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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아이콘, 세기의 화가들 Ⅴ

47.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by 박인권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

자연 친화적인 그림이다. 일체 가식이 없다. 평온한 기운만 충만하다. 그림을 보는 사람의 마음도 따뜻해진다. 그림의 주제는 농민의 삶, 농촌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농부의 일과는 땅에서 시작해서 땅에서 끝난다. 농민의 하루는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러나 이는 겉보기일 뿐, 그들의 온몸은 땀과 먼지 범벅, 힘들고 고단한 현실이다.


프랑스 사진작가 나다르가 1856년~1858년 사이에 찍은 밀레의 모습..jpg

프랑스 사진작가 나다르(1820~1910)가 1856년~1858년 사이에 찍은 밀레의 모습.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Nadar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런데도 그들은 불평이 없다. 일용할 양식의 원천인 땅은 그들의 모든 것이다. 비록 땅의 주인은 아니지만, 땅이 없으면 그들도 없다. 묵묵히, 하루하루, 우직하고, 정직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들이 씨 뿌리고, 밭을 일구고, 추수하는 모습에 우리가 숙연해지는 이유다. 부지런한 그들의 몸놀림은 대지를 향한 경의의 상징이다. 갈라지고 거칠어진 그들의 손마디에는 생명의 모태, 대지의 숭고함이 화석처럼 새겨져 있다. 가난하지만 비루하지 않은 농부의 삶, 그곳에 서려 있는 것은 비장미다.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밀레. 그는 농민이 흘린 땀과 노동의 가치를 그림으로 일깨웠다. 밀레는 그림 속 농민에게 날 것 그대로의 옷을 입혔다. 진솔하고 성실하고 때 묻지 않은 농부들의 실제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 신기한 점은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농부의 일상, 농촌의 풍경인데 그림을 보는 우리는 옷깃을 여미게 된다. 밀레의 그림 속 농부들은 우리에게 경건하고 숭고한 삶의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밀레가 위대한 화가인 이유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밀레는 어째서 보잘것없고, 내세울 것 없는 농부의 일상 속에 고귀한 가치를 담아낼 수 있었을까. 밀레는 농부의 아들이다. 농촌에서 태어났고, 농촌에서 자랐다. 농사도 지어 봤다. 농민을 사랑했고, 농촌을 좋아했다. 20대 초반 청운의 꿈을 안고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루브르박물관의 대가들 작품은 그에게 훌륭한 미술선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생 농부의 아들이었다. 밀레가 추구한 그림은 주요 고객인 도시 부르주아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제도권 미술의 등용문인 살롱전에서도 거푸 퇴짜를 맞았다. 생계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서민들이 좋아하는 싸구려 그림을 그렸다. 대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낄 즈음, 콜레라 전염병이 급습했다. 35살 때였다. 밀레는 주저 없이 파리 근교 시골 마을 바르비종에 정착했다. 4년 전 만난 동거녀 카트린과 함께였다.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농사도 지었다. 바르비종 생활은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밀레는 농부의 마음, 노동의 신성함, 삶의 존귀함, 세 가지 모두 다 알았다. 그리고 그림을 통해 그것을 모두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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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캔버스에 유화, 55.5 x 66cm, 1857~1859,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가난했지만 바르비종 생활은 행복했다. 농사를 짓는 틈틈이, 좋아하는 그림,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렸다. 절친 테오도르 루소(1812~1867)와 카미유 코로(1796~1875), 프랑수아 도비니(1817~1878) 등 마을 주민이자 동료 화가들의 존재도 큰 힘이 되었다. 바르비종 근처에 퐁텐블로 숲이 있어, 이들은 퐁텐블로파로도 불린다.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숲과 자연을 주제로 한 사실적인 풍경화에 매달렸다. 그러나 밀레의 관심은 오직 농민의 삶, 농촌의 풍경이었다.


