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아이콘, 세기의 화가들 Ⅴ
46. 뒤러,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인류 문화예술 역사가 가장 찬란했던 때는 르네상스 시대였다. 이탈리아에서 발원해 유럽 일대에서 유행한 르네상스는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인본주의 문예부흥 운동이었다. 옛 그리스 ‧ 로마문화의 인간 중심적 부활을 주창한 르네상스 시대는 천년을 이어온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몰락한 1453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돼 1527년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르네상스 정신은 이보다 앞선 13세기 말~14세기 초에 잉태되기 시작했다.
알브레히트 뒤러,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라임 나무에 유화, 67.1 x 48.9cm, 1500,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르네상스의 진원지는 이탈리아였다. 왜일까? 고대 로마제국의 땅이었던 이탈리아에는 로마 시대의 문화 유적이 많았고, 도시무역의 발달에 따라 부를 축적한 시민들의 문화예술 욕구가 높았으며, 국가 간 통상(通商)에서 유입된 자유롭고 다양한 문화가 성행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봉은 미술이었다. 르네상스 미술의 3대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1483~1520)가 모두 이탈리아 출신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3대 거장을 비롯한 수많은 이탈리아 화가들은 피렌체의 명문 가문이자 피렌체를 당대 최고의 문화예술 보고(寶庫)로 육성한 메디치 가문(1400~1748)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르네상스 문화를 활짝 꽃피웠다.
이탈리아와 달리 알프스산맥 너머 북유럽 국가인 독일은 프랑스와 영국보다도 르네상스 문화의 유입이 뒤처졌다. 중세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던 데다 잦은 종교분쟁과 전쟁 등 내부적인 요인이 컸다. 15세기 중엽이 돼서야 독일에도 이탈리아에서 넘어온 르네상스 정신이 싹을 틔우고 발흥의 조짐을 보였다. 그 중심에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판화작가이며 자화상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가 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 스물두 살의 자화상, 풀 먹인 양피지에 유화, 56 x 44cm, 1493, 루브르 박물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뒤러의 고향 뉘른베르크는 유럽의 중심부에 자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15세기 당시 상공업의 요충지였다. 더불어 이웃 나라 학자들이 앞다퉈 찾는 학문적 교류의 산실이었고, 출판 ‧ 인쇄업이 융성한 대도시였다. 특히 활판 인쇄와 목판화 수준은 유럽 최고였다. 15살 무렵부터 공방에서 판화 기술을 익힌 뒤러는 복제품에 지나지 않던 판화에 예술의 옷을 입히는 데에 성공했다. 뒤러 덕분에 판화는 예술작품으로 격상됐고,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뒤러가 27살 때인 1498년에 완성한 목판 연작 ‘성(聖) 요한 묵시록’은 압도적인 판화 기술과 탁월한 예술성을 겸비한 사상 최고의 판화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미술의 파고(波高)가 맹렬하던 이 시기, 판화와 달리 독일의 미술은 유럽의 변방이었다. 엄격한 사실주의와 상징적 표현이 특징인 중세고딕 미술의 영향이 여전히 독일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술가로서 자긍심과 탐구 정신이 남달랐던 뒤러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뒤러는 1494~1495년 르네상스 미술의 본고장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원근법과 인체 비례이론 등 르네상스 회화의 요체(要諦)를 공부하고 돌아온 뒤 독일미술의 위상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1점의 그림을 발표했다. 1500년, 그의 나이 29살 때였다. 그림의 제목은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정신에 사실주의 화풍을 버무린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의 상징이자 자화상 역사에 신기원을 이룩한 걸작 중의 걸작이다.
