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고갱, 타히티의 여인들
폴 고갱(1848~1903)
고갱과 고흐(1853~1890)는 참 별난 인연이다. 5살 터울인 이들은 독학으로 자수성가해 사후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점,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독창적인 예술사조를 창안한 남다른 감각까지 닮은 점이 한둘이 아니다. 고흐의 동생 테오(1857~1891)의 주선으로 두 거장은 한때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서로의 예술혼을 고무시키고자 의기투합하기도 했으니, 인연치고는 보통 인연이 아니다.
1891년의 폴 고갱. ⓒLouis-Maurice Boutet de Monvel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러나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공존할 수는 없는 법, 개성과 세계관, 세상을 예술로 해석하는 방식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두 사람은 결국 두 달 남짓 짧은 교류를 끝으로 각자도생의 선택을 하게 됐다. 운명은 두 사람을 각기 다른 예술적 성취로 내몰았고, 그 결과 우리는 고갱과 고흐라는 위대한 천재 화가의 그림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리게 됐다.
시각차가 있을 수 있겠지만, 대중적인 인기로만 보면 고흐가 조금 앞서 있지 않을까. 두 화가 모두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이름이지만 색을 다루는 솜씨와 붓질의 방식에서 전율적인 인상이 차고 넘치는 고흐의 그림에 아무래도 마음이 쏠리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출신 저명한 미술사학자 곰브리치(1909~2001)의 평가는 좀 다르다. 곰브리치가 1950년에 초판을 낸 ‘서양미술사’는 서양미술사의 고전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명저(名著)다. 책이 나온 지 70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미술학도는 물론 미술계 인사들의 필독서 중 첫 손에 꼽히는 스테디셀러의 최고봉이다.
곰브리치는 자신의 저서에서 1880년대~1890년대 유럽에서 활동한 폴 세잔(1839~1906)과 고갱, 고흐를 세 명의 이단아로 규정했다. 세 화가 모두 당대의 지배적인 미술 규범과 이론에 맞서 자신만의 고유한 화풍을 창안해 현대미술의 길을 개척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그러면서 곰브리치는 셋 가운데 고갱의 영향력에 조금 더 높은 점수를 매겼다.
곰브리치는 세잔이나 고흐의 미술사적 업적을 무한히 존중한다면서도, 후대 화가들에게 끼친 예술적 울림의 생명력에서 고갱이 으뜸이라는 점을 그 근거로 내세웠다. 두 화가에 비해 고갱이 추구한 원시미술에 대한 후배 화가들의 추종 연구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시도됐다는 이유에서다.
곰브리치가 언급한 것처럼 원시미술을 창시한 고갱의 화풍은 후기 인상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명암과 입체감을 배제하고 2차원의 평면을 강조한 종합주의나 상상력을 토대로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표현이 특징인 상징주의로 만개(滿開)했다.
화가로서 예술적 영감을 꽃피운 곳이자 원시미술을 창조한 본거지이기도 한 타히티는 남태평양 동쪽의 프랑스령 섬나라로 오늘날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유명세의 은덕은 고갱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고갱은 타히티에 10년 조금 모자라게 머물렀는데, 고갱의 역작과 걸작은 모두 타히티 시절 나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고갱이 화가로서의 승부수를 타히티에서 던지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타히티가 간직한 원시성 때문이었다. 고갱이 추구한 예술적 화두는 생명의 근원 탐구였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모티브가 다름 아닌 원시성이었다. 고갱에게 원시성은 예술적 양식(糧食)이었고, 살아가는 목적이었다. 11년간의 증권회사 중개인 자리를 별안간 박차고 돌연 화가의 길을 선언한 그다운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고갱이 전업 화가로 인생 항로를 전환한 1880년대는 현대미술의 태동기라 창작의 영감을 원시문명에서 길어 올린다는 발상 자체가 획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고갱에게 타히티는 자신이 꿈꾼 예술적 성과를 현실에 수놓을 지상의 낙원이었다. 그 이면에는 외가(外家)인 남미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4년가량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각인된 원시문명에 대한 동경이 터를 잡고 있었다. 1891년 6월, 고갱은 두 달이 넘는 긴 항해 끝에 마침내 타히티섬에 도착했다. 이 해에 앞으로 전개될 고갱 화풍의 원조 격인 한 작품을 선보였는데 바로 ‘타히티의 여인들’이다.
