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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아이콘, 세기의 화가들 Ⅴ

49. 르누아르, 목욕하는 여인들

by 박인권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

모름지기 그림은 예쁘고 아름다워 보는 사람이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 혼탁한 세상에서 그림마저 심각하면 살맛이 나겠나. 그림이라도 유쾌하고, 그림을 볼 때라도 흥이 나야지. 맞는 말이다. 19세기 후반 서양미술사에 혁신적인 바람을 몰고 온 인상주의 화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르누아르는 미(美)의 본질을 그림으로 탐색하고 예술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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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바지유, 르누아르의 초상, 캔버스에 유화, 62 x 51cm, 1867, 오르세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르누아르는 입버릇처럼 그림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고 흐뭇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물화, 특히 여성의 몸이 발산하는 미적 가치를 놀라우리만치 황홀하고 우아한 색과 붓 터치로 감정이입 시키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그림이 내뿜는 매력을 무한대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우리가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면서 새삼 우윳빛처럼 눈부시게 희고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여성 인체의 미, 그림의 힘을 찬탄해 마지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르누아르는 1841년 프랑스 중서부 오트비엔주의 주도인 리모주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리모주는 18세기 후반부터 식기용 자기를 생산하는 도자기 산업이 번창한 곳으로 오늘날에도 명품 도자기의 산실로 명성이 자자하다. 먹고사는 문제가 당면 과제였던 르누아르의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파리로 이주했다. 르누아르 나이 서너 살 때였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의 굴레에서 탈출하기는 녹록지 않은 법. 대도시 파리는 르누아르 일가에게 호락호락지 않았다. 쪼들리는 가정형편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르누아르는 중학교 진학 대신 도자기 공장에서 돈벌이에 나섰다. 13살짜리가 무얼 알아 스스로 직업전선에 뛰어들었을까.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을 법도 한데, 도자기에 장식용 그림을 그리는 일은 오히려 르누아르의 숨은 재능을 일깨워 훗날 화가의 길로 이끄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도자기 겉면에 각종 무늬를 그럴듯하게 새겨 넣어 도자기의 상품성이 올라갈 때마다 르누아르는 뿌듯한 자존감에 희열을 느꼈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 자체가 르누아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미술 공부였다.


르누아르의 재능은 결국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드 보자르 입학으로 이어졌고, 여기서 화가 르누아르의 삶을 좌우할 새로운 국면이 펼쳐진다. 스무 살의 르누아르는 에콜 드 보자르에 다니면서 스위스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하던 샤를 글레르(1806~1874) 아틀리에에서 본격적인 도제(徒弟) 생활에 들어가는데, 이때 동년배의 화가 지망생 3명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포도주 양조장인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 프레데리크 바지유(1841~1870)와 클로드 모네(1840~1926), 알프레드 시슬레(1839~1899)가 그들이다. 특히 바지유는 모네와 마찬가지로 형편이 어려워 힘겹게 그림 공부를 하던 르누아르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절친이자 경제적 후원자였다.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청년들은 거침없이 붓을 휘두르며 살롱전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1867년 나란히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했으나 바지유만 입선했을 뿐, 나머지 3명은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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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바지유, 가족의 상봉, 캔버스에 유화, 152 x 230cm, 1867년, 오르세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배려심이 남달랐던 바지유는 운이 좋았을 뿐, 실력은 너희들이 훨씬 뛰어나다고 친구들을 위로해 사나이 우정을 몸소 실천하기도 했다. 바지유의 입선작은 ‘가족의 상봉’(캔버스에 유화, 152 x 230cm)으로 현재 오르세미술관에 소장 중이다. 안타깝게도 바지유는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에 벌어진 보불(普佛)전쟁에 참전해 29살의 꽃다운 나이로 전사(戰死)했다. 르누아르도 보불전쟁에 징집됐는데, 친구 바지유의 죽음이 몰고 온 충격과 인생무상의 허망함을 잊고자 더욱 그림에 몰두했다.


