메두사호에 승선했던 군의관 앙리 사비니(1793~1843)와 측량기사 알렉산드로 코레아르(1788~1857)다. 둘 다 구명보트를 마다하고 뗏목에 올라타는 희생정신을 발휘한 20대 청년들이었다. 기록은 사비니가 주도했다. 생지옥 현장의 목격자이자 증인인 사비니는 사건의 진상을 후대에 알리지 않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는 죄업(罪業)이라 판단하고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을 남겼다. 후에 코레아르와 공동 작업으로 육필 생존기를 책으로 펴내 엄청난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16년 ‘메두사호의 조난’(사비니 ‧ 코레아르 공저, 심홍 옮김, 리에종)이란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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