폴 고갱, 타히티의 여인들, 캔버스에 유화, 69 x 91cm, 1891, 오르세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타히티의 여인들
남태평양에 떠 있는 작은 섬나라 타히티. 고갱이 첫발을 디딜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타히티는 1957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로 편입된 프랑스 영토다. 현재 5개 제도 118개의 섬으로 이뤄진 천혜의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고갱이 머문 타히티섬은 소시에테 제도의 가장 큰 섬으로 수도가 파페에테다. 그러나 배에서 내려 처음 본 파페에테는 고갱이 머릿속에 그려온 풍경과 달랐다.
이미 서양 문물이 유입돼 곳곳에 유럽식 자본주의 문화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파페에테를 조금 벗어나자 섬 외곽의 한적한 마을이 눈에 들어왔는데, 고갱의 마음에 쏙 들었다. 고갱이 생각한 원시성이 살아 있는 곳이었다. 1893년~1895년 2년 동안 파리로 돌아간 기간을 뺀 8년가량 고갱은 이곳에서 생활했다. 타히티섬은 고갱 양식(樣式)의 산실이었다. 고갱 화풍을 철학적 명제로 녹인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캔버스에 유채, 139.1 x 374.6cm, 1897-1898, 보스턴미술관 소장)도 이 시기에 탄생했다.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대자연의 야생성과 원주민들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은 화가 고갱의 예술적 본능을 단숨에 일깨웠다. ‘타히티의 여인들’이 그 첫 성취의 결과다.
화면을 가득 채운 두 여인, 구릿빛 피부가 우람한 체격에 날개를 달아 건강미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얼굴이나 몸, 어디에서도 인공적인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자연미가 어떤 것인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고갱이 바란 게 이런 모습 아니었을까. 남태평양 햇빛에 순응한 여인들의 검게 탄 피부는 화가가 태고의 비밀을 간직한 인간존재의 원형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게끔, 시간을 과거로 이끌고 있다. 얼굴 생김새와 손과 발은 투박함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데, 이 순간 여성미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고갱은 아름답다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학습된 고정관념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있는 자연의 본래 모습에서 찾고자 했고, 타히티의 여인들이 그 의도를 충족시켰다. 꾹 다문 입과 무심한 듯, 두 여인의 표정에서도 가위눌린 어색함보다는 저절로 이루어진 천연의 기운이 배어 있어 원시미를 더한다.
그러면서도 고갱은 슬쩍 문명의 흔적을 흘려 자신이 추구한 훼손되지 않은 문명 이전의 원시성의 속살을 일깨우는 예술적 감각을 드러냈다. 식물 섬유처럼 생긴 풀을 꼬고 있는 오른쪽 여인이 입고 있는 분홍색 원피스를 통해서다. 이 원피스는 타히티섬과 상관없는 서양에서 흘러들어온 것이다. 속살을 다 뒤덮고 있어 보기에도 더워 보인다.
반면 고개를 약간 숙이고 황금빛 모래사장에 오른손을 짚고 있는 왼쪽 여인이 걸치고 있는 붉은색 꽃무늬 치마는 파레오라 불리는 타히티섬 원주민들의 전통 의상이다. 오른쪽 귀에 치마에 장식된 무늬와 같은 꽃잎이 보이는데 타히티에서 피는 티아레 꽃잎이다. 원시성과 문명의 상징을 동시에 내세워 원시성의 간절함을 부각하면서 이곳이 타히티섬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여인들 뒤로 에메랄드 보석을 닮은 쪽빛 바다도 평면성만 부각 돼 역동적인 파도의 숨결이 감춰져 있는데, 이 또한 고갱 특유의 원시성이 토해낸 반(反) 이론 • 친자연적 시도의 결과다.
얼핏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허전해 보일 법도 한데, 그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 문명의 콩깍지가 끼어있어서다. 그림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구릿빛, 황금빛, 분홍빛, 쪽빛 등 원색도 남태평양 특유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고갱은 1901년 거처를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옮기고 2년 뒤 이곳에서 5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붓질의 결이 투박하고 촌스럽고, 양감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평면성에 주목한 것도 고갱이 목숨을 걸고 탐구한 원시문명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됐다.
문명의 부조리를 일깨우고, 순수한 자연미와 생명의 원형을 쫓아 캔버스에 영혼을 불어넣은 고갱 예술의 시작을 알리는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