자신의 얼굴과 상반신만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며 자화상을 그림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등장시킨 까닭이다. 그 순간, 자화상은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회화로 새롭게 태어났다. 더욱 놀라운 점은 당시 화공(畵工)으로 기능공 취급을 받던 화가의 신분을 예수처럼 신성화시켰으며, 그림 속에 예술가의 자부심을 무한 고취하고 원작임을 증명하는 모노그램(사람 이름의 머리글자를 도안화한 결합 문자) 식 서명을 처음으로 선보였다는 데에 있다. 수학과 인문학, 자연과학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 권의 미술 이론서를 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한눈에 봐도 예수그리스도를 닮았다. 자화상 속의 뒤러가 ‘나, 알브레히트 뒤러는 예수다.’라고 외치는 것 같다. 화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의 발전에 이정표를 세운 그림이다. 예술가의 자의식을 신적 존재인 예수를 연상케 하는 모습과 자세로 파격적으로 드러냈으며 저작권을 증명하는 모노그램 서명을 사용했는가 하면, 자화상의 독립적 지위를 선언했다. 모두 서양미술사 최초의 기록이다. 괜히 ‘자화상의 아버지’가 아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눈빛. 표정은 점잖은 듯, 엄격하다.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로 화면을 꽉 채운 얼굴과 상반신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좌우대칭 비례의 표본이다. 어깨너머까지 길게 내려온 치렁치렁한 머리카락까지 영락없는 예수의 모습이다. 15세기 당시 좌우대칭의 정면 초상화는 예수에게만 허용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뒤러가 미술사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다.
알브레히트 뒤러, 열세 살의 자화상, 종이에 소묘, 1484, 27.3 x 19.6cm, 오스트리아 빈 알베르티나 박물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모피 옷깃을 만지는 오른손의 움직임도 예수가 축복의 기도를 할 때 볼 수 있는 자세다. 예수와 동격화해 지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로 자신을 치켜세운 뒤러의 자존감은 모피코트에도 진하게 배어 있다. 고가임이 틀림없어 보이는 붉은 색 모피코트는 화려함과 정교함의 극치를 뽐내며 화가를 지체 높은 귀족으로 우러러보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그림을 본 다른 화가들도 덩달아 우쭐하지 않았을까.
뒤러는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예술가는 신이다!”라며 자신만만해하고 있다. 사진보다 더 정교한 극사실주의 기법은 머리카락에서 확인된다. 꼬불꼬불, 반질반질하고 매끄러운 머리카락 전체에서 눈부신 윤기가 흘러넘치고 있다. 윤기가 빚어내는 사실감과 함께 풍성한 머리카락에서 질감과 양감이 느껴진다. 수염도 마찬가지. 머리카락과 수염의 형태 묘사가 실물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질감은 이마와 눈, 코, 입, 의상, 손에서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북유럽미술 특유의 섬세하고 정교한 사실주의 경향이 뒤러의 붓끝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뒤러의 얼굴 뒷배경은 칠흑같이 어둡다. 반면 얼굴과 손을 중심으로 환한 빛이 전면을 비추고 있다. 빛과 어두움의 강렬한 대비로 인물을 더욱 부각하는 효과를 낳았다. 빛이 이마와 손에 특히 집중된 것은 화가가 머리와 손을 쓰는 직업이라는 점을 암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알브레히트 뒤러의 서명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예술가와 예술가의 창의성을 지존(至尊)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흔적을 그림 곳곳에 풀어 놓은 뒤러는 화면 뒤, 어두컴컴한 배경 좌우에 화가의 긍지에 화룡점정을 찍는 두 개의 징표를 아로새겼다. 왼쪽부터 보면 위에 1500이란 숫자가 있고, 아래로 알파벳 A, D를 조합해 만든 문양이 나타난다. 1500은 그림의 제작연도, A와 D는 자신의 이름과 성의 머리글자로 요즘으로 말하면 모노그램 서명이다. 600년 전에 작품의 오리지낼러티를 입증하고 스스로 가치를 보증한다는 서명을 모노그램 방식으로 고안했다니, 경이로운 자의식의 발로(發露)이자 압도적인 브랜드마케팅이다.
모노그램 서명과 대칭을 이루는 오른편에 네 줄로 된 문장에서는 자신의 이름과 출신지, 나이, 그림에 대한 자부심, 인물의 신원을 밝히고 있다.
‘나,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9살 때 불변의 물감으로 나 자신을 그렸노라.’ 그림처럼 자신도 영원불변의 존재임을 당당하게 선언하는 자긍심이 하늘을 찌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