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마사초, 성 삼위일체
마사초(1401~1428)
원근법은 우리 눈에서 가까운 물체는 크게 보이고, 먼 물체는 작게 보이도록 표현하는 미술 창작기법이다. 2차원의 평면 속에 3차원의 현실을 재현하기 위한 원근법이 품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본질은 공간감과 거리감의 창출이다. 원근법이 개발되면서 2차원의 평면 회화는 3차원의 입체예술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마사초, 성 삼위일체, 프레스코, 667 x 317cm, 1427,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화가들이 시도한 원근법의 원리는 3가지.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사물의 크기를 축소하고, 색깔의 강약과 농담인 색조(色調)의 힘을 빼거나 표현대상의 세부 묘사를 간소화시키는 방식이다. 원근법은 과학적 탐구의 산물이다. 빛의 속성을 연구하는 광학과 수학적 비율을 토대로 한 기하학적 지식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원근법은 가상과 현실, 환영과 실재의 경계를 없앤 마법의 회화기법이었다. 원근법의 출현으로 사람들은 평평한 벽이나 캔버스에 묘사된 그림을 보고서도 실재 공간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짜릿한 공간감을 만끽할 수 있게 됐다.
원근법의 발명은 서양미술의 역사에 일대 전기(轉機)를 가져온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회화에 원근법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427년,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이다. 27살의 이탈리아 출신 천재 화가 마사초가 그림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꾼 원근법을 선보인 것이다. 순간, 2차원에 머물렀던 그림의 세계는 3차원의 신천지로 나아가게 됐다. 이후 원근법은 서양미술을 지탱한 불변의 진리이자 불문율로 모든 화가가 떠받들었다. 원근법의 절대성은 1830년대 실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사진의 발명에서 촉발된 현대미술의 시대가 열릴 때까지 계속됐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원근법은 회화의 기법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수학적 원리에서 탄생한 원근법을 처음으로 창안한 사람은 따로 있다. 바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의 시조로 불리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다. 불가사의한 기술력의 결정체로 칭송받는 피렌체 대성당(1296~1436)의 돔(1420~1436)을 설계한 주인공이다. 돔의 지름이 42m, 높이는 84m나 된다. 목재 지지구조물 없이 건축된 최초의 팔각형 돔이며 예나 지금이나 세계 최대 규모의 석재 돔이다.
마사초, 그림자로 병자를 고치는 성 베드로, 프레스코, 230 x 162cm, 1424~1425년경,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 브랑카치 채플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러면 마사초는 어떻게 원근법을 터득했을까? 20대 초반, 마사초는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아버지뻘의 대선배 브루넬레스키와 교류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미 르네상스 건축의 거장으로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다. 그에게서 원근법의 원리를 어깨너머로 배운 마사초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기념비적인 회화를 세상에 선보였다.
27살의 나이로 요절하기 1년 전인 1427년에 완성한 ‘성 삼위일체.’ 높이 667cm, 너비 317cm의 거대한 프레스코 회화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근법을 구사해 탄생한 그림이다.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를 낳은 ‘성 삼위일체’는 1100년간 지속된 비잔틴 미술(325~1453)이 르네상스 미술로 전환되는 촉매제 역할을 한 획기적인 그림이다. 유서 깊은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1278~1350, 1458년 개축)에 소장돼 있다.
1401년 피렌체 근교의 산 지오반디 발다르노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마사초는 16살 때 피렌체로 이주해 그림 공부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업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은 1422년~1428년 단 6년에 불과하지만, 르네상스 회화를 개척하는 데에 이바지한 그의 예술적 업적은 후대 화가들이 아낌없는 찬사를 바쳤을 정도로 위대했다. 1428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독살설과 약물중독으로 죽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성 삼위일체(Holy Trinity)
영원할 것 같던 비잔틴 제국 미술의 심장을 찌른 그림이다. 숨을 멎게 한 비결은 1점 투시 원근법과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명암대비, 그림을 조각 작품처럼 표현한 탁월한 입체적 사실감, 현실 세계 속 인간의 등장, 죽음의 상징적 표현을 통한 삶의 유한성 암시 등이다. 모두 신(神)의 영역에 있었던 비잔틴 미술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천년 넘게 서구 미술계를 지배한 비잔틴 미술은 종교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장식미술의 극치였다. 지나치게 화려한 색채와 현란한 장식성, 그 중심에 모자이크화가 있었다. 이는 곧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목적 아래 현실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성스러운 이미지 부각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비잔틴 미술의 세계는 우리가 실제로 보는 광경과는 동떨어진 비현실적이었고 그 속에 인간미는 부재했다.