‘농부 화가’ 밀레의 꿈은 1857년 그의 나이 43살 때 마침내 결실을 이뤘다. 노을빛 아래 드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추수 후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3명의 아낙네 모습을 그린 ‘이삭 줍는 여인들’을 통해서다. 자연주의를 지향한 대표적인 그림이다. 또 다른 걸작 ‘만종’(1857~1859)과 함께 밀레의 명성을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한 농촌풍경의 고전인 작품이다. 밀레는 1875년 1월 20일 지병이던 결핵이 악화해 사망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 파리 18구 몽마르트르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삭 줍는 여인들

제목처럼 3명의 아낙이 뙤약볕 아래에서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다. 이삭줍기는 수확 뒤 남의 논밭에 남아 있는 곡식 낟알을 허락받고 공짜로 거두는 행위. 아낙들은 농사지을 땅 한 뙈기 없는 가난한 농부의 아내들이다. 저 멀리 집채보다 높게 쌓아 올린 볏단 더미가 보이고, 그 옆으로 수확의 결과물을 가득 실은 짐수레가 곧 떠날 채비로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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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캔버스에 채색, 84 x 111cm, 1857,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노을빛 하늘 높이 한 무리의 새 떼가 날아오르고, 지평선 끄트머리에선 보일락 말락 희미한 모습의 일꾼들이 마지막 추수에 한창이다. 오른편 저 뒤로 말을 탄 사내가 멈춘 자세로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한데, 추수 현장을 감독 중인 농장주다. 낟알을 주워 모아 끼니를 이어가야 할 아낙들의 딱한 처지와는 상반된 풍경이다.


지극히 평범한 가을 들녘의 농촌 정경인데, 왠지 그림 전반에서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 화면 중앙에 과도한 비율로 그려진 세 아낙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보잘것없는 농사꾼의 아내들, 그런데도 이 그림의 주인공처럼 압도적인 구도로 배치됐다.


그림 제목에서 시사하듯, 아낙들은 왼쪽에서부터 이삭 줍는 행위를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삭을 찾고, 이삭을 줍고, 막 주운 이삭 다발을 앞치마를 묶어 만든 주머니에 넣기 위해 허리를 반쯤 편 모습이 그렇다. 허리를 90도 이상으로 깊게 숙인 모습은 이삭줍기가 육체적 피로를 동반하는 힘들고 고된 막노동임을 실감하게 한다.


햇볕에 검게 탄 아낙들의 얼굴과 손, 헤지고 닳은 먼지투성이의 신발이 노동의 강도를 입증한다. 아낙들의 손을 보라. 솥뚜껑처럼 투박하고 거친 모습이 울퉁불퉁한 대지를 닮았다. 손의 색깔과 땅의 색깔도 한 뿌리에서 나온 듯, 흡사하다. 허리를 굽힌 아낙들 아래로 그림자가 선명하고, 그 앞 전경(前景)도 빛에 가려져 있는 게 고단한 삶의 현장임을 증언한다.


그런데 풍년의 증거인 산더미 같은 볏단 더미를 뒤로 하고 흙 속에 숨은 낟알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을 부릅뜨고 땅을 헤집고 있는 아낙들 모습은 결코 비루하다거나, 애처롭지 않다. 그들의 처지, 그들의 행위에 깃든 생계형 간절함은 그들의 몸짓과 자태가 빚어내는 종교적인 엄숙함과 소박하고 작지만 아름다운 울림 앞에서 꼬리를 내린다.


가진 것은 없지만 노동의 가치와 노동하는 삶의 고귀함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아낙들의 진솔하고 성실한 자세 때문일 것이다. 그림의 3분의 2 이상을 황금빛 대지가 차지하고 있는 것도 ‘농자 천하지 대본’을 상징하는 절묘한 구도적 장치다. 천생 농부로 농부의 마음과 농사에 내재한 땀의 소중한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밀레이기에 가능한 장면이다.


아낙들 앞, 전경에 드리운 그림자와 달리 들판에 비치는 노을빛이 자아내는 은은하면서도 고즈넉한 명암대비도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한다.

땅은 정직하다. 그 앞에서 존엄성을 잃지 않고 묵묵하게 땀 흘리며 농사짓는 농부의 일상을 그 어떤 감상적 표현 없이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한 그림이다. 농부를 주제로 한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실주의 그림의 대명사로 길이 남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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