1876년 파리지앵들의 사교생활을 화사하고 부드러운 붓질로 묘사하면서 빛의 효과를 극적으로 드러낸 걸작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캔버스에 유채, 131 x 175cm, 오르세미술관 소장)를 선보이며 인상파의 실력자로 떠올랐다. 모네 등 동료 인상파 화가들이 풍경화에 주력한 것과 달리 르누아르는 인물, 특히 여인의 매혹적인 육체를 탐구한 점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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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캔버스에 유화, 131 x 175cm, 1876, 오르세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1884년~1887년 3년여에 걸쳐 완성한 ‘목욕하는 여인들’은 인상주의 회화의 특징을 살리면서도 정교한 고전주의 기법을 감미롭고 따뜻하게 소화한 르누아르 특유의 화풍을 강렬하게 아로새긴 역작이다. 역경 속에서 화가의 길을 달려온 고난의 인생 역정과 달리 르누아르는 흉내 낼 수 없이 화사하고 고우며 편안하고 긍정적이면서 기쁨에 충만한 그림을 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그리는 맑고 깨끗한 투혼을 발휘했다. 말년에는 심한 관절염에도 굴하지 않고 붓을 손에 붕대로 묶고 작업에 매달렸을 정도로 불꽃 같은 예술혼을 불살랐다.


목욕하는 여인들

1881년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르누아르는 자신의 화풍을 새롭게 정립하는 전기(轉機)를 맞게 된다. 그곳에서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의 사실적인 그림과 폼페이 벽화를 본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의 색채효과를 간직하면서 고전주의 미술의 장점을 기품있게 부각하는 르누아르 화풍에 눈을 뜨게 된다. 빠른 붓놀림으로 빛의 순간적인 인상을 강조하는 인상주의 기법의 숙명인 망가진 형태를 복원시키기 위해서였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면 빛을 머금은 인물의 모습이 두드러지면서 백옥같은 살결에서 느껴지는 여체의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 수 없다. 빛과 색채, 형태 세 가지 모두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즉, 여성의 알몸에 예술성의 옷을 입힌 르누아르는 빛을 그린 인상주의 화가이면서 색채의 연금술사이자 고전주의 기풍의 형태미까지 살려낸, 혁신과 전통을 하나로 융합한 실용주의적 개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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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르누아르, 목욕하는 여인들(The Large Bathers), 캔버스에 유화, 117.8 x 170.9cm, 1884~1887,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3년이 넘는 시간을 공들였다는 데서 르누아르가 이 그림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짐작이 간다. 눈부시게 햇빛이 화사한 강가에서 알몸의 세 여인이 목욕 삼매경에 빠져 있다. 풍만한 몸매에서 여성미가 솟구치고 어쩜 피부가 저리도 비단결 같을 수 있나, 감탄을 자아낸다. 물에서 막 나와 숄을 걸치고 있는 여인과 장난스럽게 물을 튀기려는 동료의 갑작스러운 도발에 화들짝 놀라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여인 셋이 그림의 주역들이다.


무성한 숲과 풀, 강물이 비중 있게 그려졌음에도 세 여인의 기세가 압도적이다. 우리 눈 바로 앞에서 삼각형 구도로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데다 뽀얀 속살과 가슴, 엉덩이의 굴곡과 피부 결이 시신경을 얼어붙게 하고 있다. 붓 자국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기막힌 피부 질감 묘사와 감각적인 살 색 구사에서 유화 그림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르누아르를 왜 ‘색채의 마법사’라 칭송하는지 수긍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그런데 바위에 걸터앉은 두 여인의 자세가 자연스럽지 않다. 맨 앞 여인의 두 다리와 오른손을 자세히 보자. 얼굴로 돌진할 물방울을 피하려고 움직이고 있는 동작인데, 손과 발의 연결 흐름이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 중앙에 왼무릎을 살짝 세우고 앉아 있는 여인은 아예 위태로워 보인다. 저런 자세를 계속 취하면 곧 바위에서 미끄러져 낙상(落傷)할 것 같지 않은가. 이것은 르누아르가 고전주의 스타일인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로 포석을 깔고 그에 맞춰 세 여인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다.


르누아르는 화면구성의 조화를 꾀한 큰 틀에 무게중심을 두고 세부장면의 충실한 표현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신이 의도한 화풍에 방점을 찍는 것이야말로 그만의 고유한 양식을 지키는 길이라는 예술관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를테면 그림은 마땅히 삶에 유익한 긍정적인 에너지로 충만할 때 의미가 있다는 소신, 그 소신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은 몰라서가 아니라 그냥 무시해버린 것이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 지수가 급상승하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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