마사초는 신성시되던 비잔틴 미술을 인간계로 불러냈다. 1점 투시 원근법은 그림에 공간감과 입체감을 불어넣었고, 자연광을 이용한 빛의 효과는 양감과 질감을 살려냈다. 살아있는 속세의 인간 모습과 해골을 대비시켜 인간의 영역을 강조했다. 마사초로 인해 그림은 범접할 수 없는 하늘에서 인간이 숨 쉬고 있는 땅으로 내려왔다.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미술이 시작된 것이다.
그중 1점 투시 원근법은 마사초가 최초로 정복한 회화사의 신대륙으로 서양미술사가 근대회화로 나아가는 결정적 뿌리가 됐다. 1점 투시 원근법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모든 선이 한 곳으로 수렴되는 소실점을 통해 2차원의 평면을 3차원의 공간으로 변환시키는 시각적 원리. 공간감과 거리감, 입체감이 생기면서 그림 속 풍경이 실재 풍경처럼 보이는 요술 같은 회화 원리다.
‘성 삼위일체’ 그림에서 소실점은 예수가 못 박혀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다리 맨 아랫부분 중앙이다. 화면 아래 무릎을 꿇은 두 기증자를 받치고 있는 돌계단 바로 위, 두 사람을 잇는 수평선의 한가운데 점과 십자가가 만나는 지점이다.
마사초가 1점 투시 원근법으로 서양미술사에 한 획을 긋자, ‘성 삼위일체’ 그림은 실로 놀라운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반 원통형의 사각 격자무늬로 된 천장 아래 성부인 하느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성자 예수의 두 팔을 받쳐 들고 있다. 하느님의 얼굴 바로 아래에는 예수의 머리 쪽으로 날아가는 흰 비둘기가 보인다. 성령의 상징이다. 그림 제목처럼 ‘성 삼위일체’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마사초,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 프레스코, 208 x 88cm, 1424,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 브랑카치 채플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예수 아래 왼쪽은 성모 마리아, 오른쪽은 사도 요한이다. 마리아와 요한이 서 있는 곳까지가 채플 안이다. 채플의 원형 기둥이 그것을 말해주며 채플 바깥 양옆에 세로 방향으로 길게 홈이 팬 황금빛 사각 벽주(壁柱)는 그 점을 재차 확인시켜 준다.
사각 벽주 앞 돌계단 위에 두 손 모아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은 그림을 기증한 부부다. 둥근 천장의 사각 격자무늬에서 시작해 예수의 양팔 끝을 지나 마리아와 요한의 시선을 거친 수직선은 십자가 맨 아래의 가운데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1점 투시 원근법의 전형(典型)이다. 그러자, 채플 안쪽으로 벽에 구멍이 뚫린 벽감(壁龕)이 등장한 것이다.
놀라움은 계속된다. 채플 안에 4개의 공간적 거리가 형성되면서 채플 바깥까지 모두 5개의 공간이 생겨났다. 가장 깊숙한 안쪽 천장의 사각 무늬, 그 앞으로 하느님에 이어 예수, 마리아와 요한, 마지막 두 기증자 부부까지 저마다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이 그림인가, 진짜 건물인가.” ‘성 삼위일체’ 벽화를 처음 본 당시 사람들의 충격과 놀라움은 익히 짐작이 간다.
그림의 구도도 흥미롭다. 마사초는 이 그림에서 총 5개의 삼각형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을 꼭짓점으로 기증자 부부까지 가장 큰 삼각형을 필두로 예수의 머리에서 기증자 부부까지, 또 예수와 마리아와 요한, 이어 가장 작은 삼각형 형태인 하느님 자체는 물론 역삼각형 모양의 예수까지. 마사초의 치밀한 수학적 계산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어슴푸레한 천장과 달리 채플 바깥으로 나올수록 점차 밝아지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효과는 인물과 건물 곳곳의 부피와 무게를 실감 나게 이끌고 있다. 자연광, 즉 햇빛의 원리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림 맨 아래 놓인 것은 석관이다. 석관 뚜껑 위에 정지된 시간처럼 해골이 누워 있다. 석관과 해골 모두 입체감이 뛰어나 평면 그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강하게 돌출된 모양에서 우리 눈은 조각으로 반응한다. 그 안쪽 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지금의 나(해골=죽음)는 원래 당신(살아 있는 모든 사람=삶)과 같았다. 당신도 언젠가 나처럼 될 것이다.” 삶의 유한성과 삶의 엄중함을 동시에 암시하는 경구이자 인간세계를 그리고자 한 르네상스 정신의 상징이다.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는 한 화면에 회화(인물)와 조각(석관), 건축(채플 안팎)이라는 또 다른 삼위일체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위대한 걸작이다.